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 윌리엄슨(Timothy Williamson)의 The Philosophy of Philosophy 5장과 6장에 나온 내용 중 아이디어만 간추려서 정리해봅니다.
사고실험과 철학적 방법론의 본성에 관해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네요.
- 사고 실험의 논증적 구조
윌리엄슨은 기본적으로 사고 실험이 어떤 필연명제을 논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간주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식론에서 게티어 사례이지요. 윌리엄슨은 게티어 사례를 사고 실험의 가장 성공적인, 그리고 전형적인 사례로 잡고 게티어의 사고 실험이 어떤 논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 사고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제시합니다.
논의를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 타겟이 되는 필연명제를 "□A"라고 두겠습니다. (게티어 사례에선 "Necessarily, S knows that p if and only if S has justified true belief that p"가 되겠지요)
모든 사고 실험은 어떤 가상의 시나리오, 혹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Suppose"나 "Consider that" 같은 식으로 문두를 떼지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하나의 가능한 상황을 세팅합니다. 즉, 우리 세계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가능한 스토리인 것이지요. 사고 실험에서 이런 가상의 시나리오를 제시함으로써 우리는 "◇B"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게티어 사례에서는 스미스와 존스의 상황에 대한 기술이 되겠지요)
사고실험의 목적은 "□A"를 논박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A"라는 귀결을 가져야 합니다. 사고 실험이 정말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B"로부터 "◇~A"를 도출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B
?
--
◇~A
궁극적으로 우리는 사고 실험을 통해 "이러저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A는 거짓이다"라는 것을 보이고자 할 것입니다. 게티어 사례의 경우 "존스와 스미스의 상황이 주어진다면, 존스는 p에 대해 정당화된 참인 믿음을 갖지만 p를 아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떠오르는 대안은 "□(B->~A)"을 전제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논증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윌리엄슨은 이 전제가 너무 강한 내용이라 건전한 논증이 될 여지가 거의 없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 전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B->~A"가 참이라는 것인데, 가능한 모든 경우를 고려하면 B가 참이면서 A가 참인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게티어 사례에서 존스가 마지막으로 세계에 있는 모든 정보를 거의 정확하게 알려주는 AI 툴을 통해 p가 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면 원래 시나리오(B)가 성립하면서 지식을 갖고 있는(A)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윌리엄슨의 대안은 "B□->~A"와 같은 반사실적 조건문을 전제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제의 내용은 표준적인 반사실적 조건문의 의미론에 따르면 "현실 세계와 가장 가까운(가장 유사한) 가능세계에서 B가 참이면 ~A가 참이다"가 됩니다. 이 경우에 앞서 strict conditional에서 생긴 문제는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존스와 스미스가 등장하는 시나리오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들은 현실 세계와 가능한 한 비슷하게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게 우리가 게티어 사례를 볼 때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로버트 스톨네이커의 표현을 빌리자면, "B□->~A"와 같은 명제의 진릿값을 따져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알거나 믿고 있는 현실 세계에 관한 명제 집합에 "B"를 추가하고, 비일관성 등을 적절히 조절한 후에 그 세계에서 ~A가 참인지 따져보는 것이지요.
윌리엄슨은 사고 실험의 논증적 구조에는 이런 반사실적 조건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지적합니다.
- 반사실적 조건문에 관한 지식
필연성과 가능성은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정의될 수 있다.
A가 필연적이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임의의 명제 p에 대해, p□->A.
A가 가능하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어떤 명제 p에 대해, ~(p□->~A).
여기서 한 가지 함축은 반사실적 조건문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인지적 능력은 곧 (형이상학적) 양상을 다루는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반사실적 조건문을 다루는 인지적 능력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윌리엄슨은 반사실적 조건문을 다루는 인지적 능력이 철학자들만 쓰는 특별한 종류의 능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반사실적 사고는 우리 일상 생활에 편재하며 이런 반사실적 사고능력은 다른 여러 진화적 발전의 부산물이라고 하죠. 재밌는 문구가 하나 등장합니다.
In general, the postulation by philosophers of a special cognitive capacity exclusive to philosophical or quasi-philosophical thinking looks like a scam.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자들이 철학적 혹은 유사-철학적 사고에만 특별하게 쓰이는 인지적 능력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
양상적 명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순수하게 선험적이지도 후험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런 전통적인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철학에서 따져보고 검토하는 주장이 필연성이나 가능성을 포함하는 양상적 명제이고, 이것이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양상 명제에 대한 인식론적 지위는 곧 반사실적 조건문의 인식론적 지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P가 참이었더라면, Q였을 것이다"와 같은 명제를 알게 됐다고 할 때, 그 지식은 선험적 지식일까요, 후험적 지식일까요?
잠시 선험적으로 아는 것과 경험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와 같은 명제는 전형적으로 선험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험이 진짜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총각이나 결혼과 같은 개념을 경험을 통해 습득해야 하죠. 하지만 위 명제를 아는 데 있어서 증거로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로가 젖어있다" 같은 명제를 알기 위해서는 경험이 증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달리 말이죠.
윌리엄슨은 인지(cognition)에서 경험의 역할 중 첫 번째를 enabling role, 두 번째를 evidential role 이라고 합니다. 선험적 지식의 경우 경험이 enabling만 하고, 후험적 지식의 경우 evidential role까지 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반사실적 조건문에 대한 지식에서 경험은 evidential role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enabling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윌리엄슨의 지적입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만일 P가 참이었더라면, Q였을 것이다"와 같은 문장이 참인지 따져볼 때 우리는 현실 세계에 관한 정보를 활용합니다. P가 참이라고 하고, 나머지 조건은 현실 세계의 정보로 채우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그런 가능세계에서 Q가 참일지를 따져보는데, 그 과정에서도 현실 세계의 법칙이나 패턴 등을 참조해서 따져보게 될 것입니다.
즉, 반사실적 조건문에 대한 지식을 얻을 때 경험은 단순히 개념 제공자가 아니라 뭔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개입합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후험적 지식처럼 해당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해 경험이 직접 증거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윌리엄슨은 전통적인 선험/후험 구분을 여전히 할 수는 있겠지만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거 철학적 지식은 자연과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선험적인 지식으로서 특별한 인지적 능력으로 접근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 구분이 중요했을지 몰라도, 윌리엄슨의 주장이 맞다면 철학에서 다루는 양상 명제는 반사실적 조건문을 다루는 인지적 능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일상인의 일반적인 능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전통적인 선험/후험 구분으로는 이러한 지식의 지위를 잘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제 설명에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면 아마 제 이해가 불분명해서 그럴 것입니다..ㅎㅎ 혹시 설명이 이상하거나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개인적으로는 윌리엄슨이 안락의자 철학(armchair philosophy)의 가능성을 어떻게 변호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뭔가 두근두근하게 하는 내용이었네요.
또 한편으로는, 만일 우리가 정말로 철학에서 가장 많이 하는 사고 패턴이 이러한 반사실적 조건문을 검토하는 것이라면 그 과정에서 개입하는 현실 세계에 관한 정보의 질에 따라 철학적 사고의 질도 영향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