<기호적 인간> 제1장 '간략한 서론: 기호와 기호적 경험' 정리

제1장 간략한 서론: 기호와 기호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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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간략한 서론: 기호와 기호적 경험

저자 노양진은 '기호'(sign)의 본성에 대해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의 관점에서 새로운 해명을 하고자 이 책을 썼다. 그리고 그를 위해 전통적인 기호학(semiotics/semiology)이 가진 문제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그 나름대로 비판을 했다. 노양진이 볼 때 전통적인 기호학에는 기호를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어떤 것', 즉 우리 밖의 사건이나 사태, 현상 등과 **'대응'(correspondence)**되는 것이라 여기는 소박한 가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기호학에는 소쉬르(F. de Saussure)의 구조주의 기호학, 퍼스(C. S. Peirce)의 화용론적 기호학, 심지어 카시러(E. Cassirer)의 상징형식 이론 등까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기호에 대한 대응이론과 같은 소박한 가정으로 인해 **"기호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과 **"기호적 의미의 원천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핵심적 물음에 여전히 답하지 못해왔다.

이에 반해서 노양진은 기호적 경험이 물리적 경험의 확장적 국면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고유한 특성을 갖는 경험 층위라고 말한다. 즉, **기호적 경험은 기본적으로 '신체화된 경험'(embodied experience)**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호는 우리 밖 세계의 사건이나 사태가 아니라 우리 경험의 한 국면일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럴까? 그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지에 대해 따져보려면 책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그의 논지는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G. Lakoff and M. Johnson)의 체험주의 관점과 '은유'(metaphor) 이론에 근본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제1장의 '간략한 서론'에서는 그러한 체험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몇몇 기본적인 개념들이 소개된다.

1. 기호의 주인
인간은 기본적으로 '기호적 사상'(symbolic mapping)의 주체, 즉 기호의 주인이다. 노양진에 따르면 구조주의 기호학이나 화용론적 기호학은 공통적으로 기호의 문제를 '기표'(signifier)를 축으로 해명하려고 했기에, 우리 자신이 기호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본다. 그러한 전통적 기호학이 드러내는 기표 중심의 실재론적 태도는 '상징형식'에 관한 카시러(E. Cassirer)의 논의를 통해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카시러는 기호의 문제를 우리 인식의 문제로 보았으며, 나아가 기호를 하위적 수준의 '기호/신호'(sign)와 상위적 수준의 '상징'(symbol)으로 구분함으로써 상징 능력을 고유한 인간의 능력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카시러의 한계는 '상징형식'을 선험적 인식구조로 간주함으로써 객관주의적 미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아무래도 이와 같은 한계는 신칸트학파의 공통적인 특성이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카시러의 선험적 상징이론을 뛰어넘어서 실질적인 기호작용에 대한 경험적인 해명을 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기표'라고 부르는 물리적 대상들은 사실상 기호적 경험에 동원되는 도구들일 뿐이다. 유기체에게 이러한 기호적 경험은 단순히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적인 결단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기호적 경험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국면에서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핵심적 징후이기도 하다. 첫째, 기호적 경험은 현재와 같은 몸을 가진 유기체로서 우리의 물리적 한계를 비켜서려는 유일한 통로다. 둘째, 기호적 사상은 무한히 중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만이 일차사상을 통해 주어진 추상적 경험내용을 새로운 기표에 사상하는 이차사상, 삼차사상, 또는 그 이상의 다차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물리적 경험과 기호적 경험
여기에서 사용하는 '기호적 경험'이라는 말은 체험주의를 따라 물리적 경험을 토대로 확장된 층위의 '신체화된 경험' 영역 전반을 가리킨다. 이러한 생각의 출발점에는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G. Lakoff and M. Johnson)의 '은유'(metaphor) 이론이 있다. 이들은 은유가 단순히 언어적 기교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이끌어 가는 중심적 원리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러한 은유 이론을 흔히 '개념적 은유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레이코프는 이러한 새로운 은유 이론을 **"개념체계 안의 영역 간 교차사상(cross-domain mapping)"**이라고 정의한다. 즉 은유란 원천영역(source domain)의 경험내용의 일부를 표적영역(target domain)에 사상하고 그 사상된 경험내용의 관점에서(in terms of) 표적 영역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상'이라는 번역이 그리 와닿지도 않아서 썩 괜찮은 번역인가 싶은 의문이 든다.)

​ 여기에서 더 나아가 존슨은 개념적 은유 이론을 확장함으로써 '신체화된 경험' 전반을 해명하는 **'상상력 이론'**을 전개한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이 '상상적 구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전 경험을 특징짓는 포괄적인 인지능력을 가리킨다. 존슨은 은유에서 사용되는 원천영역을 역추적하고 그 근원적 출발점이 우리의 몸과 두뇌, 환경이 직접 상호작용하는 물리적 층위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존슨은 모든 경험의 근원적 뿌리가 우리의 몸이라고 주장하며,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마음 속의 몸』의 핵심적 과제를 "몸을 마음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존슨의 상상력 이론은 **'영상도식'(image schema)**과 **'은유적 사상'(mataphorical mapping)**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상도식이란 신체적 활동을 통해 직접 발생하는 소수의 인식 패턴들이며, 시대와 문화를 넘어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인식의 기본 패턴들이다. 존슨은 「그릇」(Container), 「균형」(Balance), 「강제」(Compulsion), 「연결」(Link), 「원-근」(Near-Far), 「차단」(Blockage), 「중심-주변」(Center-Periphery), 「경로」(Path), 「부분-전체」(Part-Whole) 등의 영상도식을 예로 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상도식들을 물리적 대상은 물론 추상적 대상들에 '사상'(mapping)함으로써 사물을 구체적 대상으로 식별하며, 동시에 추상적 개념들 또한 구체화할 수 있다. 가령 「그릇」 도식을 꿈이나 역사 같은 추상적 대상에 사상함으로써 '꿈속에서'나 '역사 속으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이해할 수 있다.

3. 기호적 사상: 기호의 산출과 해석
그런데 이러한 기호적 경험을 특징짓는 것은 '기호적 사상'이라는 인지적 기제다. 이번에는 기호적 사상의 세 가지 특성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모든 물리적 대상은 기호적 사상을 거쳐 기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통해 물리적 대상은 비로소 기호적 해석의 대상, 즉 하나의 '기표'가 된다. 기표는 크게 신체기표와 비신체기표로 구분될 수 있으며, 비신체기표는 다시 자연기표와 인공기표로 나누어진다. 내 표정, 몸짓, 소리/언어, 수화, 춤 등 내 몸을 직접 보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기표가 바로 신체기표다. 비신체기표로는 산이나 바위, 강, 나무 같은 다양한 자연기표가 있으며, 온도계나 도로표지판, 악기 소리나 조각상, 회화, 문자언어 등 무한히 다양한 인공기표가 있다. ('기호적 조형'이나 '기호적 어포던스' 개념 등에 대해서는 이 책의 4장 참고)

1) 사상의 부분성
기호적 사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본성상 부분적이다. 첫째, 우리 경험의 파편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매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이든 추상적이든 경험내용 자체는 처음부터 파편적이거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기호적 사상에서 우리 경험내용의 일부만을 기표에 사상할 수 있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보는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자. 그때 우리는 비둘기라는 기표에 '평화'에 관한 추상적 경험내용의 일부밖에 사상하지 못한다. 애초에 나는 처음부터 '평화'에 관한 모든 경험내용을 가질 수도 없으며, 또 내가 갖고 있는 경험내용을 한꺼번에 사상할 수도 없다. 만약 내가 '평화'에 관한 모든 경험내용을 비둘기에 사상한다면, 내 비둘기에 관한 경험내용과 평화에 관한 경험내용은 동일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기호적 경험이 아니라 또 다른 평화 경험이 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사상의 부분성 때문에 모든 기호는 본성상 불완전한 기호일 수밖에 없다. 기호적 사상이란 이미 주어진 표적영역의 경험내용에 새로운 차원의 경험내용을 사상하는 것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만 질적으로 새로운 경험내용이 산출된다. 역설적이게도 기호적 경험의 근원적 불완전성이 사실상 기호를 산출하는 근원적 생명력인 셈이다.


2) 사상의 개방성
기호적 사상에 관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거기에 어떤 선결적 원리도 없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기표에 어떤 경험내용을 사상할 것인지를 규정해주는 어떤 선결적 원리도 없다. 기호적 사상은 우리의 자연적·사회적·문화적 조건에 복잡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개인의 특성에 따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작동할 것이다. 또한 기호적 경험은 스스로 궁극적 목적을 향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실용주의를 따라 우리 삶을 현재와 같은 몸을 가진 유기체로서 환경에 대처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기호적 경험은 이 대처 과정의 한 국면일 뿐이다.

​ 그렇다고 해서 기호적 사상이 완전히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로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경험은 물리적 층위와 기호적 층위의 중층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경험의 기호적 확장은 물리적 경험에 의해 강력하게 제약되며, 따라서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중층적 구조 안에서 우리는 물리적 층위에서 현저한 '공공성'(commonality)을 경험하며, 기호적 층위로 나아갈수록 증가하는 '변이'(variations)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객관주의나 상대주의는 우리 경험의 본성을 해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경험의 일부분에 초점을 맞춘 편향된 이론들이다.


3) 사상의 중층성
'기호적 사상'은 무한히 중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일차사상을 통해 주어진 경험내용을 또 다른 기표에 사상할 수 있으며(이차사상), 그렇게 주어진 경험내용은 또 다른 기표에 사상될 수 있다(삼차사상). 이 사상의 과정은 적어도 '원리적으로' 무한히 중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찌만, 우리의 실제적인 기호적 구조는 우리의 실제적인 이해 가능성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일차사상을 통해 산출된 추상적 경험내용은 다시 또 다른 기표에 사상될 수 있는데, 이것이 이차사상이며, 우리가 흔히 '상징'이라고 부르는 기호는 이차사상 이상의 다차사상을 통해 구성된 기호를 말한다. 부연해두어야 할 것은 모든 기호적 사상은 **'개념혼성'(conceptual blending)**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호적 의미는 단순히 사상된 경험내용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기표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내용과 새롭게 사상된 경험내용이 혼성되면서 복잡한 새로운 기호적 의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p.28~p.30의 도식 참고)

** 참고로 이 책의 저자 노양진 선생님께서는 저번 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마다 ZOOM 온라인 세미나를 공개적으로 진행하십니다.*
https://blog.naver.com/phil6060/222300490414
https://blog.naver.com/philia1223/222309898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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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좋네요. 노양진 선생님이 확실히 퍼트남을 주로 연구하셔서 그런지, 기호학적인 문제에서도 '대응' 개념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네요. 저는 정리해주신 노양진 선생님의 철학적 입장에 많이 공감이 됩니다. 제가 주로 공부하는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서도 경험 개념을 유사한 방식으로 해명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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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언어기표—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리적 대상의 하나—가 어떻게 철수를 대신한다는 말인가? 언젠가 퍼트남이 '마술적 지칭 이론'이라고 불렀던 그런 마술적 관계가 아니고서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32쪽)

네, 실제로 퍼트넘을 사이사이에 종종 언급하긴 하네요. '마술적 지칭 이론'에 대한 비판이 주된 이야기 같기도 해요.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도 그런가 보군요. 흥미롭네요. 그와 관련해서 참고할만한 좋은 입문서나 접근성 좋은 원전이 혹시 있을까요?

따라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호적 의미는 단순히 사상된 경험내용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기표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내용과 새롭게 사상된 경험내용이 혼성되면서 복잡한 새로운 기호적 의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의 내용이 정확히 가다머가 이야기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지평융합에 대응한다고 생각해요. 경험이라는 건 언제나 유한한 지평 속에서(사상의 부분성),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 있으면서(사상의 개방성), 끊임없는 지평융합을 통해(사상의 중층성) 이루어진다는 게 가다머의 핵심 주장이거든요. 가다머 관련해서는 조지아 원키의 『가다머: 해석학, 전통 그리고 이성』이라는 책이 제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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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국역본이 절판이 되었지만 잘 구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인용하신 구절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에서 이남인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발생적 현상학이 많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가다머가 후썰의 영향을 받은 계보인 탓이기도 하겠지요 :slight_sm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