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동물로 산다는 것' 중에서

200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W. G. 제발트와 더불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시대 소설가인 J. M. 쿳시의 아홉번째 장편소설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제3강 '동물의 삶 1 - 철학자와 동물'에서 발췌한 것입니다(103-110쪽). 창작과 비평에서 최근에 출간된 김성호역 신 국역본을 이용했습니다. 들녘에서 나온 구 국역본보다 번역이 뛰어납니다. 제3강과 제4강 '동물의 삶 2 - 시인과 동물'만 수록되어 있는, 평사리에서 출간된 <동물로 산다는 것>이란 국역본도 있습니다. 피터 싱어 등 동물윤리 전문가들의 에세이들이 부록으로 실려 있어 소장가치가 높은 책입니다만 소설은 김성호역 신 국역본에 실린것만큼 번역이 훌륭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쿳시는 많은 문학 전문가들이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소설가 (중 한명으)로 보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도 최근 몇십년간의 다른 노벨 문학상 수상작들조차도 쿳시의 대표작들에 비하면 문학적 깊이와 완벽히 한 몸이 된 지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쿳시의 대표작은 동아일보사에서 먼저 출간되고 최근 문학동네에서 같은 번역자에 의해 번역이 수정되어 다시 출간된 <추락>입니다. 원제는 'Disgrace'이니 <치욕>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 외 제가 읽은 작품 중에서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와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가장 좋았습니다. <추락>과 <야만인을 기다리며> 둘 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반론을 펼치고 있는 토머스 네이걸 - 보통은 '토마스 네이글'로 표기합니다 - 의 '박쥐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것인가?'는 해당 주제에 대한,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아주아주 유명한 논문으로 다음 웹페이지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문 대조하면서 세밀히 읽지를 않아서 번역이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습니다.

http://pakebi.com/philosophy/simri/bat.html


"토머스 네이걸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사람이 이제는 전공자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해진 질문을 하나 제기합니다. 박쥐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것인가?

네이걸 씨에 따르면 그저 박쥐가 사는 식으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 상상해보는 것, 우리가 밤에는 시각 대신 청각에 의존해 길을 찾아 날아다니면서 곤충을 잡아먹고 지내고 낮에는 거꾸로 매달려 지낸다고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박쥐처럼 행동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알고자 하는 것은 박쥐는 박쥐이듯이, 박쥐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 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결코 그런 앎에 도달할 수 없는데, 우리의 마음이 그 일에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박쥐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네이걸은 똑똑하고 공감 능력도 없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유머 감각까지 있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닌 어떤 것에 관해서도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보는 그의 입장은 비극적일 정도로 제한적인 것, 제한적이고 제한된 것입니다. 네이걸에게 박쥐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생물체, 어쩌면 화성인만큼 이질적이지는 않겠지만 확실히 어느 동료 인간보다도 이질적인 (짐작컨데, 특히 그 인간이 학계의 동료 철학자일 경우에는 그러한) 생물체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화성인이라는 한쪽 끝에서 박쥐, 개, (빨간 페터는 제외한) 유인원을 거쳐 (프란츠 카프카는 제외한) 인간이라는 다른 쪽 끝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체를 구성하게 됐습니다. 이 연속체를 따라 박쥐에서 인간으로 한 단계씩 나아갈 때마다 'X가 X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더 쉬워진다고 네이걸은 말합니다.

네이걸이 의식의 본성에 관해서 자기 나름의 질문을 제기하려는 의도로 박쥐와 화성인을 그저 보조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작가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저도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는지라 박쥐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싶군요. 카프카가 유인원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저는 그가 무엇보다 유인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네이걸이 박쥐에 관한 글을 쓰면 저는 그가 무엇보다 박쥐에 대해 쓰고 있다고 이해하고요."

그의 옆자리에서 노마가 심사가 뒤틀려 그에게만 들리는 작은 한숨을 내쉰다. 실은 그더러만 들으라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말을 계속하고 있다. "언뜻언뜻, 저는 시체로 존재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압니다. 그런 앏은 역겹지요. 저는 그 앎으로 인해 공포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피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는데, 특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렇지요. 우리의 그 앎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나는 죽게 되어 있다.' 이런게 아니라 체화된 것입니다. 잠시 동안 우리는 그 앎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삽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넘어서 살고, 그것을 뒤돌아봅니다. 하지만 죽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뒤돌아보지요.

제가 죽으리라는 것을 이러한 앎으로 알 때, 제가 아는 것은 네이걸식으로 말해서 무엇일까요? 저는 제가 시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아는 걸까요, 아니면 저는 시체가 시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아는 걸까요? 제게는 그 차이가 하찮아 보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시체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즉, 시체가 생명이 끊겨 있다는 것, 그것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영영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 말입니다. 일순간, 극심한 공포 속에서 제 앎의 골격이 온통 무너져내리기 전에, 저는 그 모순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죽은 동시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노마가 살짝 코웃음을 친다. 그는 그녀의 손을 찾아서 꽉 쥔다.

"우리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압박하거나 혹은 압박을 받으면 그런 식의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한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박을 받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를 압박하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우리는 죽음 속으로 생각해 들어갑니다. 이제 묻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면, 박쥐의 삶 속으로 생각해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박쥐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박쥐의 감각 양식을 통해 박쥐의 삶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네이걸은 주장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적어도 그는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박쥐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로 충만한 것입니다. 충만하게 박쥐로 존재함은 충만하게 인간으로 존재함과 유사한데, 후자 역시 존재로 충만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박쥐 존재, 후자의 경우에는 인간 존재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고려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존재로 충만한 것은 신체-영혼으로 사는 것입니다. 충만한 존재의 경험을 가리키는 한가지 명칭은 기쁨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영혼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 우리는 모두 동물이지요 - 체화된 영혼입니다. 이것이 바로 데까르트가 보았던 것, 그리고 그 나름의 이유에서 부인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동물은 기계가 사는 것처럼 산다고 데까르트는 말했습니다. 동물은 그것을 구성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 만약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면 기계에 배터리가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즉 그것을 돌아가게 만드는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은 체화된 영혼이 아니고, 그 존재의 성질은 기쁨이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도 했지요. 저는 이 공식이 늘 불편했어요. 그건 어떤 살아 있는 존재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지 않으면 그 존재는 어떤 면에서 이류라는 뜻을 내포하잖아요. 제가 생각, 인지에 대립시키는 것은 충만함, 체화됨, 존재의 감각입니다. 생각을 수행하는 일종의 유령 같은 추론 기계로서의 자신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반대로 공간 속에서 연장의 속성을 지는 수족이 달린 신체로 존재한다는 감각, 세계에 대해서 살아 있다는 감각 말입니다. 이는 극히 정동적인 감각이지요. 이런한 충만함은 데까르트가 제시하는 핵심적인 상태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그 상태는 텅 빈 느낌을 줍니다. 콩 한알이 꽁깍지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느낌이랄까요.

존재의 충만함이라는 상태는 어디에 갇혀서는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서구에서 선호하는 징벌 형태로, 서구는 (매질, 고문, 수족절단, 사형의) 다른 징벌 형태를 야만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세계 다른 지역이 자신의 징벌 형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힘을 쏟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서 뭘 말해줄까요? 제게 그것이 말해주는 바는, 신체가 공간 속에서 움직일 자유는 이성이 가장 고통스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타자의 존재를 해칠 수 있는 지점으로서 공격의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로 갇히는 것을 참는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생물체들 - 데까르트가 콩깍지 안에 감금된, 그래서 더이상의 감금이 무의미한 한알의 콩으로 그려낸 영혼의 그림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생물체들 - 에게서 가장 파괴적인 효과가 나타납니다. 신체 안에서 신체로서 사는 데서가 아니라 그저 체화된 존재라는 데서 흘러나오는 기쁨의 물결이 흐를 여지가 없는 동물원, 실험실, 연구소에 갇힌 그들에게서 말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무언가를 - 이성이든, 자의식이든, 영혼이든 - 공유하는가가 아닙니다. (이 질문에 따른 결론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을 감금하고, 죽이고, 그 시체를 모욕하면서 그들을 우리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수용소에 특징적인 공포, 거기서 진행된 일이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공포는 살인자들이 희생자들과 어떤 인간성을 공유함에도 그들을 이(蝨)처럼 대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추상적입니다. 공포는 살인자들이 희생자들의 자리로 생각해 들어가기를 거부했고, 다른 모든 이들 역시 그랬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덜컹거리면서 지나가는 저 가축 수송 열차에 그들이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저 가축 수송 열차에 있는 게 나라면 어떨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소각돼서 공기에서 악취를 풍기고 내 양배추들 위로 재가 되어 떨어지는 건 틀림없이 그 죽은 자들일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불타고 있다면 어떨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타고 있어, 나는 재가 되어 떨어지고 있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가슴을 닫아버렸습니다. 가슴은 어떤 능력, 공감이 자리한 곳으로, 우리는 이 능력 덕분에 때로 다른 이의 존재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전적으로 주체와 관련이 있고 객체, 그 '다른 이'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데, 이 점은 ('내가 박쥐의 존재를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객체를 박쥐로 생각하지 않고 또다른 인간으로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상상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 능력이 극단적으로 결핍됐을 때는 사이코패스라고 불리죠), 또 그런 능력이 있지만 발휘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좋은 사람일 토머스 네이걸이나, 저로서는 공감하기가 더 어려운 토마스 아퀴나스와 르네 데까르트의 시각과 달리, 우리가 다른 이의 존재 속으로 생각해 들어갈 수 있는 범위는 무한합니다. 공감적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증거를 원하시만다면 이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저는 수년 전에 <에클스가의 집>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쓰기 위해 저는 매리언 블룸의 실존 속으로 생각해 들어가야 했습니다. 제가 그것에 성공했을 수도,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다면 왜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저를 불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겠죠. 아무튼 요는, 매리언 블룸은 결코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매리언 블룸은 제임스 조이스의 상상의 산물이었습니다. 제가 결코 실존한 적 없는 어떤 존재의 실존 속으로 생각해 들어갈 수 있다면, 저는 박쥐나 침팬지나 굴의 실존, 저와 삶의 기층을 공유하는 그 어떤 존재의 실존 속으로도 생각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변 곳곳에 있는 죽음의 장소들, 우리가 거대한 공동체적 노력을 통해 그에 대해 우리의 가슴을 닫아버리는 도살의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언급할까 합니다. 매일 새로운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는데, 그래도 제가 아는 한 우리의 도덕적 존재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염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고 깨끗이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잔학한 행위들을 알면서도 몰랐던 독일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들을 지목합니다. 우리는 그 특별한 형태의 무지의 사후효과가 그들의 내면에 새겨졌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동참하기를 거부했던 고통의 당사자들이 그들의 악몽 속에서 다시 나타나 그들을 괴롭혔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침이면 초췌한 얼굴로 일어났고 고통스러운 암으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증거에 따르면 진실은 그와 정 반대입니다. 즉, 우리는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 처벌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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