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칸트의 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스트로슨의 The Bounds of Sense, 앨리슨의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한나의 Kant and The Foundations of Analytic Philosophy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스트로슨의 책은 대학원 석사 시절에 수업을 통해 이미 읽은 적이 있고, 한나의 책은 작년에 짓;다 세미나를 통해 읽은 적이 있지만, 앨리슨의 책은 이번에 처음으로 직접 읽어보았네요. 물론,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책이라고 해서 제가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새롭게 책들을 읽고 있다고 해서 제가 내용을 완벽하게 아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보니, 저 책들에서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부분까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트로슨의 책으로는 117쪽까지이고, 앨리슨의 책으로는 156쪽까지이고, 한나의 책으로는 주로 제2장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칸트 연구서 세 권을 비교하여 읽으니, 따로 읽을 때는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였던 쟁점들을 훨씬 선명하게 알 수 있어서 좋네요.
스트로슨의 The Bounds of Sense는 영미권에 칸트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고전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영미권 분석철학은 칸트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항하여 등장한 사조이다 보니,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칸트는 분석철학에서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프레게, 무어, 러셀 같은 인물들은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극렬하게 거부하였고,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 같은 인물들은 실제로는 칸트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칸트의 철학 자체를 딱히 강조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1966년대에 스트로슨의 이 책이 출판되면서 영미권에서도 칸트의 철학에 다시 주목하려는 경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스트로슨은 영미권 철학자들이 혐오하는 '초월론적 관념론'을 제거하고서도 칸트의 철학을 얼마든지 유의미한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칸트의 철학에서 무엇이 오늘날에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은지, 그리고 무엇이 여전히 형이상학적으로 가치 있을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구분하거든요.
이미 스트로슨 본인이 1959년에 출간한 Individuals라는 저서 역시 칸트식의 '초월론적 논증'에 근거하여 영미권에 형이상학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하였고, 당대에 그 시도가 많은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보니, 그의 칸트 연구서인 The Bounds of Sense도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출간된 지 거의 60년이 된 책인데도 여전히 가장 많이 인용되는 칸트 연구서로 자리잡고 있을 정도니까요. 아마도 오늘날 영어권 분석철학이 칸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표준적' 혹은 '교과서적' 이해는 스트로슨이 만들어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스트로슨은 초월론적 관념론이 제거된 칸트 해석을 제시하여 이후에 분석적 헤겔주의가 등장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죠. 칸트의 철학에서 개념화되지 않은 '사물 자체'를 제거하려 하였던 것이 헤겔의 기획이었고, 영미권에서는 바로 스트로슨이 그 기획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대표적인 '분석적 헤겔주의자'인 맥도웰도 "스트로슨의 칸트는 칸트보다는 헤겔에 가깝다."라고 평가할 정도거든요.
반대로, 앨리슨의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은 칸트의 철학에서 초월론적 관념론을 제거하려 하는 스트로슨의 기획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등장한 연구서입니다. 이 책은 1983년에 초판이 나왔고, 2004년에 재판이 나왔습니다. 초월론적 관념론에 대해 제시되는 수많은 비판들은 '현상/사물 자체'라는 칸트의 인식론적 구분을 존재론적 구분인 것처럼 잘못 해석한 데서 생겨난 오해라는 것이 앨리슨의 핵심 주장입니다. 칸트는 '사물 자체'를 현상 뒤편에 알려질 수 없는 미지의 실재 따위로 상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죠. 오히려 칸트는 우리가 어떠한 관점을 취하는징 따라 하나의 사물을 '경험과학적' 방식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초월론적' 방식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고 강조하였고, 또한 하나의 사물을 '초월론적' 방식으로 인식하려 할 경우에 그 사물을 '우리의 인식 조건'에 주어지는 것으로 사유할 수도 있고 '우리의 인식 조건'에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사유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칸트의 철학에 대한 '두 측면 해석'이라고도 일컬어집니다. 본래 두 측면 해석 자체는 독일의 칸트 연구자인 프라우스가 1970년대 초반에 제시한 것이지만, 앨리슨이 1980년대에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를 출판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죠. 그래서 앨리슨은 자신의 이전 세대의 지배적인 칸트 해석을 극복하기 위해 책 전반에서 스트로슨을 주요한 타겟으로 삼아 공격하기도 하고, 스트로슨의 해석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는 가이어 같은 칸트 연구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스트로슨이나 가이어는 칸트의 철학에서 초월론적 관념론을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앨리슨이 보기에 초월론적 관념론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정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초월론적 관념론이 그들이 비판하는 것만큼 잘못된 철학적 입장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스트로슨의 The Bounds of Sense와 앨리슨의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은 함께 비교하면서 읽으면 서로 날카롭게 대비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월론적 관념론'이라는 큰 주제에 대해서도 대비가 이루어지지만, 초월론적 관념론을 옹호할 것인지 비판할 것인지를 둘러싼 세부 내용에서도 대비가 이루어집니다. 가령, 스트로슨은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감성의 형식으로서 공간을 도출하기 위해 제시된 '기하학으로부터의 논증'이 설득력이 없다고 보고, 초월론적 관념론이 '기하학으로부터의 논증'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지만, 앨리슨은 초월론적 관념론이 반드시 '기하학으로부터의 논증'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독립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스트로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부터 제시된 '판단표'로부터 순수 지성 개념들의 '범주표'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칸트의 시도가 프레게 이후 형식논리학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평가하지만, 앨리슨은 칸트가 '판단(judgment)'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판단함(judging)'이라는 활동으로부터 범주표를 도출한다고 해석하면서 스트로슨의 비판으로부터 순수 지성 개념의 '형이상학적 연역'이라는 과제를 구출해내고자 합니다.
한나의 Kant and The Foundations of Analytic Philosophy는 스트로슨과 앨리슨의 책들만큼 칸트 연구의 고전적 텍스트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칸트의 철학이 영미권 분석철학에서 지닐 수 있는 의의에 대해 다른 어느 텍스트들보다 심도 깊게 다룬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제가 '칸트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칸트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하였는지에 대한 주석적인 연구는 저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논문 작성을 위해서는 주석적인 연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는 해도, 저에게는 그런 연구보다도 칸트가 도대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요. 물론, 스트로슨의 책은 그 의문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을 주고 있긴 하지만, 스트로슨이 더 이상 영미권 분석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철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보니, 그의 대답을 곧바로 오늘날 이루어지는 논의들에 적용하기는 다소 어렵습니다. 앨리슨의 책은 애초에 전문적인 칸트 연구서의 정체성을 너무 명확히 지니고 있어서, 칸트의 철학 바깥으로는 거의 나아가지 않고요. 이러한 한계에 비추어 볼 때, 한나의 책은 아주 뚜렷한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나는 칸트야말로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의미론'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논의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면서, '분석/종합'의 이분법을 비롯한 다양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주류 분석철학과 달리) '콰인적이지 않은' 대답을 칸트에게서 찾아내려 하거든요.
칸트의 철학에 대한 한나의 주석적 입장은 많은 부분 앨리슨과 유사한 것으로 보입다. 실제로, 한나는 앨리슨의 '두 측면 해석'을 수용하면서도 그 해석을 좀 더 명료하게 발전시켜 '두 개념 이론'이라는 것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대상'이란 우리의 개념화 방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미리부터 '사물 자체'라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각적 직관을 개념화 방식에 따라 '현상'과 '예지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대상이 구성된다는 것이 칸트가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현상'과 '예지체'는 모순되는 대상인 것처럼 여겨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실의 '물리적인 원'과 기하학의 '이상적인 원'을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두 가지 '원' 개념을 동일한 대상에 뒤섞어서 적용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칸트의 '현상'과 '예지체'도 사물을 개념화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칸트의 철학에 대한 주석적 입장으로서는 앨리슨이나 한나의 '두 측면 해석'이 올바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해석이 스트로슨이 제시한 철학적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여전히 다소 의문스럽습니다. '두 대상 해석'이나 '두 측면 해석'이나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인식을 성립시키는 '가능 조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과 그 가능 조건에 대한 '초월론적 반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의존하고 있는데, 저로서는 애초에 '가능 조건'과 '초월론적 반성' 자체의 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칸트가 유클리드 기하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뉴턴 역학 같은 당대에 통용된 학문들에 의존하여 그 '가능 조건'을 발견해내려 하고 '초월론적 반성'을 성립시키려 한다는 스트로슨의 비판에 대해 앨리슨이나 한나가 적절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a) 그 학문들이 더 이상 절대적 권위를 지니지 않는 우리 시대에 과연 칸트와 같은 방식으로 초월론적 철학을 성립시킬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고, (b) 애초에 그 학문들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초월론적 철학이 정작 그 학문들에 호소하여 성립한다는 점도 극복하기 어려운 순환논증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스트로슨 본인은 칸트의 철학에 대해 수많은 날카로운 비판들을 제시하였으면서도, 여전히 이성의 한계를 긋고자 하는 초월론적 철학의 기획 자체에 대해서는 옹호적이더라고요. "정합적 사유에 한계를 제시하기 위해, […] 그러한 한계의 양쪽을 사유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한계까지 사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면서 말이에요. 칸트는 이성의 한계 바깥의 '사물 자체'를 거부하였으면서도 이성의 한계를 긋기 위해 다시 '사물 자체'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초월론적 관념론'이라는 잘못된 입장에 빠졌지만, 스트로슨 본인은 칸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초월론적 철학의 기획을 성취할 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스트로슨의 '초월론적 철학'과 '초월론적 논증'에 대해 제시된 이후의 수많은 비판에 비추어 볼 때, 저는 '이성의 한계'를 긋고자 하는 작업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면 우리는 이 한계의 양쪽 측면을 생각할 수 있어야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저에게는 더 올바른 것처럼 보이고, 그 주장이 지닌 자기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저에게는 더 솔직한 것처럼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