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언어 사용자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는 간과하기 쉽지만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과거의 유한한 학습 경험으로부터, 해당 단어가 사용될 수 있는 무한한 사례들에 대해 올바른 추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덧셈을 예로 들어 보자. 누군가 당신에게 ’68 + 57’의 답을 묻는다면 당신은 ‘125’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50보다 큰 두 수를 가지고 덧셈을 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자.¹ 당신 앞으로 한 회의주의자가 다가오더니, ‘125’라는 당신의 답은 틀렸으며, 당신이 내놓았어야 하는 답은 ‘5’였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회의주의자는 다음을 주장한다.
만약 당신이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치한다면, 당신은 ‘5’라고 답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 적어도 회의주의자에 따르면 — 당신이 과거에 ‘+’에 부여했던 의미는 사실 덧셈(+)이 아니라 컷셈(⨁)이었기 때문이다. 컷셈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x ⨁ y =
x + y (x, y < 50)
5 (otherwise)
이에 대해 당신은, 과거부터 자신은 ‘+’를 컷셈이 아닌 덧셈의 의미를 사용했다고 즉각 반박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부터 본격적인 문제가 시작된다. 과거에 자신이 ‘+’에 부여한 의미가 컷셈이 아닌 덧셈이었음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문제의 가정으로 인해, 과거에 당신이 수행한 ‘+’의 계산 기록들로부터 이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에 당신이 수행한 ‘+’ 문제는 모두 양항이 50 미만이었으므로 덧셈으로 인한 결과인지 컷셈으로 인한 결과인지 구별할 수 없다.
방금 등장한 ‘입증’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이 문제가 인식론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화자 A는 화자 B가 ‘+’로 덧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나 크립키의 요점은 인식론을 뛰어넘는 것이다. 크립키는 A가 전지전능하다고 할지라도 — A는 B의 과거의 모든 발화, 행동, 심리 상태를 알 뿐 아니라 그것들의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다 — 과연 A는 B가 ‘+’로 덧셈을 의미하는지, 혹은 덧셈과 충분히 많은 경우에 — B가 전 인생에 걸쳐 수행했던, 그리고 수행할 ‘+’ 계산을 아우를 정도로 많은 경우에 — 일치하는 비표준적인 연산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런 점에서 크립키가 제시하는 회의주의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B가 컷셈이 아닌 덧셈을 의미한다”에 대응하는 사태case가 있는가이다. 이는 후술하다시피 크립키가 반사실적 조건문 혹은 가능세계를 통해 회의주의를 해소하려는 시도까지 검토한다는 점에서 — 비록 그 시도 또한 실패한다고 결론 내리지만 — 드러난다.
두 가지 조건
회의주의자의 주장에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회의주의자의 주장은 가정문이다. 회의주의자는 당신이 어떤 경우에서든 ’5’라고 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만약 당신이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치한다면 ’5’라고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회의주의자의 주장은 규범적이다. 회의주의자의 주장은 — 앞서 말한 조건이 만족되었을 때 — 당신은 ‘5’라고 답할 것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5’라고 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달리 말해, 회의주의자는 만약 당신이 ’68 + 57’에 대해 ‘5’라고 대답했더라면, 그 대답은 정당했을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회의주의자의 주장에 반박하고자 한다면, 그 반박 또한 두 가지 특징을 갖춰야 한다. 첫째, 화자에 관한 어떠한 사실이, 해당 화자가 특정 기호를 특정 의미로 사용함을 구성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이 설명은 회의주의자의 주장에서 가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필요하다. 둘째, 해당 사실이 어떠한 방식으로 화자의 언어 사용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이 설명은 회의주의자의 결론이 규범적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두 번째 조건의 의의가 안 와닿을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설명을 해 보겠다. 가령 “내가 과거의 나와 같은 의미로 ‘+’ 기호를 사용한고자 한다면 나는 ’68 + 57’에 대해 ‘125’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과거의 나를 두뇌까지 포함하여 정확히 똑같이 복제한 사람에게 ’68 + 57’을 물어본다면, 그는 ‘125’라고 답할 것이기 때문이다”는 회의주의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아니다. 그러한 복제 기술이 실제로 가능한지와는 별개로, 해당 답변은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사실은 내가 언제나 ‘125’라고 답했을 것임을 보증할 뿐 내가 언제나 ‘125’라고 답해야만 했음은 보증하지 않는다.
이는 체계적 계산 오류의 사례를 통해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덧셈을 처음 배우는 아이는 종종 받아올림을 까먹곤 한다. 그런 아이는 ’68 + 57’에 대해 ‘125’가 아니라 ‘115’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모종의 문제로 인해 어른이 될 때까지 받아올림 실수를 교정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덧셈이 무엇인지 이해하며, 구체적인 덧셈 문제가 아니라 덧셈에 대한 성질을 질문 받으면 — 가령, “결합법칙을 만족하는가?” — 올바르게 대답한다. 다만, 그는 그의 실수를 교정해 줄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68 + 57’을 질문 받으면 언제나 ‘115’라고 대답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그가 ‘+’에 덧셈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그 의미에 정당한 방식대로 ’68 + 57’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바로 이 주장을 성립시키기 위해 두 번째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의미론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그가 ‘+’에 덧셈이 아닌, “두 수의 덧셈을 받아올림을 제하고 수행하는 연산”, 혹은 “곁에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받아올림을 제한 덧셈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지도자의 교정을 받아 덧셈을 수행하는 연산”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수긍해야 하기 때문이다.²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 검토
시도 1. 언어적 해명
회의주의자의 주장을 들은 당신이 내놓을 첫 번째 대답은 아마 이러할 것이다. “과거의 나는 ‘x + y’가 x개의 대상과 y개의 대상을 한데 모은 묶음을 세는 연산이라고 배웠다. 따라서 과거의 나는 ‘+’를 컷셈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이에 대해 또 한번 회의주의를 펼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과거에 당신은 ‘세다’라는 단어를 줄곧 셈count이 아닌 켐quont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묶음을 켄다는 것은 묶음의 크기가 50 미만일 때는 세는 것이고, 50을 초과할 때는 5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요지는, 과거에 자신이 ‘+’에 부여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다른 언어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려는 시도는 해당 언어적 증거 또한 비표준적인 의미가 부여되었을 가능성을 제거하지 못하므로 무한 퇴행에 빠진다는 것이다.³
시도 2. 성향적 분석dispositional analysis
심리철학에서 성향적 분석은 행동주의behaviourism가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심리 상태의 성향적 분석. 주체 A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심리 상태 m에 있다는 것은, A에게 특정 자극 s가 주어졌더라면 / 주어진다면 / 주어지게 된다면, A는 반응 b = fm(s)를 보였을 / 보일 / 보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즉, 심리 상태(m)은 자극-반응 대응(fm)으로 환원된다.
예를 들어 금방 선잠에서 깬 앨리스가, 어둑어둑한 방과 창밖으로 들리는 물방울 소리를 듣고, “지금 비가 오고 있다”라는 믿음을 형성했다고 해보자. 성향적 분석에 따르면 “앨리스는 ‘지금 비가 오고 있다’고 믿는다”의 의미는 다음의 (무수히 많은) 자극-반응 대응과 다름이 없다.
- 친구에게서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전화가 온다면: 우산을 챙길 것이다.
- 이웃에게서 밖에 당신의 빨래가 걸려 있다는 연락이 온다면: 빨래를 급히 거두러 갈 것이다.
- 내일 야외 일정이 잡힌다면: 내일의 날씨를 확인할 것이다, 등등…
만약 이러한 자극-반응 대응에서 크게 어긋나는 현상이 관측된다면 성향적 분석주의자는 앨리스의 믿음에 대한 견해를 수정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앨리스가 외출을 나서는데 우산을 챙기는 대신 선글라스를 챙긴다면, 그는 앨리스가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이 아닌 “햇살이 쨍쨍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주목할 성향적 분석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 반사실적 조건문을 사용한다. 앨리스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외출을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앨리스가 외출을 나갔더라면 / 나간다면 / 나가게 된다면 그는 우산을 챙겼을 / 챙길 / 챙기게 될 것이다”는 그가 가졌던 / 가지고 있는 / 가지게 될 믿음에 대한 성향적 분석의 일부를 이룬다.
- 기술적이다. 성향적 분석은 행동주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앨리스가 외출을 나간다면 그는 우산을 챙겨야 한다” 와 같은 규범적 명제가 아닌, “앨리스가 외출을 나간다면 그는 우산을 챙길 것이다” 와 같은 기술적 명제로 이루어진다. 성향적 분석에 따르면, 만약 앨리스가 외출을 나서는데 우산을 챙기는 대신 선글라스를 챙긴다면, 앨리스는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에 정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크립키는 자신과 사적인 자리에서 규칙 따르기 역설을 논의했던 일부 철학자들이, 성향적 분석의 1번 특징에 의존함으로써 성향적 분석을 통한 역설의 해결을 시도했다고 전한다. 이 접근법은 다음을 주장한다.
의미에 대한 성향적 분석. 화자 A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단어 w로 M을 의미한다는 것은, w가 포함된 문장 s가 A에게 주어졌더라면 / 주어진다면 / 주어지게 된다면, A는 문장 s‘ = fM(s)로 대답했을 / 대답할 / 대답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즉, 의미(M)는 문답 대응(fM)으로 환원된다.
이 분석에 따르면, A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로 덧셈을 의미한다는 것은, A에게 x + y를 물어보았더라면 / 물어본다면 / 물어보게 될 때, A는 x와 y의 합으로 대답했을 / 대답할 / 대답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반사실적 조건문을 통해 회의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자의 사고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 회의주의자는 과거의 내가 ‘+’로 덧셈을 의미했는지, 덧셈이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경우에 덧셈과 일치하는 비표준적 연산을 의미했는지 구별하는 사태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지적한다.
- 1이 주장 가능한 이유는, 내가 지금까지 수행했고, 앞으로 수행할 ‘+’의 연산 횟수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과거의 나에게 ’x + y’을 물어보았더라면 나는 x와 y의 합을 대답했을 것이다”, 또는 “미래의 나에게 ‘x + y’를 물어본다면 나는 x와 y의 합을 대답할 것이다”라는 반사실적 조건문을 사용하면, 우리는 2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
- 이에 따라, 반사실적 조건문은 객관적인 진릿값을 가진다는 사실을 — 가능세계 존재론 등을 통해 — 인정한다면, 의미에 대한 성향적 분석은 내가 ‘+’로서 의미하는 연산을 객관적으로 결정한다.
이 논증은 회의주의자에 대한 반박이 갖춰야 할 첫째 조건 — 화자에 관한 어떠한 사실이 해당 화자가 특정 기호를 특정 의미로 사용함을 구성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 을 만족한다. 그 사실이라 함은 반사실적 조건문인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둘째 조건 — 해당 사실이 어떠한 방식으로 화자의 언어 사용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 을 갖추지 못하므로 성향적 분석은 역설을 해소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앞서 지적했듯이 성향적 분석이 본질적으로 기술적이기 때문이다. 크립키의 말을 인용하자면,
좋다. 나는 ‘125’가 내가 주어진 수식에 대해 내놓을 대답임을 알며, (실제로 그렇게 대답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 그저 하나의 주어진 사실로서 — 과거의 나에게 같은 수식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대답했으리라는 사실 또한 안다고 하자. 이 모든 사실들이 도대체 어떻게 — 현재 또는 과거에서 — ‘125’가, 내 내면의 어떤 규칙에 의거하여 도출된 정당화된 답이지, 그저 눈 가리고 아웅하며 내놓은 아무 근거 없는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가?
Well and good, I know that ‘125’ is the response I am disposed to give (I am actually giving it!), and maybe it is helpful to be told — as a matter of brute fact — that I would have given the same response in the past. How does any of this indicate that — now or in the past — ‘125’ was an answer justified in terms of instructions I gave myself, rather than a mere jack-in-the-box unjustified and arbitrary response?
(이탤릭체는 원문, 강조는 필자)
크립키가 지적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회의주의자에게 대항하는 주장은 다음의 형식을 갖춰야 한다.
주장 1. 만약 내가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치한다면,
- 나는 ‘5’라고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나는 ‘125’라고 답해야 한다.
성향적 분석에 의하면 위 주장은 다음과 동의적이다.
주장 1.1. 만약 ‘+’에 대한 과거의 내 문답 성향이 ‘+’에 대한 현재의 내 문답 성향과 일치한다면,
- 나는 ‘5’라고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나는 ‘125’라고 답해야 한다.
“그저 하나의 주어진 사실로서”, ‘+’에 대한 과거의 내 문답 성향이 두 수가 주어졌을 때 그 합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하자. 이 사실을 위에 대입하면,
주장 1.2. 만약 ‘+’에 대한 현재의 내 문답 성향이 두 수가 주어졌을 때 그 합을 말하는 것이라면,
- 나는 ‘5’라고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나는 ‘125’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나 주장 1을 주장 1.2.로 재진술하였다고 한들, 이를 성립시킬 근거는 여전히 전무하다. 만약 1, 2의 술어부가 “답할 것이다”였다면 주장이 성립하겠지만, 요구된 것은 “답해야 한다”이다. 이것은 문답 성향만 가지고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1, 2의 술어부를 ”답할 것이다“라고 둘 수는 없을까? 요컨대 회의주의자에게 다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주장 2. 만약 내가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치한다면,
- 나는 ‘5’라고 답할 것이 아니라,
- 나는 ‘125’라고 답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서 “체계적 계산 오류의 사례”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내가 ‘68 + 57’에 대해 ‘125’라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즉시 내가 ‘+’로 덧셈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시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덧셈을 수행함에 있어 때때로 실수를 하곤 하지만, 그런 실수가 저지를 때마다 내가 ’+‘를 덧셈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 연산을 수행함에 있어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내놓는 계산 결과가 내가 ‘+’에 부여하는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내가 ‘+’에 부여하는 의미가 선행하여 내가 내놓아야 할 결과를 결정함을 시사한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향적 분석으로 의미의 규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회의주의자의 도전을 재해석해야만 할 것이다.
주장 3. 만약 내가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를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 나는 ‘5’라고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나는 ‘125’라고 답해야 한다.
주장 3에 성향적 분석과 반사실적 조건문을 적용한 진술은 다음과 같다.
주장 3.1. 만약 ‘+’에 대한 현재의 내 문답 성향이 두 수가 주어졌을 때 그 합을 말하는 것이 되고자 한다면,
- 나는 ‘5’라고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나는 ‘125’라고 답해야 한다.
확실히 이는 주장 1.1, 1.2보다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주장 3.1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설령 주장 3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장 1을 시사하지는 않는다는 문제이다. p, q를 다음과 같이 두자.
- p: 내가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치한다.
- q: 나는 ‘125’라고 답한다.
이 경우 주장 1과 주장 3은 각각 다음과 같다. (W는 ”하고자 한다“를, □는 “해야 한다”를 의미)
- 주장 1. p → □q
- 주장 3. Wp → □q
그러나 p는 Wp를 시사하지 않고 —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 — Wp 또한 p를 시사하지 않기 때문에 — 내가 원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 주장 1과 주장 3에는 어떠한 논리적 관계도 없다. 구체적으로, 전자의 경우로는 ‘+’를 곱셈의 의미로 사용하겠다고 다짐한 반항아 학생이, 자신의 의지가 무색하리만치 내면화된 습관에 의해 ‘68 + 57‘에 ’125‘라고 답하는 상황이 있다. 후자의 경우로는 '+' 기호를 덧셈의 의미로 사용하고자 하지만 아직 덧셈의 개념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한 학생의 경우가 있다.
둘째 문제는, 애초에 주장 3이 무한 회귀에 빠진다는 것이다. 잠시 설명의 편의를 위해 심리 상태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현재의 문제를 심리 상태에 관한 것으로 전환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지금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산이 아닌 다른 물건을 챙긴 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가령 내가 허겁지겁 외출 준비를 하고는 우산꽂이에서 아무거나 뽑은 채 집을 나섰는데, 손에 잡힌 게 우산이 아니라 지팡이였던 상황을 고려해 보자. 기존의 성향적 분석에 따르면 이 경우 나는 애초부터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던 것인데 이는 반직관적인 결론이다. 이에 대해 성향적 분석주의자는 다음의 주장들을 대신 내세울지 모른다.
주장 4. 만약 내가 과거에 ‘어두컴컴한 방과 창밖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형성하던 믿음과 현재 동 상황에 형성하는 믿음을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 나는 지팡이를 챙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 나는 우산을 챙겨야 한다.
주장 4.1. 만약 ‘어두컴컴한 방과 창밖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대해 내가 보였을 자극-반응 대응과, 동 상황에 대한 현재의 내 자극-반응 대응을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 나는 지팡이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 나는 우산을 챙겨야 한다.
주장 4.2. 만약 ‘어두컴컴한 방과 창밖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대한 나의 자극-반응 대응이 외출을 나가는 상황에 대하여 우산을 챙기는 것이 되고자 한다면,
- 나는 지팡이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 나는 우산을 챙겨야 한다.
일면 타당해 보이는 주장 4.2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애당초 우리가 성향적 분석을 시도하는 이유는 심리 상태에 관한 진술을 행동주의적인 표현으로 옮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주장 4.2는 한 특정 심리 상태 —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 — 에 관한 진술을, 다른 심리 상태 — 외출을 나가는 상황에 대하여 우산을 챙기는 반응을 보이고자 하는 의도 — 에 관한 진술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가 ‘외출을 나가는 상황에 대하여 우산을 챙기는 반응을 보이고자 하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성향적 분석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이는 결국 무한 회귀에 갇히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주장 3 또한 무한회귀에 빠진다. 앞선 논의를 되새겨 보면, 회의주의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갖춰야 할 필요조건 중 하나는 “화자에 관한 어떠한 사실이, 해당 화자가 특정 기호를 특정 의미로 사용함을 구성하는지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주장 3.1은 이 문제에 대해 “내 문답 성향을 특정한 방식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의도”라는 답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회의주의자는 이에 대해, ”화자에 관한 어떠한 사실이, 해당 화자가 ‘+’ 기호에 대한 문답 성향을 특정한 방식 — 이를테면, 컷셈이 아닌 덧셈에 대응되는 문답 성향 — 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구성하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향적 분석으로 의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의미의 규범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규범성을 설명할 수 있도록 성향적 분석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시도는 문제가 요구하는 바를 벗어날 뿐 아니라, 무한 회귀의 오류에까지 빠지게 된다.
¹ 한 사람이 인생에서 덧셈을 계산하는 횟수는 유한하므로, 그러한 상한은 — 대부분의 경우 50보다는 훨씬 크겠지만 — 언제나 존재한다.
² 물론 이 경우 그가 수행하는 ‘+’는 결합법칙을 만족하지 않으므로 (예를 들어 “(10 + 7) + (4 + 10)”에 대해서 그는 21이라고 대답하지만 ”(10 + (7 + 4)) + 10“에 대해서는 31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그가 애초에 ‘+’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³ 수리논리학을 배워본 적 있는 독자라면 이를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와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