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내게 다시 처음부터 말해 주게. 그리고 내가 묻는 그대로가 아니라 나를 흉내 내서 대답하게. 이 말을 하는 건 바로 내가 처음에 말했던 대답, 저 안전함 외에도 내가 방금 말한 것들로부터 또 다른 안전함을 보고 있어서라네. 만일 자네가 나에게 무엇이 몸 안에 생겨나면 그것이 뜨거워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저 안전하고 무식한 답, 즉 뜨거움을 대지 않고, 방금 이야기된 것들을 바탕으로 좀 더 세련된 답, 즉 불을 댈 것이거든. 또 자네가 무엇이 몸에 생겨나면 병이 드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병이라고 말하지 않고 열이라고 말할 걸세. 그리고 무엇이 수에 생겨나면 그것이 홀이 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홀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라고 말할 걸세. 자, 이제 내가 원하는 바를 자네가 이제 충분히 이해했나 보게.”
-『파이돈』중 105c에서 -
- 잡념에 가까운 글입니다 피드백. 비판, 그리고 비난도 환영합니다.
- 인용문은 모두 아카넷 판, 『파이돈』을 참조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돈』만큼 널리 읽히면서 자주 오해되는 책 또한 없을 것이다. 이는 실상 철학을 학문으로서 공부하지 않는 일반 대중에게 뿐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그러하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이 책을 그리고 나아가 플라톤을 어떤 종교적인(기독교적 의미에서 초월적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인데, 특히 『파이돈』의 극적 배경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측면과 결합하며 그 오해는 더욱 지독해지고 또 철저해진다. 즉,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극적 배경에서 따라나오는 논의의 맥락으로부터(예컨대 영혼 불멸이나 상기) 이 책이 마치 사후세계나 전생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혹은 어떠한 영생에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해하곤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파이돈』을 이런 식으로 읽는 순간 우리는 플라톤을 그리고 나아가 그리스 철학 전체를 전적으로 오해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플라톤이 약 2500년전 사람이라고 하여 그들이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어떤 초월적인 무언가에 대한 사고를 보다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이들이라, 혹은 어떤 신비주의적 사고를 가졌던 이들이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편견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그리스에는 파르메니데스가 그의 시에서부터 철저한 논변과 배중률의 기초를 제시했었으며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론하면서 주장했던 것 중 하나는 자신을 '신을 믿지 않고'라는 죄목으로 고소할 것이라면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무신론적 내용을 담은 아낙사고라스의 책부터 비난해야 할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생각해볼 때, 고대 그리스의 철학 나아가 플라톤의 철학을 어떤 종교적인 측면 혹은 초월적인 측면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미리 전제하여 읽는 것은 오독의 위험을 크게 증가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오해가 오해라는 것을 어떻게 명확하고 쉽게 보여줄 수 있을까? 나는 한가지 방법은 실제로 책을 읽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파이돈』에서의 세련된 원인 논증은 플라톤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에 좋은 전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탐구 방법에 대한 명시적 규정 또한 행하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소위 "마지막 논증"이라고 불리는 96a에서부터 107b까지의 논증을 매우 간략하게 알아보자.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지적 여정을 설명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논증은 원인(aitia)에 대한 논의이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젊었을 적에 나는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탐구라 부르는 바로 그 지혜를 굉장히 열망했다네."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자연철학자들의 원인론에 어떠한 견해를 갖는지를 밝힌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자들의 원인 설명이 충분하지 않않음을 밝힌다. " 아까는 서로 가깝게 모아져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더해지는 것이 원인이었는데, 이번에는 떼어 내져서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떨어지게 되는 것이 원인이니 말일세."를 그 이유로서 말이다. 이는 즉, A는 b,c,d가 서로 더해져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류의 주장에 대한 반대인데, 왜냐하면 한 개와 한 개를 서로 더해져서 두 개를 만들었던 것이 한 개를 둘로 나누어 두 개를 만드는 경우 두 개의 원인이 서로 더해짐, 서로 나누어짐으로 반대되는 두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소크라테스가 향한 곳은 아낙사고라스의 방법이었는데, 이는 "모든 것들을 질서 짓고 그것들의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지성이라는 거야."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곧 소크라테스는 큰 실망감을 얻게 되며 그 이유는 그가 보기에 아낙사고라스의 방법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철학자들에게 소크라테스가 가졌던 불만과 이어져 있다. 특히 "지성은 모든 것을 질서 짓는 데 있어서 각각의 것을 최선의 방식으로 질서 짓고 위치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네."라는 발언에서 우리는 그의 불만이 무엇이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언가를 최선을 상태로 그럴수 밖에 없게 하는 원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측면의 불만이었으며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가 그러한 충분하고 단독적인 원인 개념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이미 『국가』의 '태양'의 관점을 선취하고 있다고 해석하지만 이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 모든 것에 실망하고 소위 "두 번째 항해"라고 불리우는 방법론적 전회(methodological turn)를 감행한다.
"그래서 나에겐 말(logoi)들에로 도피해서 그것들 속에서 있는 것들의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이는 단순히 파이돈에서의 플라톤의 탐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닌 이후 플라톤의 탐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핵심적 어구다. 플라톤은 사태를 탐구하는 방법론이, 혹은 감각만을 이용한 탐구가 가장 주요한 원인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선택한 방법은 '말', 즉, Logos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 개념이 엄청난 개념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이유가 없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말'은 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던 일상어에 다름 없다. 플라톤은 바로 그것에서부터 우리의 탐구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론적 전회 이후 플라톤은 자신의 탐구에 있어 규범이 될 또 한가지 방법론을 제시한다.
"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식으로 시작했네. 매번 내가 가장 강하다고 판단하는 말을 가정한 다음, 이것에 부합한다고 내게 생각되는 것은, 원인들에 대해서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건, 참인 것으로 놓고, 그렇지 않은 것은 참이 아닌 것으로 놓네."
이 또한 플라톤의 핵심적인 방법론을 표현하는 어구이며 결론부터 말하여 이는 현대의 가설연역적 방법과 매우 유사한 방법론적 절차를 표현한다. 다시말해, 가장 강력하게 참이라고 생각되는 주장을 가설로서 '가정'하고 이후 그에 따른 논의를 진행하며 그 논의가 정당하게 참인 결론에 이른다면 가정 또한 참이 되는 류의 방법을 제시한다.(물론 이는 정확하게 이 어구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자신의 방법론이 어떠할지를 제시한 이후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원인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 아름다움에 의해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답다고 대답하는 것은 안전한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다음과 같다. 예컨대 'painting is beautiful''이라고 해보자. 여기서 painting 이라는 주어는 beautiful이라는 술어에 의해 '서술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painting이 피정의항이라면 beautiful은 정의항으로 painting은 beautiful의 의미에 종속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술어가 명사에 비해 선행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beautiful이라는 것이 그것이 서술하는 명사를 beautiful하게 만드는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정확하진 않지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 때문에 아름답다 왜냐하면 아름다움 것은 아픔답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동어반복적 문장이 항상 참임을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소크라테스가 이것이 '세련된 원인'이 아닌 "단순하고, 우직하고, 아마도 순진하게" 그리고 "무식한" 답 혹은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알아 둘 것은 여기서 약간의 추가적 전제가 작동하고 있는데, beautiful itself is beautful, 이라는 문장이 가능하다는 self-predication이 가능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후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그 가정 자체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자네는 그를 내버려 둘 것이고, 저 가정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들이 자네가 보기에 서로 부합하는지 어긋나는지를 고찰할 때까지는 답하지 않을 걸세."라는 말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한 것이 어디까지나 '가정'이며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결론이 부합하는지를 보고서 그 가정이 정당한지를 파악하고자 할 것임을 다시금 밝힌다.
(이어지는 "하지만 자네는 반론꾼들처럼 그 출발점과 그것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들을 동시에 논의함으로써 뒤죽박죽을 만들지는 않겠지?"라는 문장은 문득 서강올빼미에 올라온 '학생은 지금 저의 논의를 망가뜨리고 있어요'라는 글이 떠오른다")
다음의 논변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성상' 그러한 것과 '우연히' 그러한 것에 대한 구분이다.
"하지만 자넨 이렇게 생각하기는 할 거라 생각하네. 눈은 결코,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뜨거움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바로 그것이었던 것일 수, 즉 눈이면서 뜨거운 것일 수 없으며, 뜨거움이 접근해 오면 피하거나 소멸할 것이라고 말일세."
“그럼 이런 것들 중 몇몇에 대해서는, 오직 형상 자체만이 그것의 이름을 영원히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상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이 있을 때면 늘 그것의 꼴을 항상 가지는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이군."
즉, 소크라테스는 불과 같은 명사는 항상 뜨거움이라는 술어를 가져오고 그 뜨거움이라는 술어가 불이라는 명사를 점령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불을 점령함으로 차가움이라는 술어는 그것을 점령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은 뜨거움을 본성상 가진다는 말의 의미를 형상, 즉 술어와 개체, 즉, 명사의 상시적 연결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핵심적인 구분으로 곧바로 이어질 세련된 원인 논증의 가장 주요한 전제로서 작동한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의 논변은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만일 자네가 나에게 무엇이 몸 안에 생겨나면 그것이 뜨거워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저 안전하고 무식한 답, 즉 뜨거움을 대지 않고, 방금 이야기된 것들을 바탕으로 좀 더 세련된 답, 즉 불을 댈 것이거든."
을 제시한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 앞서 이야기한 본성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A라는 술어는 때때로 본성상 a라는 명사에 관계된다. 그리고 a에는 바로 A에 의해 ~A가 연결될 수 없다. 이 때, ~A가 아닌 B,C,D는 본성적인 술어들이 아니고 우연히 a를 점령하는 술어들로 상시적으로 a와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c is A에서 c의 가장 충족적이고 유일한 원인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바로 위와 같은 분석에 의해 그것이 a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c is A beacause a is always A로 a는 상시적으로 A와 붙어있고 c가 A와 연결된다면 a와도 연결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말하는 것이다. 어떤 개체 속 뜨거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안전하고 무식하지 않으며 세련된 대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로써 세련된 원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변은 일단 마무리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겐 숙제가 남겨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저 논변이 제시하는 세련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즉, 어떠한 형식으로 정리될 수 있는가? 또한 그것은 성공적인가 실패했는가? 이에 대한 해석은 추후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