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강의』 제2장 요약

루, 『형이상학 강의』, 아카넷, 2010.

제2장 보편자 논쟁 II: 유명론

유명론의 동기

유명론의 핵심 동기는 이론의 존재론적 단순성이다. 두 이론이 같은 설명력을 가진다면, 더 단순한 존재론을 가정하는 이론을 선택해야 한다. 유명론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실재론과 같은 만큼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보편자 없이 구체적 개체들로만 구성된 더 단순한 존재론을 채택하는 유명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명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실재론을 비판한다. (1) 실재론은 한 보편자, 즉 단일한 엔터티가 비연속적인 여러 장소를 동시에 점유할 수 있다는 거짓 주장을 낳는다. (2) 실재론은 보편자의 비순환적 동일성 조건을 제시하지 못한다. (예화하는 엔터티들이 같으면 보편자가 동일하다는 식의 조건은 실패한다. ‘인간’과 ‘날개없는 두발 동물’이라는 보편자는 이들을 예화하는 개체들이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보편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보편자의 동일성 조건은 보편자의 외연을 넘어 그의 내용을 언급해야 하는데,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다른 보편자를 끌어들임으로써만 가능하다. 결국 보편자에 대한 비순환적 동일성 조건을 제시할 수 없다.) (3) 실재론은 나쁜 무한퇴행에 빠진다. (4) 실재론은 구체적 개체인 우리가 보편자에 대해 어떻게 인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라는 심각한 인식론적 문제를 일으킨다.

다만 이들은 실재론에 대한 치명적인 반론이라 보기 어렵다. 다중 장소 점유에 관한 비판은 실재론자들이 두 가지를 전제하고 있을 때에만 적용된다. 보편자의 위치는 그를 예화하는 개체의 위치라는 것과, 사물의 다중장소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러셀은 첫째 전제를 부정함으로써 이 비판에 대응한다. 둘째 전제를 부정하여 비판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보편자의 다중장소점유는 가능하다. 이것이 불가능해보이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다중장소점유가 불가능한 구체적 개체들에 익숙해서, 개체들에나 적용되는 직관을 보편자에게로 잘못 확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보편자가 아닌 다른 모든 엔터티에 비순환적 동일성 조건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실재론자들은 동일성 조건 때문에 보편자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무한퇴행에 관해서도 실재론자들은 예화가 비관계적 결합이라는 주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두 세계 존재론에 따른 인식론적 문제도 모든 형태의 실재론이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유명론자들이 제시한 technical problem들은 유명론의 결정적 동기라기보다는, 이론적 단순성이라는 핵심 동기에 의해 추동된 유명론자들이 보편자라는 형이상학적 잉여물이 이론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끌고 온 것이다.

극단적 유명론(Austere Nominalism)

극단적 유명론자들은 속성일치현상이 더이상 설명되지 않는 기본적인 사실이라 여긴다. 나아가 이들은 실재론이 속성일치현상을 진정으로 설명해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실재론의 설명적 도식은 다음과 같다. 개체들이 둥글다는 측면에서 유사함은 그들이 둥긂이라는 보편자를 예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둥긂이라는 보편자란 무엇인가? 둥근 모든 개체들에 공통된 것이다. 둥긂을 예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냥 둥글다는 것이다. 결국 설명항은 피설명항을 다른 말로 바꾼 것일 뿐, 독립적인 정체성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재론의 설명은 진정한 설명이라 보기 어렵다.

극단적 유명론은 참인 주술문장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주술문장이 참인 것은 (1) 주어가 어떤 대상의 이름이고, (2) 술어는 어떤 대상들에 의해 만족되며 혹은 어떤 대상들에 대해 참이며, (3) 주어의 지시체가 술어를 만족하는 대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언어적 구조와 비언어적 구조의 대응이라는 실재론자들의 설명적 요구조건을 충족한다. 여기서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와 세계 내의 사물 간의 지칭 관계는 이름관계와 만족관계이다.

극단적 유명론은 추상 단칭 명사를 포함하여 보편자의 존재에 개입하게끔 하는 듯한 문장이 실제로는 구체적 개체들에 대한 문장의 위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추상 단칭 명사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문장들을 번역한다.

(1) Red is a color.

(1-1) Red objects are colored objects.

그러나 이러한 번역 규칙은 성공적이지 못하다.

(2) Hilary prefers red to blue.

(2-1) Hilary prefers red objects to blue objects.

(2)와 (2-1)은 서로 다른 진리조건을 가지므로 (2-1)이 (2)에 대한 적절한 번역이라 보기 어렵다. 힐러리는 빨강을 파랑보다 좋아하지만 빨간 대상들의 다른 성격들 때문에 빨간 대상들을 싫어할 수 있는 것이다.

번역을 개선하기 위해 “Other things being equal”이라는 구절을 번역하려는 문장 앞에 삽입할 수도 있다.

(2-2) Other things being equal, Hilary prefers red objects to blue objects.

그러나 이러한 시도 또한 문제적이다. 방금 삽입한 (2-2)의 구절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아마도 “색이 아닌 다른 모든 속성들이 일치한다면”으로 분석될 것이다. 그런데 이 분석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보편자에 개입하게끔 한다. “색 술어를 제외한 모든 술어들이 동일하게 만족된다면”으로 분석할 경우에도 문제는 여전하다. 우리는 사물의 모든 특성을 나타낼 술어들을 갖고 있지 않다. 이로 인해 색 술어 외의 모든 술어들을 동일하게 만족하는 빨간 대상들과 파란 대상들을 모아두더라도, 힐러리는 술어로 포착할 수 없는 다른 이유로 파란 대상을 선호하는 동시에 빨강을 선호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 하에서 (2-2)는 (2)와 다른 진리치를 가지므로 (2)의 적절한 번역이 될 수 없다. 극단적 유명론자들의 유일한 대응 방안은 “Other things being equal”이 분석되지 않는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아가 추상단칭용어를 포함하진 않지만 보편자에 대해 참이 되는 일반 용어를 포함하는 문장은 보편자를 언급하지 않는 식으로 번역하기 매우 까다롭다.

(3) He has the same character traits as his cousin.

(3-1) He and his cousin agree characterwise.

(4) Some species are cross-fertile.

(4-1) ?

(물론 (3-1)에서 덧붙인 “characterwise”는 분석되지 않는 것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다만 극단적 유명론자들은 자신들이 번역할 수 없는 문장들이 애초에 잘못된 믿음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할 수 없다며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극단적 유명론은 너무 많은 사항들을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부담을 진다. 또한 추상물 지칭을 포함한 문장에 대한 그들의 번역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존재론적 단순성을 성취하였지만 설명적 단순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메타언어적 유명론

메타언어적 유명론은 극단적 유명론처럼 존재하는 것은 구체적 개체들뿐이라고 여기지만, 추상물 지칭을 포함하는 문장이 메타언어적 문장, 다시 말해 언어적 표현에 대한 주장이라고 말한다. 이 이론은 추상물 지칭을 포함하는 문장에 대한 체계적인 번역을 제시함으로써 이론의 존재론적 단순성은 물론 설명적 단순성까지 확보한다.

카르납은 추상 단칭명사를 그에 대응하는 일반용어로 대체함으로써 보편자에 대한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언어적 표현에 대한 주장으로 체계적으로 번역한다.

(5) Courage is a moral virtue.

(5-1) ‘Courageous’ is a virtue predicate.

(6) Courage is a property.

(6-1) ‘Courageous’ is an adjective.

(7) Paternity is a relation.

(7-1) ‘Father of’ is a many-place predicate.

(8) Mankind is a kind.

(8-1) ‘Man’ is a common noun.

그러나 카르납의 번역은 언어적 보편자에 개입하게끔 한다. (5-1)의 ‘Courageous’는 개별 발화/필기가 아니라 그러한 개별어들의 유형어이다(type-token distinction). 그런데 유형어란 개별어에 의해 예화되는 일종의 언어적 보편자이다. 따라서 카르납의 이론은 비언어적 보편자에 대한 개입을 언어적 보편자로 바꿔둔 것이며, 진정한 유명론이라 보기 어렵다.

또한 카르납의 분석은 개별 언어간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

(5*) 용기는 덕이다.

(5*-1) ‘용감한’은 덕 술어이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의 번역이기 위해선 두 문장이 말하는 바가 같아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바가 같으려면 두 문장은 같은 것에 대해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5-1)과 (5*-1)은 서로 다른 대상, ‘Courageous’와 ‘용감한’에 대한 주장이다. 결국 카르납의 분석에 따르면 (5*)은 (5)의 번역이 될 수 없다.

셀라스는 분배단칭용어(distributive singular term) 개념과 점표(dot quatation)를 도입하여 카르납에게 제기된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한다.

(9) The American citizen has freedom of speech.

여기서 주어 “The American citizen”은 종으로서의 미국 시민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갖는 것은 종과 같은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 미국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the K’의 형식을 갖추고, 보편자의 이름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개별 사례들에 대한 일반적 주장을 하도록 돕는 장치를 분배단칭용어라 하자.

셀라스는 (5-1) - (8-1)의 주어를 분배단칭용어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Courageous’”는 사실 “The ‘Courageous’”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5-1) - (8-1)은 언어적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 필기/발화에 대한 일반적 주장일 뿐이고, 이러한 번역문은 어떤 보편자의 존재에도 개입할 필요가 없다.

셀라스는 작은 따옴표가 언어적 표현을 지칭하는 용어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점표(dot quatation)를 도입하는데, 한 단어에 점표를 찍어서 어떤 일반명사를 만들도록 했다. 이 일반명사는 점표 내의 단어와 동일한 언어적 기능을 수행하는 각 언어권 내의 단어에 대해 참이다. 예컨대 ·인간·은 ‘인간’, ‘man’, ‘Mensch’, ‘homme’ 등에 대해 참이다. 셀라스는 점표를 이용해 추상지칭장치가 포함된 문장을 다음처럼 번역한다.

(5-2) The ·Courageous· is a virtue predicate.

(5-3) ·Courageous·s are virtue predicates.

이때 (5-2)의 주어는 분배단칭용어이므로 (5-3)처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로써 셀라스는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번역 불가능성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F·들을 ·F·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셀라스는 그것이 언어적 기능 혹은 역할이라 말한다. 그리고 언어적 역할에 관한 주장은 언어 규칙에 관한 주장으로, 언어 규칙에 관한 주장은 다시 언어 사용자에 관한 주장으로 분석될 수 있다. 결국 셀라스가 궁극적으로 개입하는 존재는 발화하고 필기하는 개별 인간들뿐이다. 다만 비판자들은 언어적 역할이 언어 규칙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주장과, 언어 규칙이 구체적 개체들을 지칭함만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실재론을 옹호할 것이다. 언어적 역할이나 언어 규칙에 대한 주장은, 셀라스가 말한 대로 개별 인간들로 환원되지 않을 경우, 어떤 보편자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트롭 이론

트롭 이론가들은 구체적 개체뿐만 아니라 속성 또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속성이 개체적이며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듯 다중 예화 엔터티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대 구름의 하양과 눈의 하양은 서로 다르다. 이때 두 속성이 다른 것은 완전히 동일한 무언가를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속성의 범주적 특성 때문, 다시 말해 속성은 본성 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자로 이해된 속성을 우리는 트롭이라 부른다.

트롭 이론가들은 다음에 의해 motivated되었다. 우리는 개체뿐만 아니라 개체의 속성에 주목할 수 있다. 그리고 적절한 형이상학적 설명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속성을 언급해야 한다. 내가 타지마할의 색에 주목할 때 나는 타지마할이나 언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속성을 존재론에 포함해야 한다.

한편 보편자로서의 속성은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며, 오직 구체적 개체로서의 속성만이 필요하다. 우리가 타지마할의 분홍색에 주목할 때 나는 보편적인 분홍색이 아니라 타지마할의 바로 그 분홍색에 주목하는 것이다. 나아가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두 세계 존재론 비판에 직면한다. 결국 문제만 일으키는 형이상학적 잉여물은 배제하고 트롭만이 구체적 개체와 함께 존재론에 포함되도록 motivated된다.

트롭 이론가들은 속성 일치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러 개체들이 어떤 측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그들이 유사한 트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롭들의 유사성을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는 세계의 기본적인 사실이다.

트롭 이론가들은 추상물 지칭 장치를, 앞선 두 유명론과 달리, 번역을 통해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보편자에 대한 것처럼 보이는 주장이 사실 트롭들에 대한 일반화된 주장이라는 식의 제거주의적 접근을 회피한다. 요새 트롭 이론가들은 대신 추상 단칭 명사가 유사한 트롭들의 집합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집합은 그의 원소와 예화 비슷한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보편자의 존재를 트롭 이론가들이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편자는 비순환적 동일성 조건을 제시할 수 없는 반면 집합은 원소들이 같으면 집합이 같다라는 명확한 동일성 조건을 갖는다. 그렇기에 집합을 존재론에 포함한다고 해서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유명론들 중 트롭 이론만이 집합 개념을 통해 추상물 지칭 장치를 분석할 수 있다. 만약 극단적 유명론에서 추상 단칭 명사가 구체적 개체들의 집합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사람임’과 ‘날개 없는 두 발 동물’이 동일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트롭 이론은 그럴 일이 없다. 두 추상 단칭 명사는 서로 다른 트롭으로 구성된 집합, 따라서 서로 다른 집합의 이름일 것이기 때문이다.

트롭 이론가들은 술어화 현상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주술 문장이 참인 것은 주어의 지칭체가 문장 내의 일반 용어에 대응하는 추상 단칭 명사을 이름으로 하는 트롭들의 집합에 속하는 트롭을 갖는 경우이다. 이때 트롭이 특정 집합에 속한다는 사실은 분석 불가능한 기본적인 사실이라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어떤 비판자들은 트롭 이론이 다음과 같은 잘못된 함축을 낳는다고 말한다. 한 추상 단칭 명사에 대응하는 일반 용어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참이 되지 않을 경우, 그러한 추상 단칭 명사들은 항상 같은 것(공집합)의 이름이다. 예컨대 ‘유니콘임’과 ‘그리핀임’은 그에 대응하는 일반용어를 만족하는 그 어떤 대상도 없고, 따라서 트롭도 없다. 결국 둘은 공집합의 이름이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니콘임’과 ‘그리핀임’은 엄연히 구별된다. 다만 트롭 이론가들은 이럴 경우 추상 단칭 명사가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결정적인 비판은 다음과 같다. 집합은 그의 원소를 필연적으로 가진다. 한 집합이 무엇인가는 그에 속하는 원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이름으로 하는 트롭들의 집합은 그의 원소를 필연적으로 가진다. 즉 아름다움이라는 트롭들은 그의 목록이 고정되어 있으며, 어떤 트롭도 여기에 추가되거나 제거될 수 없다. 따라서 아름다운 개체 또한 그 목록이 불변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분명 거짓이다. 결국 트롭 이론은 잘못된 함축을 낳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허구주의

이전까지의 유명론들은 보편자의 존재에 개입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을 번역함으로써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런데 허구주의는 애초부터 그러한 문장들이 모두 거짓이며, 따라서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러한 문장들이 허구적 이야기에 속하는 (10)과 같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10)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였다.

그러나 ‘용기는 덕이다’와 같은 문장들이 허구적 이야기의 요소라고 생각할 사람들은 허구주의자들밖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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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종이 닮는 것은 유전자인 DNA 때문이지요. 무생물이 유사한 이유는 원자가 동일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사실을 몰랐던 고대에는 보편자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논쟁꺼리가 되기 힘들지요.

특히 동일장소 점유 불가라는 논리는 언어 분석에서 발견되는 어색함 논리보다 한층 강한 원리이므로 언어분석으로 공격할 수 없지요.

그래도 유명론에 근거를 대야한다면 트롭이론은 과학자들이 인공언어를 도입할 때 사용하는 원리로 보입니다.

(1) 고대인들도 유전에 대해 모르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발생론> 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작성자분께서는 닮음이라고 말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과학적 이유와, 우리가 닮음 그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를 혼동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유전자나 DNA는 전자에 대한 설명이지, 후자에 대한 설명은 아닙니다. 참고로 보편자 실재론은 20 - 21세기 형이상학자들도 많이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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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좋은 리딩리스트가 있지요:Sider: abstract entities semi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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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