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

데이빗슨이 잘 지적한 것처럼, 통약불가능성은 '도식/내용'의 이분법을 전제하고서 성립합니다. 우리의 개념적 도식 바깥에 '감각자료'나 '소여'처럼 해석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해석되지 않은 무엇인가"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개념적 도식들을 비교할 수 있다는 개념 상대주의를 허용하게 되죠. 또 그 개념 상대주의를 극단까지 전개하게 되면, 개념적 도식들이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는 통약불가능성 논제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밖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라는 주제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통약불가능성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또한 크립키 식의 규칙 회의주의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가 이미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성취하고 있어서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중요한 논점 중 하나죠.

저 혹시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이기는 한데요. YOUN님께서 말씀하신데로 ‘통약불가능성’이 인간 고유의 인지‧언어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듯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 가 있어서 그것이 크게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모델링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들―예컨대 서로 다른 데이터·학습 구조를 가진 두 AI 시스템―사이에서도 (따지자면 전자회로 시스템이라는 형식의 일치가 있죠.) ‘패러다임 간 통약불가능성’ 같은게 YOUN님께서는 혹시 성립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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