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개념은 왜 문제가 많은 개념인가

군나르 시르베크의 서양 철학사를 5년 만에 재독하고 있는데 의문점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질료 개념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진흙이나 돌 혹은 나 무와 같은 물질로서의 질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한 조각의 나무와 같은 동일한 재료는 의자의 다리나 도끼 자루 등 상이한 사물들에 사용될 수 있다. 동일한 재료가 목수가 계획한 바에 따라 상이한 형 태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T 자 모양을 한 두 개의 의 자 다리를 상상할 수 있다. 둘은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다. 형태(1형 생들 혹은 속성들은 보편적이다. 대량으로 바늘을 생산하는 경우 모든 생산물은 동일한 모양을 갖는다. 그것들은 형태, 크기, 색상 등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각기 자신만의 질료를 갖 고 있기 때문에 상이한 단위들units이다 -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동 일한 바늘이 아닌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많은 개 별 사물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자신만의 질료를 소유하고, 그럼으 로써 상이한 공간적 장소에, 예를 들자면 나란히 있을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여러 바늘이 결코 동시에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는 없 다. 이런 의미에서 질료는 개별화를 행하는 것, 즉 한 사물을 하나의 특정한 개별 사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질료(마테리아세 쿤다materia secundal이차 질료))는 개별화의 원리로 여겨진다. 그러면 형태[형상)를 갖기 전의 질료는 무엇인가? 우리는 형태[형상)가 없 는 것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미의 질료(마테 리아 프리마materia prima(일차 질료])는 문제가 많은 개념이다“

형태가 없는 것에 관해서는 그냥 질료가 없는 것으로 말하면 되지 않나요? 이 질료 개념이 어떤 문제를 발생하는 걸까요?

질료형상론을 언뜻 보면 순수한 의미에서의 질료라는 게 있어서 그것이 형상이랑 결합한다는 말 같은데, 그렇다면 형상과 결합하기 이전의 수적 개별자로서의 질료가 있어야겠죠. 그런데 그게 대체 뭐냐는 겁니다. 이른바 ‘맨 개별자’(bare particular)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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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bare particular/bundle theory는 물체와 성질의 우선성에 대해서 논하지요. Bundle theory는 성질이 우선이고 물체를 구축하지만, bare particular은 맨 개별자라는 무언가가 성질과 별개로 있고 그 안에 성질들이 instantiate된다는 것이지요. 근데 이 물체/성질의 구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태/질료 구분과 같은 구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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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을 읽으면서 저도 이 부분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우선 이 논의는 '있음'의 의미 중 첫째가는 의미, 즉 실체 개념을 검토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는 점이 파악되어야 할 것 같아요. 실체의 후보자인 기체, 본질, 유, 보편자를 검토하는 지점에서 질료 개념이 갖는 문제가 좀 더 명료하게 보이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우리가 질료를 기체로서 받아들이게 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예시로 들어볼게요. 이순신 동상을 존재하게끔 만드는 토대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동상의 우연적 속성을 하나씩 지워볼 수 있습니다. 그 모양이라든지, 서 있는 위치라든지, 그 크기라든지 등등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특정한 모양을 한 청동을 동상의 기체(hypokeimenon)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청동 또한 일정한 길이와 속성, 성질들을 갖고 있으니, 또 그 청동을 이루는 재료적인 것들로 파고 들어갈 수 있겠죠. 근데 문제는, 이 과정의 끝에서 주어질 법한 기체는 결국 어떤 성질이나 속성, 크기, 형상 모두를 갖지 않는 기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질료가 기체라면 그것은 한 사물을 바로 그 사물이게끔 하도록 만드는 명확한 개별성과 지칭 가능성을 지녀야 하는데, 막상 그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보니 정반대의 결과, 저 둘 모두를 지니지 못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7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권 1029a11-27

왜냐하면 만일 질료가 실체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분명 밑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다른 것들은 물체들의 양태들이거나 그것들로써 만들어진 것이거나 그것들의 능력이고, 그런가 하면 길이나 넓이나 깊이는 양적인 것들이지 실체들이 아니요(양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런 것들을 자기 안에 속하는 것으로 가지고 있는 첫째가는 것, 바로 이것이 실체이다. 그러나 길이와 넓이와 깊이를 덜어내면, 우리는 이것들에 의해 제한된 어떤 것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국 이런 관점에서 그 문제를 고찰하는 사람들에게는 질료가 유일한 실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 결국 그 최종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는 어떤 종류의 것도 아니요 양적인 것도 아니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것들의 부정태들도 아닌데, 그 이유는 이것들은 부수적인 뜻에서 그것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질료가 실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반적 의견에 따르면 분리가능성과 ‘이것’은 주로 실체에 속하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형상과 둘로 이루어진 것이 질료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실체로 생각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질료를 기체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접하는 모든 대상들을 형상과 질료로 구분할 수 있게 되고, 계속 추상을 진행한다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형상을 갖지 않는 질료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인 거죠.

다른 관점에서, 특히 주어와 술어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어요. 만약 질료가 실체라면, 그것은 다른 것들을 술어로 갖지만, 다른 대상들은 질료를 술어로 가지지 않겠죠. 근데 우리가 질료를 규정하는 술어를 하나씩 추상하게 된다면, 결국 질료는 규정성과 개별성을 갖는 주어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규정되지 않는다는 문제로 이어진다는 얘기로 볼 수 있겠습니다.

TL;DR: 만약 질료를 기체로서 간주하게 된다면, 분명 개별성과 규정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 오히려 무규정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는 게 문제인 셈이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를 기체로서 간주하는 입장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형상과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형상을 제일 실체(prote ousia)로 제시합니다.

...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나 형이상학에 좀 더 빠삭한 선생님들의 도움을 기다려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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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서 ‘관련된다’라고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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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와 형상이 탁월한 제안이고 더 환원시켜가면 순수질료, 순수형상까지 가게되겠지요. 아리스토테네스는 순수질료를 아페이론, 혹은 물 흙 공기 불로 생각하지 않았나 저는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질문은 물이 순수질료이면 여전히 물이라는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 같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무시했습니다. 세상에는 순수질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것은 결국 힘의 변형인데 모든 질료에는 힘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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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순수 질료라는 용어에서 물질적인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우선 문헌적인 전거로는, 형이상학 1권부터 제시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을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지금 <형이상학> 갖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어느 구절이었는지 첨부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ㅎㅎ 대강 예전에 정리해뒀던 자료를 활용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양해를 구합니다.)

이어서, <형이상학> 제8권에서 등장하는 질료의 규정에서도 물질적 요소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제시하는 질료의 규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8권(Η), 1042a25-32

그러면 이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실체들에 대해 논의해보자. 이에 해당하는 것은 감각적인 실체들인데, 모든 감각적인 실체는 질료를 가진다. 하지만 기체가 실체인데, 그에 대항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 보면 질료이고(현실적으로 ‘이것’이 아니지만 가능적으로는 ‘이것’인 것을 일컬어 나는 질료라고 부른다), 어떤 뜻에서 보면 정식과 형태인데, 이것은 ‘이것’으로서 정식에서 분리가능하다. 세번째로는 그 둘의 복합체가 있는데, 오직 이것만이 생성과 소멸을 겪으며 무제한적인 뜻에서 분리가능하다. 정식에 따르는 실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분리가능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질료를 물질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 불, 흙 등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것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그다지 이 그림에 적합하진 않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물질이라고 여겨지는 물, 불, 흙 등 또한 이미 특정한 형상과 결합된 복합 실체의 범주에 들어갈테니까요.

오히려 여기서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질료 개념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질료는 현실적으로 명확하게 지칭되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형상을 지니고 있을 때에만 개별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잠재적인 것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술어들을 질료라고 읽을 수 있겠네요..! 왜냐하면 술어들은 그 자체로 명확하게 규정되고 지시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직 주어와 결합할 때, 또는 지시 가능한 대상과 결합될 때 규정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여전히 잠재적인 규정에 지나지 않겠죠. 이러한 맥락에 미루어 볼 때, 질료와 형상은 단순히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아무래도 내용과 형식, 개별적인 내용과 규정적 형식이라는, 보다 고차적인 의미에서 논의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과연 순수한 질료가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감각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죠. 질료에 가능성의 지위를 부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형이상학> 9권에서 사물의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맥락으로도 연결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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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혹시 그러면 조금 다른 질문일 수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명론자'라고 말할 수 있나요?
실체와 속성의 개념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랑'이란 속성을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성을 통해 보편자를 지각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대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형이상학에는 정말 젬병이지만, 한번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ㅎㅎㅎ... 제가 틀린 주장을 할 수도 있으니 꼭꼭 다른 문헌과 교차 검증을 해보시길 바라요!

올려주신 질문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보편자는 어떤 형이상학적 지위를 갖는가, 라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형이상학 제7권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체의 네 가지 후보자에 대한 논의가 유용할 듯 싶습니다.

해당 권에서는 기체, 본질, 보편자와 유를 각각 검토하는 데, 우선 마지막 두 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기각됩니다. 그러니까 보편자와 유는 실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입니다. (우선 지금까지 논의된 실체는 감각 가능한 개별물인 복합실체가 아니었다는 점만 짧게 짚고 넘어갈게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만약 어떤 것이 실체라면 다른 것들과 구분되어 가리켜져야 하고, 특정한 이름으로서 불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가 서로 다른 각각의 개별자에 공통적으로 속한다는 까닭에 실체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주장해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7권(Ζ), 1038b10-15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의 실체는 각 대상에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지만, 보편자는 공통적이기 때문인데, 그 본성상 여럿에 속하는 것을 일컬어 보편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의 실체이겠는가? 모든 것의 실체이거나 아무것의 실체도 아닐 터인데, 모든 것들의 실체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것 하나의 실체라면, 다른 것들도 그것과 똑같을 것인데, 그 까닭은 그것들의 실체가 하나이고 본질도 하나인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 역시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체에 대해 술어가 되지 않는 것이 실체라고 불리지만, 보편자는 항상 어떤 기체에 대해 술어가 된다.

예컨대, 우리가 만약 동물이라는 보편적인 유를 실체라고 주장한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이 동물이라는 보편자나 유는, 주어로서 분리 될 수 있고, '이것'이라고 지칭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선 동물이라는 유나 보편적 규정은 하나의 개별적인 동물에만 속하는 게 아니라, 라마, 코끼리, 개미핥기 등 각 개별적인 동물들에 대해 공통적이기 때문에, 동물이라는 유는 그 자신에 고유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실체나 본질을 가질 수 없겠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편자는 실체가 지녀야 하는 주요 표징으로서 ‘기체성’을 지닐 수 없어요. 이것은 기체성의 의미에 연관됩니다. 어떤 것이 기체라면 그것은 다른 것들에 의해 서술될 수는 있지만(또는 술어로 가질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을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그것은 다른 것들의 술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유와 같은 보편자들은 가리켜지는 실체에 대해 술어가 되는 까닭에, 엄밀한 의미에서 실체가 결코 되지 못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근데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요. 보편자나 유가 엄밀한 의미에서 실체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 자체로 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요. 근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가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실체를 구성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 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하는 셈이죠. 이 부분은 형이상학 7권에서 제시되는 이데아 비판과도 유사한 맥락을 지니게 됩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보편자를 실체로서 이해하게 된다면, 동일한 술어를 갖거나 동일한 유에 속하게 되는 개별자들이 각자의 본질에 있어서 모순된 규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있어요. 설령 개별자들 각각 속할 수 있는 보편자가 있다고 한다면, (가령 인간의 이데아, 기린의 이데아 등등) 그렇다면 이들을 공통적으로 동물이라는 유나 보편자에 속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이라는 유가 왜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못하는가 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형이상학 제7권 1039a25-33, 1039b8-16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아! 이 부분도 참 재밌는 얘기인데요, 이 부분은 형이상학 제5권의 "부수적인 것(kata symbebekos)"와 형이상학 7권의 본질 부분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아요.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우연적인 속성은 본질에 기생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노란 민들레를 떠올려보세요.

민들레는 노랗습니다. 근데, 그게 민들레의 본질적인 규정은 아니겠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다면, 민들레의 본질은 민들레 그 자체에 대해서 일컬어지는 규정으로부터 파악되겠죠. 속성은, 단지 실체가 우연적으로 갖는 부수적인 것으로서, 감각 경험을 통해서 파악될 수는 있습니다. 가령 이 민들레는 노란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노랑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랑 자체는 개별적으로 지시될 수 있고, 주어로서 분리될 수 있는 실체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나, 속성이나 성질 같은 보편자의 독립된 실재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의미의 보편자 자체를 거부하느냐, 그건 또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움이 크게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온건한 유명론자의 입장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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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그런데 시르베크의 서양철학사에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모두 실재론자로 분류하더라고요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유명론자냐 실재론자냐를 칼같이 자르기 어렵기도 할뿐더러, 둘을 구별하는 게 큰 의미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유명론이니 실재론이니 하는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지 그들이 자기가 실재론자니, 유명론자니 자칭한 것도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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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참 까다로운 문제이지요... 앞서 @car_nap 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분류하는 작업이 정말 의미를 지니는지도 따져볼만한 것 같아요. 애초에 실재론이라든지 유명론이라든지 하는 규정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에 생겨났을 뿐더러, 이 둘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저 분류에 언제나 들어 맞는 건 아니니까요. 철학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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