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거짓 명제들에 관한 존재론: 『소피스트』에서 거짓 진술에 관하여 (1)

올해 7월부터 조금씩 써오던 글인데, 엉성하게나마 완성되어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원래는 더 깊은 논의들과 제 생각을 담아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아 아쉽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보완하고 싶은 글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2부로 나누게 되었는데, 후반부는 너무 대충 쓰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여기에는 1부만 올려 봅니다. 엉성하고 별로지만 보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거짓 진술에 관하여 2부 에서 확인해주세요.

1. 들어가며
『소피스트』편의 두 대화자들인 테아이테토스와 엘레아의 손님은 형상들의 결합이라는 주제에 관한 일련의 논의들을 거쳐서, 마침내 소피스트에 대한 일곱 번째 정의에 가까워져 간다. 앞에서 이루어진 길고 길었던 존재에 관한 논의들은 소피스트가 거짓된 것 즉 '유사 닮음' 제작 기술을 가진 자인지에 관해 그 둘이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고, 결국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아포리아에, 즉 존재와 비존재란 무엇인지에 관해 답해야 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문제가 나름 정리된 후에 두 대화자는 다시 원래 논의로 돌아와서, 소피스트를 '유사 닮음을 제작하는 기술자, 그 중에서도 현명한 자를 모사하는 자'로서 마지막으로 규정하며 대화를 끝맺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화편의 중심 문제, 즉 소피스트란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서 본질적으로 '거짓이란 무엇인가' 하는 진리에 관한 물음이 배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소피스트』는 단순히 존재론의 대화가 아니라 거짓된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대화이다. 이때 문제는 거짓의 본질적 의미에 있다.
그것을 위해 대화편이 표적으로 삼는 것은 '진술'이다. 즉 거짓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거짓 진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거짓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이 대화의 앞에서(233c~236e)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즉 여기에서 거짓된 존재, 또는 '유사 닮음'(phantasma)이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보이거나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었고, 따라서 있지 않지만(~이지 않지만) 어떤 점에서는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가 여기서 '거짓 자체'라는 말을 통해서 지시하는 것은 진술에서 부자연스럽게 분리된 거짓의 말이 아니라, 플라톤의 존재론에서 실재의 계층(tier) 안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것, 즉 '시뮬라크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짓 자체와 거짓 명제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 글은 플라톤의 거짓 명제에 관한 논의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조망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이 글은 다음의 순서를 따를 것이다. 먼저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거짓의 개념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2), 이어서 플라톤이 말하는 말들 간의 결합의 문제에 대해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통해 이해해볼 것이고(3),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손님의 말을 그러한 관점에서 분석할 것이다(4). 또한 부정적 명제에 관해 플라톤의 입장, 현상학적 입장과 비트겐슈타인의 입장 세 가지에서 알아볼 것이며(5), 마지막으로 위에서 고려했던 세 철학적 입장들을 넘어서는 사유를 기획하여 현대적 의미론을 향한 도전을 기대해볼 것이다(6).

2. 플라톤 철학에서 거짓의 개념
플라톤의 이 대화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거짓의 개념은 필수 불가결한 문제이다. '거짓됨'은 그의 철학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과 참됨의 관계는 무엇인가? 소피스트가 가짜 지식을 가진 모방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글에서는 위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소피스트』에서 거짓이란 어떻게 정의되는가? 대화자 중 한명인 '엘레아의 손님'(이하 '손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있지 않은 것이 믿음과 그리고 말과 섞이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이 참이라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섞인다면, 거짓된 믿음과 말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있지 않은 것들을 믿거나 말하는 것, 이것이 아마 생각과 말에서 생기는 거짓(pseudos)이기 때문입니다"(260c). 그러나 있지 않은 것은 여기에서 '그 어떤 점에서도 있지 않은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적 비존재가 아니다. 이 대화편의 이전 논의에서 보았듯이, 있지 않는 것들은 "어떤 점에서는 있어야 한다"(240e). 그렇다면 이것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있지 않은 것을 판단함'이라는 정의에서 논의를 통해 정정된(188d~189b) 규정인, '어떤 점에서 있는, 그러나 다른 어떤 점에서 사실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판단함'과 부합한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있지 않음'이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258b)는 중요한 점을 밝혀낸다. 있지 않은 것은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크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작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같은 것 역시 크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문장에서 표현된다면,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to be'는 "반대를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 상태의 어떤 것에도 적용될 수조차 없다"(Owen 1971, 234). 왜냐하면 플라톤은 "있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 이미 오래전에 작별을 고했기"(258e~59a)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짓이란 있음의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있는 것과 '다른'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있음과 다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테아이테토스와 손님은 하나의 거짓 진술을 예시로 가져오며 이에 관해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손님은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말이 어째서 거짓인지를, 그러니까 그것이 왜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서 말하는 것인지가 다음의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있기는 하지만, 당신에 관해 있는 것과는 다른 것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263b, 인용자 강조).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난다는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에게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오웬은 이를 "그에 대해 '난다'고 하는 것이 테아이테토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술어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 진술은 있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다"(Owen 1971, 237)고 해석한다. 또는 그 진술이 거짓인 까닭은 그것이 "그 주어에 있지 않은 것을 귀속시키기"(McDowell 1982, 127)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술에서 "사실은 서로 같이 있지 않은 것을 같이 말하면서"(Owen 1971, 264 주 75) 거짓이 생긴다. 그렇다면 거짓 진술은 관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 거짓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이라는 말로 그가 '유사 닮음'(phantasma)이라고 일컫는 것과 이 진술에서의 거짓됨을 구별해야만 한다. 전자는 소피스트를 '실재의 모방자'로 규정하면서 언급되는 개념으로, 원본과 닮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즉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보이거나 그렇게 믿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그것과 동시에 언급된 '닮은꼴'(eikon)과 다른 것이다. 닮은꼴에는 "어떤 기만(deceit)이나 가상(illusion)도 없지만", 유사 닮음은 "실재의 더 낮은 단계"로서 어떤 가상과 속임수를 수반하는 열등함으로 나타난다(Cornford 1935, 198f). 그래서 이는 플라톤의 존재론에 관계하며, 무엇과 결합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 그 자체로 거짓인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우리가 논의할 거짓 진술에서 거짓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잘못된 관계이다. 그래서 오웬은 플라톤이 "비실재(unreality)의 문제를 거짓됨(falsehood)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혼동의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Owen 1971, 250).
결국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는 두 가지 거짓 개념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둘은 '형상'이라는 동일한 체계 내에 있지만, 한편으로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거짓 존재는 형상의 낮은 계층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진술에서의 거짓은 형상들 간의 옳지 못한 결합 명제로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체계의 위치상으로는 매우 다른 것이다. 한편 이 글에서는 진술에서의 거짓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그렇다면 거짓 진술에서 결합에 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3. 서로 결합하는 말과 그렇지 않는 말이 있다
테아이테토스와 손님은 거짓에 관한 위의 규정에도 소피스트가 "믿음과 말은 있는 것과 결합하지 않는다"(260e)며 거짓 진술의 가능성에 대해 부인하는 경우를 우려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단어들의 결합에 관해 논의하며, "단어들은 일부는 결합하려고 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으려 한다"(261d)고 말한다. 즉, 어떤 단어가 서로 연속되어 있을 때 무언가를 지시하는 단어들은 서로 결합하는 것이지만, 연속되어 있어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단어들은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손님은 주어와 다른 주어가 결합하거나 동사와 다른 동사가 결합하는 경우에 대조되는, 주어와 동사의 연속만이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동사들을 이름들과 섞기 전까지는 (...) 있는 것의 존재도 있지 않은 것의 존재도 지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62c).
이는 플라톤이 앞에서(252e~59d) 말한 '형상 결합' 이론을 생각나게 하는 듯 하다. 플라톤은 해당 부분에서 손님은 "모든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섞이려 하고 또 어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252e~253a)고 주장하며, 철차들의 어울림을 그 예시로 든다. 그리고 위의 주어와 술어에 관한 논의를 "철자들에 관해 말했던 것처럼" 고찰해 보자고 제안하며,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찾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261d)이라고 말한다. 또한 진술에서 거짓이 생길 수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한 진술이 거짓인 까닭은 그것이 그 주어에 있지 않은 것을 귀속시키기 때문이라면, 이는 형상 또는 종류의 관계에서 거짓된 진술을 하는 것이 거짓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앞서 든 예시를 다시 들고 오면, 이는 테아이테토스가 가진 모든 본질적 결합관계들 안에 '난다'는 관계가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테아이테토스의 속성들 중 그 어느 것도 나는 것과 결합하지 않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1)
우리는 위의 예시문, 즉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말을 조금 명료하게 할 필요가 있다. 먼저 대화상의 맥락을 고려하면 이는 '어떤 사람이 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것은 나의 위의 해석에 따르면 ' '사람' 과 '난다'는 속성은 서로 결합한다'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개별자 테아이테토스와 관계하여 나타난다.
반 프라센(Bas C. van Fraassen)은 이를 논리학적 언어로 표현한다.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한다. "A는 B와 결합한다(combine) iff A가 B와 섞이는(blend with) 것이 가능하다"(van Fraassen 1969, 484). 즉 사람(A)과 나는 속성(B)이 섞이는 것이 가능할 때에만 그 둘은 결합한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바로 본질적 가능성을 말한다. 다음은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경우를 보자. 이러한 '참여(participation)'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이것은 형상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형상과 개별자 간의 관계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같은 책, 485). "A가 B와 결합한다(섞일 수 있다) iff 어떤 개체가 A와 B에 단번에 그리고 동시에 참여할 수 있다". 즉 테아이테토스가 '사람'과 '난다'에 동시에 참여할 수 없기에 저 진술은 거짓이라는 말이 된다. 다음의 것은 그 명제로부터 나온다. "A가 B와 섞인다 iff 어떤 개체가 실제로 A와 B에 동시에 참여한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실제로 그 둘에 동시에 참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위의 진술은 형상들 간의 그리고 그들과 개별자 간의 결합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은 아크릴(J. L. Ackrill)이 계사 'is'를 'shares in~' 즉 형상 결합에서의 언어적 표현으로 보았던 것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Ackrill 1957).
우리는 이러한 낱말들 간의 결합의 문제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철학 논고』 에서 표현된 것과 유사함을 본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리에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2.012). 게다가 그의 다음의 언급은 그 유사성을 거의 확실하게 한다. "사태는 대상들(실물들, 사물들)의 결합이다"(2.01). 다시 말해서, 사물들의 결합의 가능성은 그 사물 속에 논리적으로 선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의 전통 형이상학과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플라톤의 본질가능성과 유사함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고찰은 '논리적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대상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대상의 형식"(2.0141)이고, 이 형식은 '논리적 형식'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논리적 공간"(logical space)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 대상들 ("형상") 간의 결합의 내적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Pippin 1979, 182). 반 프라센은 이 개념을 색깔 스펙트럼의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형상 A가 논리적 공간 H의 구역 H(A)로 표현될 수 있다면, "x는 A에 참여한다"는 개별자와 형상 간의 명제는 H 속 x의 위치가 H(A)안에 있을 때에만 참일 것이다. 이런 논리를 A와 B의 결합 관계에 적용시켜 보면, A와 B의 결합은 H(A)와 H(B)의 겹침(overlap)으로 설명될 수 있다(van Fraassen 1969, 493). 즉 '사람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명제는 사람(A)과 난다(B)는 것이 차지하는 논리적 공간이 겹치는 곳 E가 테아이테토스일 경우에 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서로의 논리적 집합이 교집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 조건들은 명제에 의해 사실들에 허용되는 놀이 공간을 확정한다"(4.463).
그렇다면 그는 플라톤과는 무엇에서 다른가? 가장 중요한 점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언제나 그림과 모사된 것 사이의 논리적 형식의 동일성을 고수한다"(Pippin 1979, 183)는 것, 다시 말해서 언어와 현실 간의 동형론(isomorphism)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반면 플라톤에서는 이러한 언어와 세계의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지 물음에 부쳐지지 않은 채 있다. 그러나 이 둘 모두는 일상적 언어의 여러 측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난점을 가진다. 나는 이것이 플라톤적 언어 모델도, 전기 비트겐슈타인적 설명도 아닌 오직 논리적 관계가 아닌 현상학적 언어에서만 적절하게 답변될 수 있다고 본다.


1) 이에 대한 엄밀한 논쟁은 현재의 관심사가 아니기에, 단지 필자가 지지하는 견해를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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