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를 증오하지 않기에 관해 (마사 누스바움)

On Not Hating the Body (Martha C. Nussbaum)

신체를 증오하지 않기에 관해 (마사 C. 누스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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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에 대한 혐오감은 신체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디폴트 태도이다. 사람들에 따라 정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늘 가꿔진 표면적 신체성은 전경화되고 늘 뜻대로 되지 않는 정도가 큰, 그래서 죽음을 더 상기시키는, (가장) 자연적(인) 객체성으로서의 해부학적 및 생리적 신체성은 어느 정도는 회피되고 망각되고 부정된다(이를테면, 누스바움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장내시경 검사를 싫어한다). 이 회피와 망각과 부정의 귀결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두 부분 사이의, 그리고 우리와 동물을 포함한 타자들 사이의, 더 신체적인 존재/수준과 더 정신적인 존재/수준의 위계적 이분법이고 전자는 억압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난히 잘 가꿔진 표면적 신체성에 대한 어릴 때부터의 내 거부감조차 그 혐오감의 발로였다(나는 지금도 굴곡과 근육이 유난히 잘 발달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감정이나 가까이하고 싶은 욕심보다는 이질감을 더 느낀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혐오감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누스바움은 인간이 자신의 필멸적 신체성을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그래서 자신의 그 신체성을 더 세심하게, 더 흥미를 가지고 직시하고 응시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누스바움의 이 길지 않은 글을 처음 접하고 끝까지 읽힐만 한 수준으로 번역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는데, 가장 큰 이유는 <율리시스>로부터의 인용문들이었다. 도저히 정확하고 생생하게 번역할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초벌 번역만 해두고 <율리시스>의 새 국역본이 출간되기를 1년 반 이상 기다렸다. 출간되자마자 구입하고는 책이 손에 잡힐 때까지 또 1년을 보냈다. 지난 이틀 동안 초벌 번역을 가다듬고 <율리시스>로부터의 인용문들을 찾아 베꼈다. 찾으면서 <율리시스>를 처음으로 몇십쪽이나마 읽었는데, 놀라웠다. 선입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시시껍절하고 지루한 의식의 흐름같은 것은 없었다. 기본적인 인간적 현실과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노골적이고 맛깔나고 기발하고 풍요롭고 위안을 주고 유머러스한 사색들과 묘사들이 가득했다. 특히 등장인물 중 하나이자 누스바움이 신체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모범적인 인물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리어폴드 블룸이 매력 덩어리였다. 진작에, 젊었을 때부터 읽고 읽고 또 읽었어야 마땅한 소설이었다. 누스바움 덕분에 이제라도 읽게되었으니 누스바움이 너무도 고맙다. 물론 술술 읽히게 번역해준 번역자도 고맙다.

'body'를 '신체'로 옮길까 '육체'로 옮길까 고민했다. '육체의 부활'이란 표현이 정착되어 있는데, 거기서 '육체'에 해당하는 원어가 'body'였다. 그 외 'physical'도 뭘로 옮길지 고민했다. 결국 전자는 '신체'로 후자는 ('신체적'이나 '육체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옮겼다. 후자는 원어 단어가 다르면 한국어 단어도 달라야 한다는 내 번역 원칙을 적용한 것인데, 전자는? '육체'가 아니라 '신체'로 옮긴 것은 내게 아직 신체에 대한 혐오감이 남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 글의 번역 수준은 출판에 적합한 수준이 아니다. 분명히 오역이 있고 어색한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무슨 얘기인지 알아 읽을 수 있는 수준은 되고 무엇보다도 원문이 병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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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감은 학습된다 배변 훈련을 할 때까지 유아에게는 혐오감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도처에: 있으며 어느 정도 진화적 유용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혐오감의 첫 번째 수준이며 내가 일차 대상 혐오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데요. 미사 누스바움이나 다른 정신분석학자분들의 책을 보통 읽어보면, 유아는 배변 훈련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대변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지 않으며, 이러한 혐오감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이라고 많이들 이야기 하십니다.

그런데 이와는 또 다르게, 신경과학자나 다른 좀 더 엄격한 생물학 계열의 보다 ‘딱딱한’ 심리과학자들은 유아기부터 이미 대변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며, 이러한 반응이 유전적으로 이미 존재해서 전달되는 거라고 주장하시면서 맹수에 대한 공포나 고소공포증처럼 인간 심리의 유전적인 사례라고 많이 주장하시더군요.

도대체 어느 쪽 주장이 더 타당한 걸까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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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열등적으로 보거나 대변을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는 그리스 철학 이후 아닐까요? 저는 진화적으로 인식을 살피는 편인데 신체가 건강하면 노동력이 좋고 배우자로서 적격이지요. 따라서 정신활동이 적었던 원시시대에는 신체를 부정적으로 보기 어렵지요.
대변도 비슷할 겁니다.
인류는 발자국이나 대변을 보고 사냥감을 쫓았으니 대변은 만지고 냄새 맡는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의 대변은 거름이 되므로 모았습니다. 대변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시기는 도시화되면서 아닐까요.

네 그러니까, 그쪽 분야 연구하시는 분들, 대표적으로 스티븐 핑커나 데이비드 버스 같은 분들이 대변 혐오가 신생아 때부터 있는 인간의 유전적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분들은 과학자지 전문 철학자는 아니라서, 설명을 듣다 보면 그 설명이 자연주의적 오류나 사실-가치(존재-당위) 구분 문제에 비추어볼 때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지, 그 주장들이 과연 철학적으로도 온전히 타당한가에 대해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설명들을 듣다 보면 자연현상에 문화적 가치 판단이 투사되어 착시가 일어나는 건 아닌지, 실제로 자연물이 그런 속성을 갖고 있는지 또는 자연 자체가 정말 그런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고 확신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변 혐오에 대해서도, 말하는 사람마다 견해가 달라서, 혼란스럽고 뭐가 타당한 주장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과학적 설명에서 사실–가치 구분 문제 자체가 워낙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솔직히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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