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코팅엄은 과학이 삶의 의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확실히 과학은 인간, 우주를 포함한 사물이 왜 존재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이런 ‘왜?’를 “기계적 본질을 가진 기본 미세 구조라는 측면”(p.18)에서 해명하는 것이 17세기 이후 과학의 지배적 원리이다. 17세기의 데카르트와 18세기의 흄 모두 과학의 임무는 자연계를 측량하는 것일 뿐, 자연의 ‘궁극적 근원과 원리’, 자연 깊은 곳에 있는 ‘최종적 의도나 목적 추구’는 인간의 측량 능력을 넘어선다는 데 동의하며, 이런 과학의 기조는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히 유지되었다. 이와 반대로 스티븐 호킹 같은 현대 과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완벽한 통합이론을 이뤄낸다면 왜 우리와 우주가 존재하는 지에 대한 답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통합 이론은 “극소수의 포괄 법칙과 원리 안에 우주의 모든 관찰 가능한 현상들을 포함시키는 이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절대적인 통합이론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왜 그런 이론이 존재하는지, 왜 그런 통합이론 대로 우주가 존재하는지 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은 우리와 우주가 왜 존재하는 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칸트의 말 대로 ‘왜 우리와 우주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측량가능한 현상세계 바깥에 있어서, 그 해답을 인간이 알 수는 없는 것일까? 이에 코팅엄은 측량 가능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는 것들을 포착하는 일은 ‘종교’가 맡고 있음을 지적하며 종교적 해답이야 말로 삶의 의미 문제에 해답이 될 수 있다 주장한다.
”’인간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는 것은 종교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p.23)
코팅엄은 종교와 의미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무신론적 세계에서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인가?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이 없더라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헌신의 작용으로 우리 자신만의 의미를 구성해갈 수 있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신의 죽음 이후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한다 말한다. (“이러한 행위의 위대함이 우리에겐 너무 지나치게 위대한 것은 아닌가? 그 위대성의 가치를 보이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니체는 영원회귀의 신화를 제시하며, 무한한 회귀를 적극적으로 의욕하는 불굴의 의지와 삶에 대한 긍정을 통해 인간이 의미를 내부로부터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코팅엄은 니체의 견해에 반대한다. 프로타고라스 같은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임을 주장하고, 로티 같은 프로타고라스의 현대 계승자들은 인간의 규범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코팅엄은 모든 인간적 절차들이 인간이 아닌 어떤 ‘독자적 실재’를 직면해야만 함을 지적한다. 그 실재만이 인간적 절차 중 허용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가르고, 인간적 절차들은 이 실재에 직면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절차도 아무런 효용과 가치가 없다. 예를들어 주어진 토양에 식물이 잘 자라는가, 주어진 엔진이 다른 엔진보다 잘 작동하는가, 지구가 매년 태양을 공전하는 가 등에 대한 척도는 우리 인류가 아니다. 인간 학문의 목적은 이런 실재들을 발견하는 것, 혹은 그 실재들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코팅엄은 내부에서 의미를 생성하려는 니체의 시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인간이 혼자 의미를 창조할 수 있으며, 스스로의 확고한 단언만으로 객관적 근거가 있는 진리와 가치를 우회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함으로써 니체는 프로타고라스적인 오류에 위태롭게 접근하고 있는 듯 하다.”(p.35)
하지만 의미와 가치는 우리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가치는 우리의 결정과 믿음, 그리고 그 결정과 믿음의 토대가 되는 것(예를 들면 종교나 우리의 본성에 대한 근본 사실들) 사이의 일치와 관련되어야 한다. 단순히 인간의 결단만으로는 의미를 창조할 수 없다. 니체의 해법은 성립할 수 없으며, 강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다.
코팅엄은 의지만으로 의미를 생성할 수 없음을 지적한 후,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해답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기보단 인간이 수행하는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과 계획에서 의미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앨런이라는 골프 애호가는 비록 본격적인 의미에서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할지라도, 골프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골프’가 앨런의 삶의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앨런이 자신이 골프를 좋아한다는 것을 스스로 선호하고 선택했어야 한다. 두려움이나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앨런이 골프를 친다면,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에 대해 의심이 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의미가 불가피하게 평가적 담론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활동이나 삶이 의미가 있다고 묘사하는 것은 분명 그 활동이나 삶에 대한 인정 혹은 칭찬이다.”(p.38) 그런데 우리는 평가를 주관적 선호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가치판단이 단지 개인적인 선호를 의미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주관적인 선호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 사물들이 가진 ‘객관적 특징들’ 때문에 그것들에 가치를 두는 것이 전형적이다. 치료적 성질 때문에 약품에 가치를 두고 기분을 돋우기 때문에 음악에 가치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가치 판단은 전형적으로 임의적 선호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세상의 특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의미있는 삶과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삶이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선호가 아니라 지적 가능한 구체적 특징들 덕분이다.
그렇다면 어떤 활동이나 삶이 의미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단 의미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심오함이나 진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심오함이나 진지함은 의미 있는 활동이 ‘성취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 목표 없이 하는 일은 의미가 없지만 보다 목표를 세워두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의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자가 의미 있는 행동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어느정도 ‘투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행위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행위자가 해석해야 하고 일정한 방식으로 그 뜻을 파악해야 하는, ‘의미’라는 언어가 가진 의미론적 근거에서 나온다. 의미 있는 활동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반드시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하고, 거기에 대한 나의 해석에는 나 자신의 목적이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행위자가 자율적으로, 합리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투명하게 인식하는 것 만이 의미 있는 삶의 조건이라고 말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가령 우리는 부패한 정권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헌신적 고문 기술자의 삶이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특히 그 고문 기술자가 외부의 압력 없이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비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 말이다.
누군가는 의미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가령 비도덕적일지라도 어떤 성취를 이루어 냈다면 그 삶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고문 기술자와 달리 가족을 버리고 타히티를 가서 예술적 업적을 성취한 폴 고갱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세속적 인본주의가 제공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다원론적 설명이 지닌 문제가 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포괄적 체계나 이론이 없다면 의미 있는 삶이 반드시 따라야 할 규범적 유형이나 모범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의미 있는 삶은 행위자가 자신의 도덕 상태와 상관없이 단지 자기 것으로 만든 일정한 과업에 체계적으로 헌신하는 삶이라고 축소되어 버린다.” (p.47)
그러나 단순히 ‘일정한 과업에 체계적으로 헌신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인간적 삶은 도덕적 지위나 타인에 대한 영향력에 상관없이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과 상호 대화의 복잡한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타인을 기만하거나 해치고 이용하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 자각과 정서적 감수성을 차단하고 상호 대화를 그만 둘 때 이루어지는 ‘덜 인간적인’ 행동들이다. 나치 집단 수용소의 감시병 조차 근무 외적인 시간만이라도 정서적 교감과 상호대화 등 인간적인 교류가 필요했을 것이다. ‘덜 인간적인’ 의미 추구는 자멸의 위험이 명백하며, (서로간의 교류를 전제하는) 인간적인 조건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인간적 삶의 일관성 있는 모범이 될 수 없다.”(p.48)
따라서 의미있는 삶은 폐쇄적이기 보다는 (동료들과의 상호작용과 비판적 대화의 가능성에) 개방적인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삶의 유형이다. 인간에게 있어 의미 있는 삶은 ‘통합된 삶’이다. “통합된 삶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과제나 계획은 부모, 친구, 동료 혹은 시민으로서 해야 할 요구사항들로부터 영구히 차단된 채 추구할 수 있는 고립된 항목들이 아니다.” 심지어 고갱 같은 부도덕한 예술가들의 업적 조차 “인간 조건에 대한 파토스, 희극, 비극, 불확실성을 한층 강화된 비전으로 보여주는 바로 그 인간적 속성”(p.51)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통합적 삶의 개방성은 예술가의 삶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 종교 관념 역시 ‘인간 본성에 맞추어진 어떤 유형적 기준’을 제시해 그런 통합적 삶의 모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코팅엄은 의미있는 삶을 위해 종교적 관념을 옹호한다.
결론적으로 1장에서 코팅엄은 의미있는 삶을 위해선 인간 주관으로부터가 아니라 구체적인 토대가 필요함을, 그 토대는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개방성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 다음으로 코팅엄은 우주적 무의미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의 존재가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언젠가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버릴 것이란 사실은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적 크기에 그렇게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우주가 광활하고 우리는 작은 점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주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이다. 근대 과학적 우주는 우리에게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어느 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행성 전체와 지구인들이 파멸한다 해도 우주는 신경도 안 쓸 것이고, 그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즉 문제는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소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코팅엄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종교적 논의를 끌어들인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이후 근대 과학적 우주가 대두됐더라도 우주의 조화와 섭리에 대한 믿음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하고 선한 존재인 하나님은 전체 피조물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쏟고 계실 것이며, 지구가 생명이 살 수 있는 수많은 행성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논리적 장애물이 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변증자들이 증명했듯이 인간의 연약함, 고통의 존재 등도 하나님의 섭리적 우주에 대한 궁극적 반증이 될 수 없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 역시 섭리적 우주에 치명적인 반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맹목적이고 비인격적인 순수 기계 체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과 신의 의도가 공존하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섭리를 신뢰할 수 있고, 실재에 대한 종교적 해석에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은 상대 무신론자들만큼이나 세상에서의 끔찍한 고통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창조물 안에 일어나는 무서운 불행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기본적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방법, 그리고 고통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종교적 헌신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그들이 생명 그 자체의 존재 혹은 우주의 존재가 어떤 궁극적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은 만큼이나, 우리 주위의 파괴와 쇠퇴의 의미를 알아야 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것들은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최선을 다해 부정적 측면에 대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언어는 과학이 밝혀낸 경이롭고 복잡한 물리적 우주의 구조가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과학자들이 사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하면, 그렇게 확립된 사건과 과정들이 신성한 창조자의 권능과 목적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를 묻는 별개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p.76)
예를 들어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를 소외 시키는 근대 과학적 우주는 '우주는 선하며, 모든 피조물들은 신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표준적인 유대-기독교적 교리와 상충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과학의 논평자나 보급자들은 지구의 조건이 우연히도 생명에 적합하다는 식으로 인류 기원의 우연성을 즐겨 강조한다. 하지만 모든 복잡한 현상들이 전적으로 자연적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근대 과학의 대명제에 따르면, 태양의 수소가스에서 헬륨이 생성되고 은하가 평원형이나 구형의 성단을 이루는 경향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자연적 과정을 거쳐 발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류와 지구 역시 자연적 과정을 거쳐 발전했으며, 이는 인류와 지구가 존재하기 '적합한 조건'이 먼저 갖춰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적합한 조건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우주를 그 본질상 생명과 지능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코팅엄은 과학적 사실과 종교적 사실이 양립할 수 있음을 밝힌 다음, 실재에 대한 종교적 해석의 가능성이 ‘인간의 운명을 영구적인 도덕의 틀 안에 자리 잡게 해줄 성취 모델을 제공할 것’이며 이 모델에 따라 우리의 삶을 신의 ‘선한 창조 질서’에 맞추게 해줄 수 있다 주장한다.
- 반면 종교적 전망이 없는 삶은 의미를 추구하기 어렵다. 앞선 코팅엄의 토대론적 관점에 따르면, 그런 삶의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의 의미가 진화되어 온 인간 존재에 대한 우연한 사실들의 모음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우리 안에 가장 고결하고 가장 선한 것에 대한 표준적 이상을 구현해야만 한다.” (p. 108) 하지만 이런 경우 우리는 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소유한 일시적이고 취약한 성향 ‘그 이상’이라고 생각할 근거를 단순히 인간 본성에 호소해서는 얻지 못한다. 순수 사실적 입장에서 인간 본성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단지 유전자들의 맹목적이고 비인격적인 과정에 의한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 이상’을 제공해주는 것은 종교적 전망이다. 종교적 전망에서는 덕 있는 삶에 대한 강력한 초점 혹은 틀을 제공함으로써 의미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도덕적인 삶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게 해주는 삶이고, 여기에 종교적 차원은 인간의 본성이 인간 종이 우연히 소유하게 된 특성들의 집합 그 이상이고, 최고 존재자가 우리가 성취하기를 바라는 상태를 지시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 전망 안에서 우리는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고통을 우리의 본성을 심화시키는 요소로 파악할 수 있다. 스스로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그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열망을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 인간이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 영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가는' 전략은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들을 창조할 수 없다. 그리고 단지 스스로의 목적을 창안하는 것으로는 의미를 얻을 수 없다.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경이와 환희를 느낄 수 있는 인간적 능력을 체계적으로 배양하는 것, 동정과 공감, 그리고 타인과의 합리적 대화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을 개발하는 것에 우리 본성의 실현이 달려 있다. 그러나 연약함이라는 인간적 조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선을 지향하겠다는 합리적 결심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의 절대적 탄력성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를 지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소망의 빛 안에서 살아야 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믿음과 소망은, 그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처럼 과학적으로 확인된 지식의 영역 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성 훈련을 배양함으로써 우리가 그 믿음과 소망을 얻는다고 믿을 근거는 있다. 삶에서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선한 영성의 길이 그러하듯이 올바른 행동과 자기 발견,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으로 이르는 길이라면 그때 우리가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만약 종교의 주장이 참이라면,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는다. 삶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 감사하게도 진정 삶에 의미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p.15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