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전기 후기 차이

제가 논리철학논고를 읽고 있는데요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말하는 건 불가능하고 어쩌고저쩌고 했잖아요 근데 저는 읽는 내내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 조금 모순적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까 그 모순을 느낀 게 후기의 시작일 수 있겠다 싶어서요 이런식으로 해석해보는 건 안 될까요?

전기와 후기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모순을 알고 본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을 실천했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후기 땐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경계선을 그리는 것을 포기했던 것이고요 전기에선 세계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의미가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로 나누려고 했는데 후기는 그런식으로 나누는 것을 포기한 거죠 결국엔 방향은 똑같아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많으니 그 한계를 알고 세상을 직접 보라고요

후기에서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는 입장은 그대로 가져가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하잖아요 언어의 정의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거죠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건 있지만 후기에서는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선을 긋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후기에 이르러서는 명료화고 나발이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거 아닐까요

전기와 후기를 대표하는 논리철학논고랑 철학적탐구 두 책의 제목에서도 이런 점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논고(論考, Tractatus)에서는 말 그대로 무언가를 논하고 설명하려 한 것이고(본인은 설명이 아니라 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설명 같아서…) 탐구(探究, Investigations)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점인 거죠 그냥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 그것이 전기와 후기의 결정적 차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보면 전기와 후기는 단절이나 연속이 아니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발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논고는 철학적 탐구 사이에 놓인 일종의 과도기적인 것이고요

3개의 좋아요

물자체는 알 수없다는 칸트나 말할 수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이나 같은 입장이지요. 그런데 철학이나 학문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고 이미 알려진 진리는 탐구하지 않지요.
비트겐슈타인 후기는 말할 수없는 영역을 탐구했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사실 진리 탐구의 본질상 그렇게밖에 해석될 수 밖에 없지요.
탐구는 열심히 했지만 비트겐슈타인도 만족스럽지 못해 출판을 하지는 못했지요.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정확한 주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가 아니라 '말할 수없는 것을 탐구할 수 있지만 출판하지 마라'가 아닐까?
언어, 뇌, 심리, 정신의 복합적인 현상은 아직도 해석이 힙들죠. 그러나 미래 기술로는 통합적 해석이 가능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