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울프와 삶의 의미 2

  1. 다음으로 울프는 어떤 활동이 객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논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편화, 기계화된 업무 같은 지루한 일들을 하며 살아간다. 삶의 의미를 주는 어떤 대상(활동)은 이와 반대로 ‘적절히 힘들고 어려우며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대상이 이를 충족시키는가? 먼저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 정치, 사회단체 참여 등 전통적인 시각에서 도덕적으로 가치 있다 판단되는 대상들이 있다. 그 외에도 예술 작품을 완성하거나 인류의 지적 자산에 기여, 환경 보호 등 인간 및 다른 생명체의 번영에 도움을 주는 일들이 있다. 설령 실질적으로 그런 도움을 주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역량을 키우는 일’은 가치가 있다.

사실 이런 활동들의 범위는 너무나 방대해서 그 기준을 정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울프는 앞선 논의를 참고해 ‘특정한 활동이나 과제가 행위자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 즉 주체의 태도와 적어도 부분적으로 독립된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울프의 이런 정의가 삶의 의미개념을 배타적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일에는 가치가 있고 어떤 일에는 없는지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울프가 가치 있다 주장하는 일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편향된 관점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런 우려를 가치에 대한 ‘엘리트주의’의 위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위협에 맞서 ‘어떤 일에는 가치가 있고 어떤 일에는 없는지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울프는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대답한다. ‘어떤 활동에 가치가 있는가?’란 질문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제시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 활동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우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교육, 경험, 문화적 영향력)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가치판단들은 언제든 실수를 범할 수 있고, 다양한 기준들을 접하고 경험의 범위를 확대하며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을 고쳐 나갈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가치를 담고 있는 대상들의 범위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의 가치 판단이 늘 잠정적이다.

과거의 가치는 점차 희미해져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치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추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 질문 자체에 대해, 어느 정도 합리적, 부분적, 잠정적, 일시적 대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에 대해 타당성과 일관성을 의심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p.84)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제기할 수 있다. 객관적 가치는 정말 존재하는가? 정확히 말해, ‘삶의 의미에 보다 적합하고 이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그렇지 못한 것들과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 자체’는 존재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 울프는 우리가 외적인 관점으로 한 사람을 들여다볼 때 의미 있거나 없는 삶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주체가 자신과 무관한 가치에 기여하고 있는가?’이다. 주체와 무관한 가치(비주관적 가치)는 은유적으로 신비하거나 개념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만 가치 있는 활동들(초콜릿 먹기, tv드라마 보기 등)과 그렇지 않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독자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들 – 이런 활동들은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을 구분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떤 활동이 삶의 의미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가치의 원천과 가치를 얻는 수혜자가 부분적으로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치 평가의 기준 역시 부분적으로는 주체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p.88) 수정된 성취 관점에 따를 때, 단순히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나 확신 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 활동을 하고 있는 자신은 언제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변호사는 비윤리적 기업을 변호하는 것을 고귀한 정의 실현이라 착각할 수도 있고, 어떤 작가는 자신이 이룬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삶에 의미가 없다 여길 수도 있다. 이런 가치 판단의 실수 가능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주체 독립적인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으로 울프는 가치의 형이상학에 관련된 문제를 고려한다. 울프가 가치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그녀가 가치가 초자연적 존재라거나 가치가 ‘세상의 구조 상의 존재’ – 가치가 주체의 가치판단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믿는 – 라는 주장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가치 판단에서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런 가치가 인간을 비롯한 의식적 존재의 욕구 및 능력과 근본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울프는 가치에 대한 극단적인 주관적, 객관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두 관점 사이에 존재하는 관점들도 애매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특정 대상의 가치가 평가자 집단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상호 주관적인 관점’은, 개인의 판단과 마찬가지로 집단의 판단 역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문스럽다. 또한 ‘이상적인 개인 및 집단의 가상적인 반응과 가치를 연결하려는 관점’은 “나와 내 동료, 나아가 국민 모두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상속 존재의 긍정적인 반응만으로 어떻게 그 대상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p.94) 의문스럽다.

따라서 울프는 가치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

나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치 있다고 ‘인정한’ 대부분의 활동이나 과제 속에 정말로 가치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쪽이다. 어떤 대상이나 활동 및 과제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있다면, 그런 느낌을 자극하는 특정한 가치가 그 속에 존재할거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 속에 도전 의식을 자극하거나, 대단히 아름답거나, 도덕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본다. (p.95)

누군가는 이런 울프의 입장에 구체적인 규범이 없다고, 혹은 의미 있는 활동을 규정하는 데 너무 신중하다고 답답함을 표하며 왜 이런 주제로 강의를 하는지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장에서 언급했듯이 삶에는 자기이익이나 도덕성 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가치’에 우리가 ‘이끌리기’ 때문에 행동하는 영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자기 이익의 영역에 포섭해 설명하려 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장애아를 입양하는 것은 장애아 보다 입양가족에게 더 큰 이익을 준다’는 식으로 입양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장애아를 입양하는 삶이 편안함과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어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는 삶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랑으로 장애아를 입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울프는 삶의 의미라는 영역에서 ‘사랑’이라는 가치 아래 자신의 삶과 아이가 관계를 맺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낀다는 설명을 제안한다.

또한 삶의 의미를 단순히 자기 이익의 영역에 포섭한 다음, 도덕성에 손을 들어주며 삶의 의미와 도덕성이 충돌할 때 도덕성을 따라야 한다는 것 역시 문제이다. 현대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자신의 저서 ≪공리주의 비판≫에서 칸트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공리주의자)보다 낫기는 하지만, 칸트주의자들 역시 문제가 있다. 충돌이 발생했을 때 “공정한 도덕성이 반드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주장은 행위자에게 반드시 합리적인 요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행위자가 살아가는 공명정대한 세상의 질서라는 명목 아래, 행위자가 자신의 주요한 관심 기반을 포기하는 선택이 완전히 불합리한게 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p.108)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윌리엄스의 지적이 어느정도 일리 있다고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데, 울프에 따르면 이들은 자기 이익과 삶의 의미를 동일시하여 자기 이익을 지키는 것 보다 도덕성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지적하다시피 삶의 의미와 자기 이익은 다르다. 삶의 의미는 우리 자신의 ‘행복’에 대한 기대가 불확실할 때조차 우리에게 살아갈 동기를 제공한다. 카뮈가 말했듯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갈 가치가 있다면, 또한 그것을 위해 죽을 가치도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선사하는 대상이나 활동은 우리가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며, 나아가 우리를 자아의 울타리로부터 끌어내 더 큰 공동체 혹은 세상에 긍정적인 방식으로 관여할 수 있도록 자극한다. (p.109) 따라서 삶의 의미를 위한 활동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열정을 바치는 대상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삶의 의미를 가져다 주는 활동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도덕주의자들의 판단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개인의 이익과 동일시하지만, 삶의 의미를 가진 사람은 단순히 자기 이익이 아니라 어떤 활동이나 목표에 독립적인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성을 선택하기 위해 내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주는 가치를 포기해야 한다면, 도덕성에 따른 동기 역시 그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었으므로)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왜 도덕성의 범주를 더 우위에 둬야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덕성과 삶의 의미가 충돌하는 딜레마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울프는 삶의 의미가 부분적으로 대상의 객관적인 가치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덕성과 삶의 의미의 딜레마를 새롭게 볼 수 있을 거라 주장한다. 가령 자녀를 일류 사립학교에 들여보내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관계의 가치, 자녀의 행복이라는 가치, 삶의 의미에 기여한다는 가치는 도덕성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제약을 받는다. 우리는 도덕성을 저버리기 보다는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계를 져버리기 보단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도덕성과 삶의 의미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이 모두 이런 식으로 분명하게 정리될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삶의 의미라는 개념이 무엇이 객관적인 가치를 가진지 확인하는 관심을 담고 있는 한 도덕적인 관심을 보충하고 강화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울프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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