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주 전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조금씩 조금씩 열심히 읽고 있는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이제 50절을 채 못 나갔어요.
저는 원문을 한 절(§)씩 먼저 읽고, 그에 대응하는 Baker와 Hacker의 해설을 주해서에서 읽은 후에, 노트에 각 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략하게 정리하며 읽고 있는데요, 이게 너무 많은 시간이 들 뿐만 아니라 가끔씩 이런 작업에 일종의 무의미함을 느끼게도 되는 것 같습니다.
원래 다른 철학책들은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을 메모하거나 밑줄을 쳐두는 방식으로 읽었는데, 이번에 아주 세세하게 읽어내야겠다는 시도가 잘못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 철학책을 읽는 좋은 방법,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잘 읽어내는 방법이 있을지, 읽어보셨던 분들은 어떤 방식으로 읽어 나갔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구절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철학적 탐구』의 모든 구절을 베이커와 해커의 방대한 주석서에 근거하여 독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조차 베이커와 해커의 주석서를 다 꿰고 있지는 않을 뿐더러, 베이커와 해커의 주석서가 반드시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애초에 베이커와 해커도 서로 해석상의 의견 차이로 결별해서, 그 주석서의 3권부터는 해커 혼자 썼는 걸요.)
해커의 해석을 바탕으로 『철학적 탐구』를 읽고 싶으시다면, 그의 대표적인 연구서인 Insight and Illusion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주석서는 『철학적 탐구』를 읽다가 종종 의문이 드는 부분을 찾아볼 때 사용하시거나, 특정한 주제와 관련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려 할 때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처음부터 주석서를 바탕으로 공부를 하려 하시면 지나치게 방대한 정보 때문에 길을 잃기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특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서 『철학적 탐구』를 살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철학적 탐구』는 조각글들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저 비트겐슈타인을 따라가려 하다 보면 그의 말들이 굉장히 산만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특정한 의문점이나 입장을 하나 쥐고서 글을 읽다가, 비트겐슈타인의 구절들 중에서 그와 연관된 내용을 발견한다면, 그 구절에 동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따지면서 생각을 전개해 보시면 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학부생 시절에 '본질'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과 '가족유사성' 개념을 접하였습니다(1-88절). 본질을 통해 현상들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하려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입장과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현상들이 서로 엇갈리게 유사하다면 아무런 본질을 지니지 않고서도 유사한 그룹을 형성할 수 있다고 지적하여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학원 석사 때에는 '규칙 따르기'(185-242절)와 '사적 언어'(243-427절)를 둘러싼 논의들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논의들은 해석하기에 따라 크립키처럼 회의주의적 의미론으로도 읽을 수 있고, 부르디외, 기든스, 가핑클처럼 사회학적 이론의 토대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나 매우 폭넓은 영감을 주는 논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뒤에는 '치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철학과 관련된 구절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65-88절). 로티와 맥도웰을 공부하면서 철학을 일종의 '치료'로 보는 관점에 동의하게 되었고, 그 입장들의 기원에 있는 인물로 비트겐슈타인에게 다시 관심이 생겼거든요. 또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난 뒤에는 제 지도교수님인 이승종 교수님을 따라 '자연사', '자연의 사실',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들을 중심으로 구절들을 읽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개념들이 그동안의 연구에서 종종 오해되거나 간과되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지닌 '인류학적' 측면들을 잘 조명해준다고 생각해서요.
여하튼, 이렇게 특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철학적 탐구』를 읽다 보니, 그 책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려워도, 어느 순간 산발적으로만 보이던 그 책의 구절들을 얼기설기 엮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내가 이쪽 관점에서 독해하던 구절들이 저쪽 관점에서 독해하던 구절과 이렇게 연결될 수도 있구나!"하고요. 물론, 저는 엄격한 의미의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는 아니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신 분들의 경험은 저와 또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특정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글을 읽으면서 점점 독해의 범위를 확장시켜나가는 방식이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