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사기와 발작버튼 2

  1. 지적사기와 발작버튼이란 글을 쓴지 1년이 지났다. 시간 나면 2부를 쓰겠다고 했는데 게을러서 미뤄두고 있었다.

이런 대단찮은 글을 쓴 거 가지고 1년 지났네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 글을 쓴 이후에도 여전히 '소칼 사건'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만큼 내가 이 문제에 집착했던 것 같다. 이미 사람들이 신경 쓰지도 않은지 20년도 더 되어가는 문제를 가지고 집착하고 있는 게 웃기기 까지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내 철학 지식이 미진해(과학 수학 지식은 더 미진하다) 영어로 된sokal에 대한 반박들을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꽤 있었고, 불어를 할 줄 모르기에 불어로 된 글들은 더더욱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글을 쓴 데에 부끄러움 까지 느껴진다. (솔직히 내가 왜 소칼 사건에 열광하는지,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을 이런 류의 비판에 맞서 옹호하고 싶은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찾아본 들뢰즈에 대한 몇 가지 옹호들을 소개하고 내 소감을 간략하게 적는 것으로 글을 마칠 생각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스스로가 그만 집착했으면 좋겠다.

  1. 소칼의 비판에 대한 옹호들 - 들뢰즈의 경우

소칼과 브리크몽은 과학과 수학의 '엄밀한 사용'을 강조하며 철학자들을 비판한다. 과학과 수학은 누가 뭐래도 엄밀한 학문이고, 타 학문에서 수학과 과학의 개념들을 사용할 자유가 있지만, 그럴 경우에는 개념들의 사용에 대해 두 학문이 어떻게 연관 관계를 지니는 지에 대한 명시가 필요하다. 자신들이 다루는 텍스트에 대한 문맥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대해, 소칼과 브리크몽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저자들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도, 비판 대상이 되는 철학자들이 그런 명시를 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의 비판은 오직 그 점을 향한다고 주장한다.

2. You don’t understand the context
Defenders of Lacan, Deleuze et al. might argue that their invocations of scientific concepts are valid and even profound, and that our criticismsmiss the point because we fail to understand the context. After all, we readily admit that we do not always understand the rest of these authors’ work. Mightn’t we be arrogant and narrow-minded scientists,missing something subtle and deep? We would respond, first of all, that when concepts from mathematics or physics are invoked in another domain of study, some argument ought to be given to justify their relevance. In all the cases cited here, we have checked that no such argument is provided, whether next to the excerpt we quote or elsewhere in the article or book.(Intellectual imposters, 7-8)

그리고 그 철학자들 중에는 (소칼이 포스트 모던의 기수라고 본)들뢰즈가 있다. 소칼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카오스를 자신들의 철학 개념으로 쓰다가 아무런 명시도 없이 과학의 '카오스'로 넘어가는 걸 비난한 후, 과학을 다루는 나머지 구절이 말이 되는 부분이 없다 토로한다. 뿐만 아니라 들뢰즈는 <의미와 논리>에서 '특이성'이라는 개념을 자기 철학의 의미로 사용하다가 나중 가서는 수학적 의미로 쓴다는 점을 비판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들뢰즈가 자신 만의 개념을 쓰다가 수학적, 과학적 맥락에서의 개념을 섞어 쓰는 '지적 게으름'을 보인 것이다.

Let us note in passing that the word ‘chaos’ is not being used here in itsusual scientific sense (see Chapter 7 above), although, later in the book, it is employed without comment also in this latter sense. (Intellectual imposters146-147)
But in the next paragraph, Deleuze discusses ‘singular points’ using mathematical terms taken from the theory of differential equations (cols, nœuds, foyers,centres) and continues by quoting, in a footnote, a passage of a book on differentialequations that uses words like ‘singularity’ and ‘singular point’ in their technicalmathematical sense. See also Deleuze (1990, pp. 50, 54, 339–40n). Deleuze is, ofcourse, welcome to use these words in more than one sense if he likes, but in that case he should distinguish between the two (or more) senses and provide an argument explaining the relation between them.

하지만 소칼은 들뢰즈가 지적 게으름을 보이는(것처럼 보이는) 대목들에 대해 소개만 할 뿐(영역본 기준으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Deleuze 1994 p.156 and note 14, p.206 and note 7/<<의미의 논리>>의 경우 Deleuze 1990 pp.50, 54, 339-40n), 그 대목에서 들뢰즈가 쓰는 '카오스'나 '특이성'이 어떻게 과학과 수학에서 쓰이는 '카오스'나 '특이성' 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 Gabriel Stolzenberg의 고발에 따르면 이미 소칼과 브리크몽은 들뢰즈의 카오스를 카오스 이론의 카오스로 이미 오해한 전적이 있다. #)그 부분이 과학과 수학의 개념을 빌려 쓰고 있다 '선언'할 뿐이다. 내가 볼 때 그 선언의 근거로 기껏해야 벨기에의 물리학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철학이란 무엇인가, p.206 and note 7) 과 수학자 로트만(의미의 논리)의 저작이 소칼이 지적한 주석에 써있을 뿐이다.

철학자 소운 이정우는 이 점을 호되게 비판한다. 그는 소칼이 지적하는 대목에서 카오스와 특이성은 들뢰즈 자신의 철학 용어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라 주장한다.

(<<지적사기>> 국역본 기준)204쪽의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적 카오스와 과학적 카오스를 구분하고 있다. 소칼은 여기에서의 "카오스라는 단어의 쓰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과학적 의미와 거리가 멀다는 것, 그런데도 뒤에 가서는 "아무런 해명 없이 다시 과학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소칼의 첫 번째 문장은 '흐리멍덩하다'. 철학적 카오스를 지적하는 것인지 과학적 카오스를 지적하는 것인지가 불투명하다. 소칼이 인용한 문장은 철학적 카오스를 정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과학적 의미' 와 다르다. 그 부분은 바로 과학적 카오스와 철학적 카오스를 구분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그리고 뒤에 가서 과학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그 부분이 물리학을 논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칼이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게 된다.(시간의 지도리에 서서(2000), 176

이제 인용부분을 하나씩 뜯어서 보자. 우선 처음에 "특이성-사건들은, 계열들간의 차이들을 분포시키는 포텐셜 에네르기를 갖춤으로써...."의 부분을 보자. '특이성-사건들'은 바로 특이성들로서의 사건들(더 정확히 말해 순수 사건들)을 가리킨다. '먹다', '달리다', '칼로 찌르다', '키스하다' 등등이 바로 특이성-사건들이다. 그런데 이 특이성-사건들이 '포텐셜 에네르기'를 갖춘다고 했다. 왜인가? 특이성-사건들은 바로 잠재태들이며, 따라서 구체적 조건이 주어지면 현실화될 수 있는 포텐셜 에넥르기를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시에서의 '포텐셜'은 자연과학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영원한 객체들'에 부여하는 양상인 '포텐셜리티'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소칼은 <<지적사기>> 216쪽, 각주 19에서 들뢰즈가 '특이성', '특이점'의 개념을 미분 방정식 이론의 맥락에서 썼다고 하면서(<<의미의 논리>> 한글본, 197쪽의 마지막 문단을 가리킴), 이런 말들을 왜 구분 없이, 논거도 없이 사용하느냐고 시비를 건다. 그러나 우선 이 문단에서의 특이점들은 미분방정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한글 번역자가 '결절점', '초점', '중심점' 으로 번역한 것은 내가 번역한 말로는 목, 매듭, 교차로, 중심.... 등등에 해당한다. 소칼은 들뢰즈가 매우 상싱적이고 일상적으로 쓴 말들을 '미분방정식 이론의 맥락'에서 썼다고 어이없이 과장해서 해석해 놓고서는 그것을 질타한다.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서 때리는 격이다.(176-177)

물론 이 문단의 끝에 붙은 각주에서 들뢰즈는 로트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로트만을 인용한 것은 이미 한 이야기를 부연하는 것이지, 로트만을 자신의 이야기의 근거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놓고서 수학적 예를 부연으로서 덧붙이는 것과 그것을 논의의 논거로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177)

소칼과 브리크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둘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미적분학이 나오는 대목을 여러 차례 열거한다. 소칼에 따르면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저서를 통해 17세기에 미적분학이라는 수학의 새로운 분과가 탄생한 이후, dx와 dy 같은 '무한소' 양의 도입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고 이 문제제기는 달랑베르와 코시가 '극한'이라는 엄밀한 개념을 도입하며 해결되었다. 이 극한 개념은 19세기 중반 이후 나온 모든 미적분학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150년 전에 이미 심도 있게 이해된 수학적 내용을 들뢰즈가 불명료한 말들로 신비화 시켜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한편 과학 전쟁 당시 쓰여진 이 리뷰에서 마이클 해리스(컬럼비아 대학의 수학교수로, 재밌게도 소칼과 같이 니카라과 프로그램에 참여했었고, 소칼도 <<지적사기>>를 펴내며 서문에서 해리스에게 감사를 표한다. 2019년엔 과학전쟁을 회상하는 칼럼을 쓰시기도 했다.)철학자 Jean-Michel Salanskis가 들뢰즈를 옹호하는 것을 소개한다.

(해당 내용은 프랑스에서 <<지적사기>>에 대항해 출판된 (Impostures scientifiques - Baudouin Jurdant - Éditions La Découverte)에 실려있으며, 리뷰에서 해리스는 소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소칼의 지적을 단순히 반-프랑스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IS의 몇몇 저자들의 경향에도 비판적이다)

Salanskis에 따르면 소칼은 자신이 문제삼고 있는 해당챕터, 4장 차이의 이념적 종합Synthèse idéelle de la diffèrence의 해당 대목들에서 들뢰즈가 말하고 싶어하는 게 뭔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해당 대목에서 들뢰즈는 단순히 무한소에 대한 내용을 신비화 시키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플라톤적 이념이, 칸트적 재해석 속에서, 모든 개체들이 발생하는 잠재적인 것 속 차이 자체의 게임으로 재해석 되어야 하는지" how the Platonic idea, in its Kantian reinterpretation, “should and must be reinterpreted as a game of the difference with itself in the virtual, from which all individual things are supposed to arise" (IS p.171)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소칼은 <차이와 반복> 제 1장 '차이 그 자체'에서 미적분을 논하는 대목(Deleuze 1994:46-47, 국역본은122-124, Salanskis에 따르면 이 대목은 4장 '차이의 이념적 종합'의 주제를 미리 예비하고 있다)에서 puissance du continu의 정확한 번역이 'power of the continuous' 가 아니라 'power of the continuum'이 되어야 한다 주장하며, 수학에서 '극한limit'과 연속체continuum는 다른 개념이고 들뢰즈의 도식은 불명료하다 불평한다. (puissance는 차이와 반복 국역본에선 역량으로, 영역본에서는 power로 번역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지적사기 국역본에는 power를 '농도'라고 생뚱맞게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Salanskis는 해당 지적이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Salanskis는 여기서 쓰이는 puissance가 아리스토텔레스의 δυναµισ(Dynamism)의 번역어임을 착안해, (Dynamism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가능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내재된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힘 정도로 사용되는) 해당 대목의 continu가 수학의 연속체continnum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소칼이 인용한 대목에서 들뢰즈가 the power of continuous를 사용하며 궁극적으로 하고 싶어한 말은 "개체들은 자신의 경계를 지정함으로써 연속성(즉, 경험의 흐름) 속에서 생성된다." individuals are generated in the continuous [i.e. the flow of experiecne] by specification of their borders.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부터 칸트의 형이상학에서 중심이 됐던)연속성의 개념은 [수학적] 극한 개념에서 현실화된다." the concept of the continuous [Central to metaphysics from Aristotele to Kant] is actualized in the concept of the [mathematical] limit.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마이클 해리스는 구태여 Salanskis처럼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소칼을 비판할 수 있다 보는데 - 정확히는 지성사 학자로서 소칼과 브리크몽의 자격을 박탈 시키기 충분하다고 말한다 enough to disqualify Sokal and Bricmont as intellectual historians - 소칼의 인용문에서 용납할 수 없는 누락 inexcusable ommission이 존재하기 있기 때문이다.

(누락된 부분)가령 서로 다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칸트도, 심지어 라이프니츠조차 여기서 단념하고 말핬다. 그러나 미분의 철학을 계승하는 비전적인 역사에서는 세 이름이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살로몬 마이몬, 외네 브롱스키, 보르다스드물랭이 그들이다. 마이몬은 미분법을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후기 칸트주의에 근거를 마련해준다(1790), 심오한 수학자 브롱스키는 실증주의적인 동시에 메시아주의적이자 신비주의적인 체계를 수립하는데, 이 체계는 칸트적인 미분법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1814). 보르다스드물랭은 데카르트에 대해 반성하다가 플라톤주의의 관점에서 미분법을 해석하게 된다(1843). 이들은 미분법의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라이프니츠, 어떤 칸트, 어떤 플라톤에 해당한다.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풍요로운 철학적 함축을 근대적인 과학 기법의 이름으로 사장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차이와 반복, 379)

마이클 해리스는 이 부분을 미적분학의 후속 발전과 별개로 이 텍스트들-마이몬, 브롱스키, 보르다스드물랭- 이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들이 흥미롭다는 것(이라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만약 이런 이해가 옳다면 "왜 극한에 기초한 현대 미적분학의 엄밀한 설명을 들뢰즈가 무시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소칼과 브리크몽의 주장이야 말로 무의미하다고 본다. 해리스는 더군다나 소칼이 인용하지 않은 부분에서 들뢰즈는 극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걸 지적하는데, 소칼은 여기에 대해 언급을 하진 않고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극한의 개념은 사실 운동학적 성격을 상실했고, 오로지 어떤 정태적 고찰들만을 담고 있다. 변이 가능성을 재현하는 것은 더 이상 한 구간의 모든 값들을 거쳐 가는 어떤 점진적 이행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다만 이 구간 안의 한 값이 지닌 이접적 가정(假定) 사항만을 의미한다. 도함수와 적분은 양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서수적( 序數的) 개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분 혹은 미분량은 오로지 어떤 크기만을 지칭하고, 이 크기는 어떤 지정된 수보다 더 작은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위해 미규정 상태로 남겨진다. 바로 이런 발견들과 더불어 미분법을 발생론적이거나 동역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포부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 구조주의가 태어났다.

(사실 이런 '용납할 수 없는 누락'은 라캉에게서도 발견된다. 소칼은 라캉이 발기 기관을 허근과 동치시키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라캉은 해당 텍스트에서 자신의 분석이 실제 수학에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비난을 받게 될 각오를 하고 나는 수학적 알고리듬을 내 방식대로 사용하며 내가 이를 얼마나 변형시켰는가를 보여주었다. 일례로 복소수 이론에서 i로도 혹은 (루트)-1이라는 상징을 내가 사용하는 방식은 명백히 내가 이후의 연산들에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포기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E 821, 에크리 읽기, 242에서 재인용. 브루스 핑크에 따르면 여기서 '자동적'으로는 '수학자들의 방식대로'를 의미한다.)

Salanskis의 비판이 지적 사기가 출판되기 전인 1997년에도 이미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칼과 브리크몽은 '자신들의 비판에 대한 제대로 된 응답이 프랑스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불평을 토로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 해리스는 아마 이 불평이 '자신들이 보기에 설득력 있는 응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고 추측한다. -

Sokal and Bricmont have not ceased to complain that
"In all the reviews, debates and private correspondence that have followed the publication of our book in France, no one has given even the slightest argument explaining how that relevance [of the scientific terminology to the subject supposedly under investigation] could be established." [FN, p. 13]
Taken literally, this claim is simply false. Several articles in IS take pains to defend some of the cited quotations from Lacan, Latour, and Deleuze, in particular.22 At least two of these articles — physicist David Mermin's attempt at a generous interpretation of Latour and the first version of Jean-Michel Salanskis' discussion of Lacan and Deleuze — were published in 1997, well before the appearance of FN, which even contains a brief response to Mermin’s arguments (pp. 131-133). What Sokal and Bricmont mean, presumably, is that no one has ever given an argument they find convincing. Rather than try to refute such circular reasoning, I will concentrate on Salanskis' alternative reading of what at first sight is a bizarre and obsessive rehash of basic differential calculus in Deleuze's "Difference et Repetition," and leave it to the reader to decide who is guilty of imposture.2

시간이 지나 출판된 지적 사기 2판 서문에서 소칼과 브리크몽은 Salanskis를 비롯한 몇몇 반론에 대해 '자신들의 지적을 최소한 올바르게 다루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해당 내용들이 자신들을 설득하기엔 불충분하며, (그 연유에 대해선 일일히 설명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반박들이 부족한 것 dearth of pertinet critiques 자신들의 글의 유효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One finds, in the first category, an article by the American physicist N. David Mermin defending some of Latour’s ideas on the theory of relativity, as well as a few commentaries by psychoanalysts and mathematicians on Lacan’s and Deleuze’s use of mathematics. Let us emphasize that these objections, while in our view mostly erroneous, are atleast relevant in the sense that they try to address our arguments. But,concerning the ‘impostures’ part of the book, there is (thus far) nothingelse. The dearth of pertinent critiques amid the fury provoked by ourbook provides indirect confirmation of the validity of our theses: for if we were wrong, it would be easy to refute us by showing that the mathematics or physics invoked in the texts that we quote do indeed playsome useful intellectual role. (Intellectual Impostures, 15-16)

하지만 소칼이 각주에서 언급한 반박들만 해도 최소 여섯 글 정도 되는 데((Mermin(1997b), On Lacan, Roudinesco (1998), Darmon and Melman (1998), Charraud(1998), Sauval (1997-1998), On Deleuze Salanskis (1998)) 이 정도만 해도 지적 사기보다는 많은 글 아닌가?

철학자 Val dusek 역시 소칼이 누락시킨 부분을 두고 해리스와 비슷한 지적을 한다. Dusek의 지적 사기 리뷰 하지만 Dusek의 리뷰에 대한 응답에서 소칼과 브리크몽은 자신들은 미적분에 대한 그런 시도 (앞서말한 마이몽, 브론스키 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들뢰즈는 코시 이전의 전통적인 시도들에 대해 불명료한 성찰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 반박한다.dusek에 대한 sokal의 응답은 여기 실려있다 (반복하자면, 소칼은 들뢰즈가 '코시에 의해 이미 해결된 문제'를 두고 신비화 하고 있다 비난했다)

해당 내용들이 수학, 과학을 신비화 하려는 게 아니라 (소칼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칼이 이해못하고 있는)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여러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소칼과 브리크몽은 해당 내용이 (자신들에게)불명료하기 때문에 - 여전히 들뢰즈가 뭐라 하는지 이해하지 않아도 - 자신들이 옳다는 견지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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