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현대철학에서 이해 가능한 형태로 독해하고자 할 경우 어떠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견해들이 갈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철학에 헤겔의 사유를 도입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인물들 중에서도, 테일러나 호네트는 『정신현상학』을 주로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경향이 있고, 맥도웰과 브랜덤은 『정신현상학』을 주로 지각철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각각의 견해가 반드시 서로 경쟁하거나 서로 상충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현상학』을 후설과 하이데거를 통해 성립한 현상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입장이야말로 수많은 해석들을 포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탁월하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헤겔의 경험 개념」이라는 논문에서 『정신현상학』의 서론을 각각의 단락마다 꼼꼼하게 해설하면서,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20세기 이후의 ‘현상학’이 서로 유사한 문제의식을 지닌 기획이라는 견해를 직접 주장하기도 한다. 본고는 『정신현상학』의 서론을 중심으로 헤겔의 변증법이 지닌 문제의식을 요약하고(Ⅰ), 「헤겔의 경험 개념」을 중심으로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해석을 소개하고(Ⅱ), 그 해석이 현대철학에서 이루어지는 헤겔에 대한 논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Ⅲ).
Ⅰ. 정신현상학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론에서 자신의 책을 관통하는 학문적 서술의 ‘방법’ 혹은 ‘원리’에 대해 개략적으로 해명한다. 그는 ‘이성의 한계’에 제약되어 있는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사태 자체(Sache selbst)’ 혹은 ‘진리(Wahrheit)’를 인식할 수 있는지를 화두로 삼아 『정신현상학』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논의들이 따르게 될 서술의 구조를 제시한다. 즉, 18세기 후반 이후로 철학자들은 우리가 특정한 인식의 조건을 바탕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강조한 것처럼, 우리가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의 형식에 따라서만 대상을 경험할 수 있고, ‘범주’라는 지성의 개념에 따라서만 판단을 수행할 수 있다면, 감성의 형식과 지성의 개념을 벗어나서 ‘사물 자체(Ding an sich)’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는 우리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대상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인식의 조건에 따라 변형되어 있을 뿐, 결코 왜곡되지 않은 실재의 모습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로부터 『정신현상학』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고민들이 제시된다. 우리는 과연 ‘사물 자체’에 대한 진리를 아무것도 알 수 없는가? 어쩌면 우리가 ‘사물 자체’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단언이야말로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독단주의나 회의주의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사물 자체’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학문적 서술의 ‘방법’ 혹은 ‘원리’가 요구되는가?
인식의 조건을 단순히 대상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Werkzeug)’나 ‘매체(Medium)’라고 보는 관점은 사물 자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가령, (a) 인식의 조건을 ‘도구’로 사용하여 대상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 상태에서, ‘도구’에 의해 변형된 부분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사물 자체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지식 자체가 인식의 조건을 통해 형성되는 이상, 대상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인식의 조건에 영향을 받은 부분을 제외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변형된 사물에서 도구가 가한 것을 다시 제거하면, 우리에게 그 사물(여기서는 절대적인 것)은 이런 불필요한 수고를 들이기 이전 바로 그만큼의 상태로 있게 된다.”(Hegel, 1807[2022]: 75) 마찬가지로, (b) 인식의 조건을 ‘매체’로 사용하여 대상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 상태에서, ‘매체’에 의해 굴절된 부분만을 교정하는 방식으로 사물 자체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 인식의 조건을 통하지 않고서는 대상에 대한 지식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상, 대상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인식의 조건에 의해 주어진 부분을 제외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 인식은 빛의 굴절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접하도록 해주는 빛 자체이며, 이런 인식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에게는 단지 순수한 방향이나 공허한 위치의 표시만이 남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Hegel, 1807[2022]: 75)
그러나 우리가 사물 자체에 대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애초에 인식에 대한 특정한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성립한다. 사물 자체에 대한 진리가 인식의 조건을 벗어나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현상(Erscheinung)’ 혹은 ‘경험(Erfahrung)’은 진리가 아닌 것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 진리가 반드시 인식의 조건 외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단언한 상태에서는, 인식의 조건 내부에서 발견되는 모든 지식이 오류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겨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런 걱정은 인식이 도구나 매체라는 표상 그리고 또한 이런 인식과 우리 자신의 구별을 전제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한쪽에 서 있고 인식은 다른 한쪽에 홀로 절대적인 것과 분리된 채로 있으면서도 어떤 실재적인 것으로 서 있다고 […] 전제한다.”(Hegel, 1807[2022]: 76) 문제는 인식에 대한 이러한 전제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진리를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에 두고자 하는 입장은 ‘오류에 대한 공포’ 혹은 ‘진리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만, 정작 그 공포가 자신이 받아들이는 특정한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고 있다. 사물 자체를 인식의 조건 바깥에 상정하는 입장은 사물 자체에 대한 진리를 획득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상태에서 자신이 그 진리를 획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고 있을 뿐이다.
헤겔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변증법(Dialektik)’이라고 일컬어지는 인식의 모델을 제시하여 사물 자체의 문제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걱정을 해소하고자 한다. 진리가 인식의 조건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의식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면, 우리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변증법에서 강조되는 핵심이다. 가령, 우리가 원뿔을 파악하는 과정을 떠올려 보자. (a) 처음에 우리는 원뿔을 단순히 삼각형 사물로 인식한다. 여기서 “원뿔은 삼각형이다.”라는 ‘지’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원뿔에 대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b) 곧이어 우리는 삼각형이 원뿔을 옆에서 바라보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형태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제 “원뿔은 삼각형이다.”라는 ‘지’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원뿔에 대응된다기보다는, 우리에 대해 존재하는 원뿔에 대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c) 우리는 원뿔을 단순한 삼각형 사물이 아니라 원형 사물로도 인식한다. “원뿔은 삼각형이다.”라는 우리의 ‘지’는 결국 “원뿔은 원형이기도 하다.”라는 새로운 ‘진리’를 통해 극복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원뿔에 대한 인식은 그 이후로도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원뿔에 대한 우리의 ‘지’가 원뿔에 대한 새로운 ‘진리’의 출현을 통해 상대화되는 방식으로 극복되는 과정이 바로 원뿔에 대한 ‘의식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원뿔에 대한 ‘진리’란, 인식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종착점 따위가 아니라, 인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시발점으로서, 원뿔에 대한 의식의 경험을 매 순간 추동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의식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을 더욱 일반화하여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의식이 자기 자신에서, 즉 자신의 지에서도 그리고 또 자신의 대상에서도 수행하는 이런 변증법적 운동이야말로 그로부터 의식에게 새로운 참된 대상이 솟아 나오는 한에서 실로 경험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방금 언급한 진행 중에서 앞으로 전개될 서술이 지닌 학문적인 측면에 새로운 빛을 밝혀줄 한 가지 계기를 좀 더 상세하게 부각시켜야겠다. 의식이 어떤 것을 안다. 이 대상이 본질 또는 즉자이다. 그러나 그 대상은 또한 의식에 대해 즉자이다. 이로써 이 참된 것이 지닌 양의성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의식이 두 개의 대상, 즉 첫 번째의 즉자라는 대상 하나와 의식에 대한 이 즉자의 존재(이 즉자가 의식에 대해 있음)라는 두 번째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 이때 (의식이 첫 번째 대상을 인지함으로써) 첫 번째 대상이 스스로 변한다. 그것은 즉자이기를 멈추고 오직 의식에 대해 즉자인 그런 것이 된다. 이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된다. 즉 그것은 의식에 대한 이 즉자의 존재, 즉 참된 거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본질 또는 의식의 대상이다. 이 새로운 대상은 첫 번째 대상의 헛됨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두 번째 대상이 바로 첫 번째 대상에 대해서 (의식이) 겪은 경험이다. (Hegel, 1807[2022]: 86-87)
‘의식의 경험의 학문’으로서 ‘정신현상학’이란 의식이 끊임없이 진리의 출현을 목격하는 과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지’가 어떻게 우리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지’로 변환되는지, 그리고 그 ‘지’가 어떻게 새로운 ‘진리’의 출현을 통해 극복되는지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정신현상학에서 이루어진다. 즉, 정신현상학은 고정된 명제나 이론 속에 가두어질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물 자체가 인식의 조건 바깥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술 따위란 정신현상학이 탐구하고자 하는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진리’란 의식의 경험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운동(Bewegung)’ 혹은 ‘생성(Werden)’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가 무너지면서 그 대상이 지닌 새로운 측면이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정신현상학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의 출현이다. 이러한 사건은 의식의 경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매 순간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전의 ‘지’가 새로운 ‘진리’를 통해 상대화되는 방식으로 극복되면, 그 새로운 ‘진리’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지’를 구성하게 된다. 그 새로운 ‘지’ 역시 또 다른 새로운 ‘진리’를 통해 상대화되는 방식으로 극복되면, 그 또 다른 새로운 ‘진리’가 대상에 대한 우리의 또 다른 새로운 ‘지’를 다시 구성하게 된다. ‘지’가 ‘진리’에 의해 극복되고, 그 ‘진리’가 새로운 ‘지’를 다시 구성하고, 그 새로운 ‘지’가 또 다시 새로운 ‘진리’에 의해 극복되는 과정에서 대상은 의식의 경험 속에 점점 더 다양한 모습으로 주어진다. 진리의 출현을 통해 매 순간 풍요로워지는 의식의 경험을 기술하는 작업이 바로 정신현상학인 것이다.
Ⅱ. 현상학
20세기 초중반의 대륙철학을 지배한 ‘현상학 운동’은 근대 학문의 실증주의적 경향에 반발하여 등장하였다. 수리물리학이 제시하는 틀에 따라 검증될 수 있는 대상만을 실재적인 것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근대 학문의 선입견을 비판하면서, 아무런 선입견으로도 재단되지 않은 ‘사태 자체’를 강조하고자 하는 시도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이루어졌다. 가령, 근대 학문이 ‘참나무’라는 대상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과 현상학이 ‘참나무’라는 대상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을 서로 비교해 보자. 근대 학문에서 참나무에 대한 진리란 수리물리학에 근거하여 규정된다. “참나무는 1년 동안 0.9m씩 성장한다.”와 “참나무는 해마다 2,200개의 도토리를 생산한다.”와 같이 정량적 수치를 통해 표현될 수 있는 명제만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닌 진리로서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상학에서 참나무에 대한 진리란 결코 수리물리학에 국한될 수 없다고 강조된다. 동일한 참나무라고 하더라도, 예술가의 시선에서는 (“참나무는 아름다운 삼각형 구도를 지니고 있다.”와 같이) 예술적 대상으로 기술될 수 있고, 윤리학자의 시선에는 (“참나무는 생태계의 소중한 일원으로서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와 같이) 윤리적 대상으로 기술될 수도 있으며, 종교인의 시선에는 (“참나무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와 같이) 종교적 대상으로 기술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서 참나무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참나무가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게 다양하다. 정량적 수치로 표현될 수 있는 명제만을 진리로 한정하고자 하는 것은 참나무가 우리에게 얼마나 다양하게 현상할 수 있는지를 망각하고 있는 태도라고 비판받는다.
하이데거는 근대 학문의 실증주의적 경향이 세계를 ‘상(Bild)’ 혹은 ‘표상(Vorstellung)’이라는 형식 속에 가두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그는 세계를 고정된 이미지로 파악하여 인간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정초하고자 하는 기획이 극단을 향해 점차 나아가는 과정에서 근대 학문이 형성되었다고 해석한다. 즉,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근대의 근본과정은 세계를 상으로 정복하는 과정이다.”(Heidegger, 1938[2020]: 142) 모든 것을 변하지 않는 ‘상’으로 뒤바꾸어 객관성과 보편성을 영원히 보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근대 학문을 성립시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리물리학 역시 세계를 ‘상’으로 만들기 위한 최적의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근대 학문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각광받았다. 문제는 ‘사태 자체’ 혹은 ‘현상’이 결코 단일한 틀만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근대 학문이 추구한 기획에서 철저하게 무시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수리물리학은 대상을 ‘정량화’ 혹은 ‘수치화’하려는 태도에서 바라볼 경우 주어질 수 있는 ‘하나의’ 진리일 뿐인데도, 근대 학문에서 그 진리는 대상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진리를 포괄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해되었다. 수리물리학으로 규정될 수 있는 진리만이 진정한 ‘진리’로 추앙되었고, 수리물리학으로 규정될 수 없는 진리는 단순히 ‘거짓’ 혹은 ‘무의미’로 무시되었다. 수리물리학이 보여주는 ‘상’만이 우리의 눈앞에 서 있는 세계를 올바르게 그려내는 유일한 표상이라고 단언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학문의 이러한 경향에도 『정신현상학』의 서론에서 헤겔은 세계를 ‘표상’ 속에 가두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헤겔의 경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자연스러운 의식(natürliche Bewußtsein)’ 혹은 ‘자연스러운 지(natürliche Wissen)’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어떠한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그의 경험 개념은 사태 자체를 ‘존재자(Seiendes)’라는 정적인 표상의 형식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의식이 사태 자체를 ‘존재(Sein)’라는 역동적인 운동의 형식으로 사유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자연스러운 의식은 자신에 의해 표상된 것과 자신의 표상작용을 직접적으로 존재자로서 표상하는데, 그때에는 이미 자신이 표상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표상한다.”(Heidegger, 1942/1943[2020]: 255, 번역 수정) 자연스러운 의식이란 매 순간 이루어지는 진리의 출현을 통해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하는 과정일 뿐, 결코 사태 자체가 존재하는 방식을 올바르게 그려내는 유일한 표상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변증법’이라는 인식의 모델에서 강조되는 요점이다. 정적인 ‘존재자’와 역동적인 ‘존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유가 헤겔의 경험 개념에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헤겔의 경험 개념이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자의 존재’ 혹은 ‘현상하는 것의 현상함’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경험은 존재자의 존재이다. 그런데 존재자는 의식의 성격에서 현상하고, 재현에서 현상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경험의 본질에 서술이 속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서술이 전환에 근거하고 있다면, 또한 우리의 부가행위로서의 전환이 절대자의 절대성에 대한 우리의 본질관계의 수행이라면, 그때 우리의 본질 자체는 절대자의 임재에 속한다. 전환은 절대성으로의 회의이다. 그것은 모든 현상하는 것을 현상하는 것의 현상함에서 전환시킨다. 전환은 처음부터 현상함을 예견하면서 기대하고 있기에, 이러한 전환은 모든 현상하는 것 자체를 능가하고, 또 이러한 것을 포괄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현상함이 스스로 현상하는 그런 장소의 범위를 열어놓고 있다. […] 경험은 자기 앞으로 나아가고, 이렇게 자기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고, 또한 이러한 되돌아옴에서 스스로를 의식의 현존 속으로 전개하고, 이러한 현존으로서 지속하게 됨으로써, 경험은 진행된다. (Heidegger, 1942/1943[2020]: 259-260)
따라서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모두 세계를 ‘표상’이라는 정적인 형식 속에 가두고자 하는 시도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그 두 입장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의식과 ‘우리에 대해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의식 사이의 차이를 통해, 혹은 ‘존재자’에 대한 표상과 ‘존재’에 대한 사유 사이의 차이를 통해, 대상에 대한 경험의 본질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역동적 운동에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경험의 본질은 현상학의 본질이다. 파이네스타이(φαίνεσϑαι:)는, 즉 “정신”이라고 불리는 절대적 주체의 자기 현상함은 존재자적 의식과 존재론적 의식 사이의 대화의 방식에서 스스로를 모아들인다. 현상학에서의 “-학”(logie)은,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의 경험이 의식의 존재로 존재하는 그런 운동을 성격 짓는 양의적 디아레게스타이(διαλέγεοθαι)라는 의미에서 레게스타이(λέγεσθαι)이다.”(Heidegger, 1942/1943[2020]: 270-271) 즉, ‘사태 자체’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도가 정신현상학과 현상학을 모두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인식을 ‘도구’나 ‘매체’라고 보는 관점을 극복하고서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리의 출현을 ‘사태 자체’로 기술하고자 하는 것처럼,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도 인식을 ‘표상’이라고 보는 관점을 극복하고서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존재자의 존재를 ‘사태 자체’로 기술하고자 한다. 경험에 대한 잘못된 전제를 넘어서 ‘사태 자체’를 주목하도록 하는 사유야말로 ‘현상학’의 본질인 것이다.
Ⅲ. 정신현상학과 현상학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현대철학에서 이해 가능한 형태로 독해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종종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는 주제 중 하나는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헤겔이 제시하는 인식의 모델을 집약하는 중심적 사유이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몇몇 해석은 변증법이 어떠한 방식으로 수행되는지에 대해 얼핏 명쾌하게 보이는 도식적인 구조를 제시하기도 한다. 변증법이 ‘정(正, These)’, ‘반(反, Antithese)’, ‘합(合, Synthese)’이라는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이나, 변증법이 ‘즉자존재(卽自存在, An-sich-Sein)’와 ‘대타존재(對他存在, Für-ein-anderes-Sein)’라는 두 가지 측면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은 『정신현상학』에 대한 ‘교양’ 수준의 해석에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헤겔이 과연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도식적 구조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지는 주석적인 관점에서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또한 변증법이 제시하는 도식적 구조가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인위적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철학적인 관점에서 매우 의심스럽다. 주석적 관점에서든지 철학적 관점에서든지, 변증법이 무엇인지는 『정신현상학』을 유의미한 방식으로 독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면서도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로 드러나고 만다.
헤겔의 경험 개념을 ‘현상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현상학』에 대한 해석에서 중요하게 고려해 볼만한 길을 제시한다. 하이데거는 변증법이 단순히 헤겔이 자의적으로 구성한 인식의 모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왜곡 없는 시선으로 사태 자체가 주어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발견하게 되는 ‘경험의 본질(Wesen der Erfahrung)’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해명하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의 입장에 따르면, “헤겔은 경험을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변증법적인 것을 경험의 본질로부터 사유한다.”(Heidegger, 1942/1943[2020]: 251) 의식의 경험을 특정한 ‘체계’나 ‘논리’로 환원하고자 하는 작업은 헤겔이 변증법을 통해 수행하고자 하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사물 자체에 대한 진리가 인식의 조건 외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벗어날 경우, 우리는 진리의 출현이 매 순간 의식의 경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헤겔이 변증법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특별히, 하이데거의 해석은 『정신현상학』의 서론을 각각의 단락마다 세심하게 해설한 결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주석적인 관점에서 꽤나 신뢰할 만하다. 또한 그의 해석은 사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19세기의 ‘정신현상학’을 실증주의와 표상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20세기의 ‘현상학’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철학적 관점에서도 헤겔의 사유를 유의미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제자이면서도 독일헤겔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가다머는 헤겔의 경험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근본적으로 올바르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헤겔이 경험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변증법이 무엇인가를 경험의 본질에 비추어서 사유한다고 지적했는데, 내 생각에는 하이데거의 지적이 옳다. 헤겔에 따르면 경험은 의식의 변증법적 변환의 구조를 보여주며 그러므로 변증법적 운동이다. 물론 헤겔은 우리가 일반적으로―대상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해 애초에 파악했던 개념이 틀렸다는 것을 다른 어떤 대상을 통해 경험했다’는 의미로―경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경험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헤겔이 말하는 경험도 다른 차원의 경험은 아니다. 실제로 철학적 의식은 경험하는 의식이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면서 본래 수행하는 바로 그것, 즉 경험의 과정 속에 있는 의식이 이전의 경험을 부단히 뒤집으면서 나아가는 과정을 꿰뚫어본다. 따라서 헤겔은 경험 자체의 참된 본질이 스스로를 역전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Gadamer, 1960[2012]: 262-263, 인용자 강조)
헤겔의 경험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정신현상학』의 서론을 집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신현상학』의 서론은 헤겔이 이후에 의식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제시하게 될 다른 모든 단계들을 논의하기 위한 ‘상술의 방법(Methode der Ausführung)’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정신현상학』의 서론에 『정신현상학』의 모든 장이 이미 들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정신현상학』의 모든 장이 『정신현상학』의 서론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테일러나 호네트가 『정신현상학』을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독해하기 위해 주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등장하는 제4장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비교해 본다면, 혹은 맥도웰이나 브랜덤이 『정신현상학』을 지각철학의 관점에서 독해하기 위해 주로 ‘감각적 확신’이 등장하는 제1장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비교해 본다면, 『정신현상학』의 서론을 집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해석은 다른 해석들에 비해 훨씬 더 근본적인 지점을 건드린다. 『정신현상학』에 대한 다른 현대적 해석들은 그 책의 특정한 부분에서 몇 가지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대개 만족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하이데거의 해석은 그 책의 전체적 기획에서 오늘날의 철학을 갱신시킬 수 있는 사유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정신현상학』을 단순히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독해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유기적 체계의 관점에서 독해하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른 해석들보다도 하이데거의 해석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경험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바탕으로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에 대한 일종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해석이 드러내는 것처럼, 사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현상학’의 기획과 실증주의와 표상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기획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감각적 확신으로부터 절대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주제에 대한 일종의 현상학적 ‘본질직관(Wesensanschauung)’을 기술하고 있는 저서로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가령, ‘감각적 확신’을 주제로 다루는 제1장은 순수한 감각에 대한 모든 종류의 자유연상이 ‘지금’, ‘여기’, ‘이것’이라는 본질을 맴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주제로 다루는 제4장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자유연상이 ‘상호적 승인’이라는 본질을 맴돌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정신현상학』이 과연 이러한 가설에 따라 실제로 독해될 수 있는지는 그 가설에 근거한 치밀하고 방대한 주석적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입증되지 않는다. 다만, 헤겔의 경험 개념을 ‘현상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하이데거의 해석이 『정신현상학』의 서론뿐만 아니라 『정신현상학』의 모든 장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헤겔의 경험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주석적 관점에서나 철학적 관점에서나 매우 주목할 만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제시된 변증법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 ‘현상학’에서 제시된 경험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a) 그는 얼핏 인위적이거나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변증법’이라는 인식의 모델이 실제로는 잘못된 전제 없이 파악된 경험의 본질을 올바르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의 해석은 (b) 『정신현상학』의 서론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단락에 대한 꼼꼼한 해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할만 할 뿐만 아니라, (c) 헤겔의 경험 개념을 실증주의와 표상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철학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부활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또한 그의 해석은 (d) 『정신현상학』에 대한 현대철학의 다른 해석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그 책의 핵심적 문제의식에 훨씬 가까울 뿐만 아니라, (e) 그 책을 유기적 체계로 독해하고자 하는 작업에도 더욱 유용하다. 더 나아가, (f) 그의 해석은 『정신현상학』의 모든 장들을 현상학적 ‘본질직관’의 맥락에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제시해 준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헤겔의 경험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정신현상학』에 대한 현대철학의 수많은 해석들 중에서도 특별히 탁월하다고 강조할 수 있다. 『정신현상학』으로부터 현대철학을 위한 새로운 사유를 발굴해 내고자 노력하는 모든 연구자들에게 하이데거의 해석은 끊임없이 신선한 통찰을 줄 수 있을 만한 영감의 원천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Gadamer, H. G. (1960) 『진리와 방법』, 제2권, 임홍배 옮김, 문학동네, 2012.
Hegel, G. W. F. (1807) 『정신현상학』, 제1권, 김준수 옮김, 아카넷, 2022.
Heidegger, M. (1938) 「세계상의 시대」, 『숲길』, 제2판, 신상희 옮김, 나남, 2020.
Heidegger, M. (1942/1943) 「헤겔의 경험 개념」, 『숲길』, 제2판, 신상희 옮김, 나남, 2020.
- 이 글은 2025년 7월 11-12일에 조지아 주립대학교 석사 과정생 유시원 선생님을 중심으로 개최된 <헤겔 Work in Progress Conference>에서 발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