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이데아를 인식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데아를 인식하는가

서론

일전에 이데아는 현실과 분리된 초월적 형상이 아니라고 생각 했고 이것을 전제로 좀더 발전시킨 사유를 적어 보았습니다. 이데아는, 어떤 실체로서 존재한다기보다 개념이 형성되는 층위, 혹은 개념이 머무는 구조적인 자리, 곧 구조로서의 실재를 가리키는 명칭에 가깝다. 세계는 일정한 법칙을 따르되, 그 법칙은 언제나 순수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이데아들 사이의 속성들이 섞여 표현된 결과이며, 그 혼합 속에서 우리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하고 개념을 구성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이데아가 존재하고 현상계가 그것들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섞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1부. 인식 구조의 분석

인식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대상을 전제로 한다. 하나만으로는 비교도, 구분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때 언제나 차이점과 공통점을 동시에 감지하고, 그 위에서 개념을 구성한다. 모든 것이 같다면 구분이 불가능하고, 모든 것이 다르면 범주화가 불가능하다. 인식은 언제나 차이점과 공통점이 존재 할 때 가능하다.

나는 이데아의 인식 난이도가 ‘분리도’에 비례한다고 본다. '분리도'는 정보를 구성하는 구성 요소의 수와 이항 대립 정도로 이루어져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정보의 구성이 단순할수록 비교해야 할 요소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인식은 빠르고 안정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있다 / 없다”처럼 이항 대립이 명확한 경우, 경계가 선명하게 설정되어 분리도가 높아진다. 반대로 상위 개념일수록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체가 되기 때문에, 경계가 흐려지고 분리도는 낮아진다. 결국 우리는 분리도가 높은 정보일수록 더 빠르고 정확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

또한 이데아 인식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적적인 과정이기에, 우리는 다양한 표본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그 안에서 유사한 구조를 감지하고 구분하면서 개념을 정제해 나간다. 이러한 행위를 우리의 지식과 이데아의 일치율을 높이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한편,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며, 어떤 지식이 언어로 표현되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는 수신자가 언어를 받아들이고, 사고 속에서 그 정보를 처리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그래서 인식은 언제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 했을 때 이 비교는 수용자가 이미 갖고 있는 기존 지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정보라도 분리도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같은 문장을 접하더라도, 누군가는 즉시 구분하고 이해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모호함 속에 머무르는 이유 이다.

또한 분리도와 마찬가지로 언어역시 이데아 난이도에 기여한다. 쉽게 인식 가능한 개념일수록 명명이 먼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아, 일반적으로 구조가 단순하고 익숙한 단어일수록 더 높은 분리도를 갖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에서 단어 선택의 정밀함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표현의 정확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단어가 개념을 얼마나 선명하게 분리해주는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겠다.


2부. 생물학적 기반과 존재 조건

우리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지 철학적 능력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생물학적 필요가 있었다. 바이러스처럼 물리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들은 인식 능력을 갖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은 다르다. 물리적 제약이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이들에겐 외부 세계를 감지하고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감각 기관과 신경계, 그리고 뇌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는 이 시기를 인식의 1차 개화라고 본다.

이후 인간은 다시 한 번의 진화를 경험한다. 인간은 동물들과의 경쟁 속에서 더 고차원 적인 인식 능력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했고. 이것이 우리가 이데아를 인식 가능한 이유이다.


요약

이데아 - 개념이 존재하는 층위 그 자체 혹은 그것을 이루는 진리들
이데아의 인식 조건 - 공통점과 차이점의 존재와 그것들을 분별 할수 있는 인식 능력
인식 능력이 존재하는 이유 - 진화의 산물이자 생존 전략
이데아의 존재 증거 - 초월적 실체 X 이므로 인식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존재의 증거

+근데 적다보니까 플라톤은 실제로 이원론적 세계관을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 했다고 본게 맞다는 주장에 기울어짐과 동시에 오히려 제 생각이 구체화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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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굿입니당ㅎㅎ

우리가 어떻게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을 때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과적 설명은 보통 피설명항의 존재가 문제시되지 않는 맥락에서 요청됩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는 현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요청할 때 아무도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을 때 우리는 피설명항인 이데아의 존재를 의문시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는 수사적인 의문문으로서 일종의 이데아 이론가들에 대한 도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도전은 다음과 같은 논변의 형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우리는 나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2) 만약 이데아 이론이 옳다면, 우리는 오직 나무-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한하여 나무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3) 하지만 우리는 나무-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4) 따라서 이데아 이론은 잘못되었다.

다시 말하면 위 질문은 최소한 (3)의 직관적 호소력을 지적함으로써 (이데아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데아는 비물리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등등) 이데아 이론가들에게 어떻게 나무-이데아에 대한 지식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라고 도전하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데아에 대한 지식 획득 능력에 대한 인과적 설명 혹은 진화론적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인과적 설명 혹은 진화론적 설명이 나무에 대한 지식 획득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나무에 대한 지식 획득 능력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어떻게 나무에 대한 지식 획득 능력이 나무-이데아에 대한 지식 획득 능력과 같은 것에 의존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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