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자의 해괴한 질문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는지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고,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아 여기 글 올려봅니다.

  1. 최대한 우리와 비슷한 사고과정을 지닌 대신,
    “~(이)란 ~(이)다”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란 ~(이)다“를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혹은, 그런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논리적 모순인가요?

  2.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문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와 “없다”의 의미가 미세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유니콘은 전자의 속성만 지니고, 후자의 속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 둘이 뭐가 다른 건가요? 또, 후자의 경우 해당 속성을 지닌 대상들의 집합을 만들어보면 공집합이 되는데, 아무도 그 속성을 지니지 않는데 속성이라고 보거나, 그 속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게 맞는건가요? “없다”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속성에 포함되는 것은 맞나요?

  3. 철학의 개념, 논리적 연산부호(->, = 등)를 수학적 해석학에서처럼 어떤 반대도 없는 보편적이고 확고한 체제로 세우고 싶어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때문에 읽는 시간도 늘어지고, 영양가 없는 비판만 하게 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미리 답변 감사드립니다!

저도 학부생인지라 짧은 식견이지만 대답해보겠습니다!

  1. 그런 사람들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개념을 가르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파악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2. 존재의 의미가 여러가지로 파악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말씀해주신 두 의미 차이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 같지는 않고, ‘유니콘이 없다’라는 문장은 유니콘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음과 개념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음을 모두 지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이농은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존재자와 현실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구분했습니다. 분명히 둘은 다르며, 현대에는 양상 논리 등을 통해 논리적 가능성과 현실적 존재성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물이 ‘없다’라는 속성을 가짐과 어떤 속성을 가진 대상이 없다는 것을 구분하실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말씀해주신 경우는 후자이고, 전혀 논리적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해주신 ‘‘없다’가 속성인가? ’라는 문제는 꽤 중요한 문제고, 현대에는 ‘x가 없다’는 속성인 Px꼴이 아니라 존재 양화사에 대한 부정문으로 분석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이야기합니다.

  1. 제생각에는 수리논리학을 배워보심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적어도 분석철학에 해당하는 내용은 말씀하신 부분이 아주 어려운 작업은 아닙니다. 집합론과 논리학에 대해서 기본적인 부분을 갖고 접근하시면 해당 접근법으로도 유용하게 접근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보다 통섭적이고 포괄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싶으신 거라면, 일단 전반적인 얼개를 먼저 파악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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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술구조 대신 통 문장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능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중요한 논리 규칙들—가령, ‘Fa’로부터 ‘∃xFx’로의 추론—을 논리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리라는 점에서 그들의 언어가 우리의 언어와 동등한지는 의문시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논리적 외계인(logical aliens)의 문제와 관련될… 수도?
  2. 통설에 따르면 주어진 문장에서 ‘없다’는 술어가 아닌 양화사이므로, 없음이 속성인지의 문제는 (술어 외의 표현도 속성을 표현한다는 강한 관점이 부가되지 않는 한) 발생하지 않습니다. (덧—참고로 말씀하신 문장의 형식화: ¬∃x(∃y(x=y)∧¬∃y(x=y))는 일차 논리의 정리입니다.)
  3.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형식 논리학의 기호를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건전한 습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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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드립니다!
진짜 철학과 학생분들께서 전공 살려서 설명해주실 때 정말 멋있으신 것 같아요. 저도 내년엔 꼭 철학과 학부생이 되어서 답변글을 남길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ㅎㅎ

제가 말한 1의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란 ~(이)다”를 설명하기 위해선 ““~(이)란 ~(이)다”란 x이다.”라는 문장으로 말해져야만 할 것 같은데, 여기서 “~(이)란 ~(이)다”라는 구조가 정의되지 않은채로 스스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문제가 발생하기에, 이것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느냐 라는 취지로 한 질문이었습니다.

추천해주신 수리논리학은 도서를 한번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심히 장문으로 답변해주신 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3번 질문은, 기초를 엄밀하게 정의하는 일에 대한 것보다는
“어떤 용어 정의가 책에서 나타나는데 그걸 인정 못하고 아득바득 반례 찾아가면서 공부시간 허비하는 일”이 과연 생산적인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실례지만 1번과 2번 답변에 나온 용어와 내용들이 몇가지 정확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일차논리, 양화사, F의 의미 등), 관련된 내용이 나와있는 학부수준의 도서나 SEP 문서를 추천해줄 수 있으신시요?

좋은밤 보내세요!!!

이 문제는 “~(이)란 ~(이)다”라는 논리적 형식의 유무 문제보다는, 오히려 진리대응론 (혹은 유사한 언어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패러독스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진리대응론에 따르면 믿음 P가 참이라는 것은, 믿음 P와 대상X가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대응관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응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P와 비교되어야 할 X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P가 참이라는 것을 (즉 대상 X와 대응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미 믿음P가 참이라는 것을(즉 대상 X에 대한 참인 앎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순환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란 ~(이)다”라는 논리적 형식을 가지지 못한 지성이 어떻게 "최대한 우리와 비슷한 사고과정"을 가질 수 있는지 제게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예컨대 “~(이)란 ~(이)다”라는 논리적 형식을 가지지 못하면, 예컨대 personal identity에 대한 기초적인 믿음들조차 가질 수 없어 보입니다. "아침 기자회견에 등장한 트럼프"와 "저녁 기자회견에 등장한 트럼프"가 동일하다라는 판단조차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의 많은 믿음들 역시 공유될 수 없겠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많은 참인 믿음들이 공유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비슷한 사고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intelligible하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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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 님의 논리적 외계인 문제에 관한 글을 읽고 생각이 떠올라서 만들어본 질문인데, 직접 답해주시니 괜히 뿌듯하네요.

이 부분이 지금까지 제가 가지고있던 철학적 문제들 중 상당수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어떤 것이라고 말해질 때 느껴지는, 오묘한 순환논리적 느낌을 참을 수 없었거든요.

또,

이 부분을 통해 1번 문제에서 제가 지나치게 모호하게 조건을 잡은 것일수도 있다는 성찰을 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열과 성을 다해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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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라는 제안을 따라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언어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 is true iff 트럼프는 아침에 남성이다
"b" is true iff 트럼프는 저녁에 남성이다
"c" is true iff 아침의 트럼프와 저녁의 트럼프는 동일하다

물론 이런 언어는 끔찍할 정도로 비효율적이라, 실제로 사용될 것이라 생각될 수 없겠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때 만일 이러한 언어가 해석가능하다면 (이 역시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 가바가이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해당 언어에 copula "@"를 도입해 "a"대신 "p@q"를, "b" 대신 "p@r"를 사용하게끔 할 수 있을 것이고, "p"와 "p"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면 - 이를 알아채는 것은 전언어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전언어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배울 수 있겠냐는 겁니다 - 그 이유가 c라는 것 또한 알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재명은 아침에 남성이다"라는 뜻의 "d"를 "o@q"로 번역하고, 마찬가지로 "q"와 "q"의 동일성을 "e": "아침에 남성임이라는 개념은 아침에 남성임이라는 개념과 동일하다"와 연관지음으로써 술어 개념을 익히고, 또한 주+술 구조 명제의 진리이론적 구조 - 그것으 무엇이 되었건 - 을 충분한 양의 데이터를 통해 배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는...이다" 없이 "x y의 이유이다"라는 것이 알려질 수 있겠냐는 문제가 발생하겠죠.
그러나 @abcde 님이 단지 주어와 술어의 결합구조가 없다는 것만을 의도하셨다면, 한국어의 표층적인 문법과 달리, 우리는 이미 이러한 논리적 연결사들을 주어+술어의 결합구조와 다르게 취급하는 언어를 적어도 대학교 1학년 때 배웠습니다. 우리는 "x는 y의 이유이다"를, 물론 Rxy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x |-> y‘’ 이라는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연언문, 선언문, 조건문에 대한 이해가 주술 구조 없이, 즉 술어 논리 없이 표현될 수 있다면, 이유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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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분도 제가 간과한 것 같습니다. 한국어로 주-술관계면 논리학적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좁은 식견으로 지레짐작했다가 큰 코 다칠 뻔 했네요;;;

나머지 내용은 관련 도서같은 것들을 읽어보고 다시 봐야겠습니다 ^^; 글 읽고 답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초급 논리학 교재를 읽어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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옙 알겠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 사례가 될 수 있을 만한, 가능세계들을 술어로 취급하는 의미론을 본 적이 있습니다 ㅋㅋ 당장 찾을 수는 없는데, 크립키 모형의 세계들을 ‘돼지임’같은 술어로 취급해서 ‘돼지-에서-햄이다’라고 읽음 직한 형식 문장을 ‘햄은 돼지이다’의 번역으로 취하는… 그런 요상한 이론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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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강조한 것은 그러한 언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2357 님의 모델이 성립한다는 가정 하에) 그러한 언어를 "우리"는 만들어낼 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비효율적 언어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의미론을 “~(이)란 ~(이)다”라는 논리적 형식을 통해 이미 이해하고 있으니깐요.

일단 제게는, 외계인이 위 진리조건들의 우항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에서 위와 같은 진리조건 의미론을 그 외계인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정합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가 위와 같은 진리조건을 진정 그 외계인에게 투사한다면, 이것은 이미 그 외계인이 우리와 동일한 이해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일 뿐입니다. (데이빗슨이 진리조건을 해석이론으로 사용하기 위해 자비의 원리를 요청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진정 외계인이 우리와 동일한 이해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애초에 외계인은 “~(이)란 ~(이)다”에 해당하는 논리적 형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설정이 무색해지겠지요.

더 나아가서 제가 personal identity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란 ~(이)다” 라는 논리적 형식이 없을 경우 모든 자기동일성을 가지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인격 동일성 뿐만 아니라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에 대한 이해조차 불가능해지겠죠. 예를 들어 시간에 걸쳐 (우리가 보기에) 동일한 대상을 지각하고 있다고 합시다. t1에서 지각한 그 대상 X가 t2에서 지각한 그 대상 Y와 동일하다라는 이해가 기저에 깔려있지 않다면, t1과 t2에서 각각 지각한 대상들이 동일한 실체(예컨대 "노트북")를 구성한다는 이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트럼프"라는 인격적 동일성 조차 이해할 수 없겠죠. 사실상 거의 모든 고유명들이 이해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각각의 시간에 주어지는 대상들 각각에 각기 다른 프레게적 이름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 경우 "최대한 우리와 비슷한 사고과정"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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