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대하여 쓴 글을 읽어봐주십사 합니다

다음은 제가 예전에 신앙에 대하여 쓴 글 입니다. 전공자 여러분들 입장에서 너무 수준낮은 글이라고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으나 .. 그래도 신랄한 비판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이 원하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곧 그가 신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뜻일 것이다.십자군 전쟁에서 오늘날 중동의 전쟁에 이르기까지,그들 각자가 믿는 신은 서로 달랐지만,“신의 뜻”이라는 말은 종종 대중을 선동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민수기』에서 마디안에 대한 학살 또한,모세가 이를 “신의 원수를 갚기 위한 명령”이라며자신의 결정에 신적 권위를 덧씌운 사례로 보인다.하지만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신의 계시는 인간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고 보았고,무한히 선하신 신께서 악을 직접 창조하셨다고 보지도 않았다.그들에게 악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인간의 자유의지가 남용된 결과였다.

오늘날의 윤리적 관점에서 본다면,마디안에 대한 학살은 ‘악’으로 여겨지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그리고 이 사건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악 개념을 바탕으로 다시 읽어내는 작업은종교 내부의 윤리적 자기 점검이라는 차원에서도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이렇듯 권위 있는 종교 내부에서조차 모순이 발생하는 현상은종교가 역사적으로 정치 권력과 얽혀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내가 보기에,‘선한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그 신의 이름으로 ‘악’을 정당화하는 순간,그 신앙은 스스로를 배신하는 셈이다.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고 가정한다면,그들이 믿는 신이 정말 존재한다 하더라도,그 신은 악을 명령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여겨진다.만약 신이 정말로 악을 의도한다면,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이 종교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윤리적 이상에 더 충실한 태도일 수 있다.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신앙의 부정이나 파괴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만약 어떤 종교 공동체가신의 직접적인 계시도 없이, 한 지도자의 명령을절대적인 신의 뜻인 양 받아들여 폭력을 실행한다면,그건 집단적 광기의 일종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그 순간, 개인의 믿음과 신념은얼마나 쉽게 외부 권위에 굴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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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주제가 섞여 있어서 논의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강올빼미가 학술적인 사이트인 만큼, 최대한 철학과 관련한 학술적 방향으로 논점을 좁혀 보자면,

(1) 신의 본질에 대해 혹은 신의 뜻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세철학에서 이러한 논의가 자주 다루어졌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 무한한 신에 대해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이 이루어진 것이죠. 가령, 어떤 철학자들은 유한자에게 귀속되는 긍정적 술어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술어를 신에게도 귀속시키는 방식으로('신은 선하다', '신은 아름답다', '신은 지혜롭다') 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다른 철학자들은 유한자에게 귀속되는 부정적 술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신은 죽지 않는다', '신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 '신은 주무시지 않는다') 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2) 신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가?

조금 더 신학적인 차원에서 논의하자면, 기독교 조직신학에는 '계시론(doctrine of revelation)'이라는 분과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게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는 신앙인데, 이러한 계시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고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분과가 계시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의 인식론과도 비슷한 분과입니다. 신학의 '신론'이 철학의 '존재론'과 비슷하다면, 그 신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계시론'은 철학의 '인식론'과 비슷한 것이죠.) 가령, 유대-기독교의 계시는 고대 근동의 다른 에피파니 종교들의 계시와는 어떻게 구별되는지, 참된 계시와 거짓된 계시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서로 다른 계시들 중에서 어느 쪽에 더욱 우위를 둘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계시론에서 다루어지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성경에 나오는 헤렘(진멸) 규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수없이 많은 논문과 단행본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 주제를 다루려면 구약성경의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문학적 배경을 전반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확실하게 합의가 이루어진 점은, (a) 구약성경의 정복전쟁은 애초에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뿐더러, (b) 헤렘은 현실적으로 고대 근동에서 이루어지기도 어려운 전쟁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처럼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던 청동기 시대 말기 레반트 지역의 전쟁에서, 정복지를 완전히 진멸해서 신에게 봉헌물로 바쳐버린다면, 오히려 군량 확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c) 구약성경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편집된 것은 대체로 바빌론 포로기 이후이다 보니, 구약성경이 그와 같은 전쟁에 대한 묘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령, (d) 오늘날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단순히 '살인자'라고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에서 곤도르 군대가 오크 군대를 무찔렀다고 해서 '학살'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 당시 이스라엘도 가나안 정복전쟁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상상'을 통해 자신들의 상황에서 강조하고자 하였던 교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교훈을 망각한 채 단순히 정복전쟁 자체에만 주목하게 되면, 실제 역사와도 어긋날 뿐더러 그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도 놓치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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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말씀을 듣고 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제가 아직 학술적 식견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걸 다시한번 알 수 있었습니다 . 수능도 얼마 안남았으니, 서울대학교 인문계열에 꼭 합격해서 학부생으로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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