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론적 논증에 대한 베리 스트라우드의 논문 두 편

스트라우드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인 "Transcendental Arguments"를 읽고서 1994년에 쓴 " Kantian Argument, Conceptual Capacities, and Invulnerability"를 읽는데, 세상에, 거의 똑같은 주장을 하는 논문인데도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명료하게 쓰여 있네요.

훨씬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큰 논문은 "Transcendental Arguments"라서, 저는 이 글을 먼저 읽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글은 다소 불필요하게 복잡한 방식으로 쓰여 있어서 정확한 논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굳이 스트로슨의 주장을 연역 논증 형태로 변화시켜서 번호를 매겨 분석을 하다 보니, 본래 단순했던 스트로슨의 논증이 괜히 더 지저분하게 바뀌어버렸거든요. 번호마다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세부 설명이 달려 있어서, 스트라우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헷갈렸고요.

그런데 대략 25년 후에 쓰인 " Kantian Argument, Conceptual Capacities, and Invulnerability"는 그런 불필요하게 번잡한 형식화가 없이 매우 읽기 쉽게 되어 있네요. (a) 칸트는 초월론적 논증을 일종의 '연역' 논증으로 제시하고자 하였지만 정작 그의 논증은 엄격한 의미에서 연역 논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b) 그래서 사유의 '가능 조건'으로부터 대상의 '존재'로 나아가고자 하는 칸트의 초월론적 논증이 어떻게 '마음'과 '세계'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 (c) 그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되는 원리들은 '검증 원리(verification principle)'처럼 애초에 사물에 대한 의심의 가능성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원리로 귀결되기 일쑤라는 것이 스트라우드의 논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이 어렵게 쓰였는지 쉽게 쓰였는지가 그 글의 내용이나 퀄리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오늘도 다시 확인하였네요. 오히려 2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쓰인 훨씬 성숙한 글이, 그 전에 쓰인 글과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데도 훨씬 읽기 쉬울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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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칸트 관련 글을 많이 올리셔서 궁금증이 생기는데, 영미권은 two-world/two-aspect/둘의 절충 이런 식의 구도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독어권에 경우엔 어떤지 혹시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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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문적인 칸트 연구자가 아닌 데다, 제 독일어 실력이 독일어권 논문을 아주 자유롭게 읽을 만큼 좋은 것도 아니라서, 독일어권 칸트 연구 현황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ㅠㅠ

다만, 영미철학이 1960년대까지는 칸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고, 스트로슨 이후로도 다시 칸트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것과 비교해 본다면, 유럽철학은 전반적인 경향 자체가 '친-칸트적'인 것 같아요. 현상학과 해석학 같은 사조가 칸트적 아이디어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고, 해체주의조차도 '유사-초월론적' 철학이라고 불릴 정도니까요. 실제로, 체이스와 레이놀즈의 『분석철학 대 대륙철학』에서는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이 칸트식의 '초월론적 논증'을 옹호하는지 비판하는지에 따라 뚜렷하게 갈라지는 양상을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종종 독일이나 프랑스의 칸트 연구에서는, 대륙철학의 이러한 영향이 칸트 연구 자체에도 역으로 반영되어 나타나기도 하더라고요. 하이데거, 아렌트, 하버마스, 라캉, 들뢰즈, 리오타르 등에게 영향을 준 칸트의 사유로부터, 칸트의 실제 텍스트를 다시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려는 일련의 시도들 말이에요. 국내에도 2000년대에 칸트학회에서 '포스트모던 칸트'라는 주제로 실제 칸트 학자들이 대륙철학으로부터 칸트를 바라보거나, 칸트로부터 대륙철학을 바라보는 작업들을 수행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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