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죽음에 이르는 병> 제1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1.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사실’ 에 있는 부분(거의 첫부분)입니다.

아래 발췌해왔습니다.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그런 관계, 즉 자아는 스스로 정립(설정)한 것이거나 혹은 타자에 의해 정립되어진 것 중 어느 하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가 타자에 의해 정립되어질 경우 - 물론 그 관계는 제3자이다- 그 관계는 다시 한 번 전체 관계를 정립한 것에 관계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런 파생적인 정립 관계가 바로 인간의 자아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관계함과 동시에 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계하는 관계이다. 따라서 본래적인 절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자아가 스스로 자기를 정립했다고 하면 절망의 첫째 형태, 즉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는 형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원하는 형태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며칠을 고민해봐도 독해가 되지 않습니다ㅠㅠ

  1. 저는 ‘자아란 자신이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관계’라는 말을 ‘나’가 필연성과 가능성 등의 종합 관계라는 것을 깨달을(관계할) 때 비로소 ‘나’, 즉 자아가 된다고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일까요..?

  2. 위 발췌해온 부분에서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가 타자에 의해 정립되어지는 경우에서 타자를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그런데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가 타자에 의해 정립되어질 경우 - 물론 그 관계는 제3자이다 - 그 관계는 다시 한 번 전체 관계를 정립한 것에 관계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부분을 “신이 자아를 설정하는 경우 나와 종합의 관계(자아)가 다시 신(타자)과 관계(설정)하여 정립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4. ”인간의 자아가 스스로 자기를 정립했다고 하면 절망의 첫째 형태“ 부분이 의문입니다.

저는 처음에 ’따라서‘라는 표지가 있기 때문에 본래적인 절망이 하나는 ’자기 자신에 관계함‘에 대한 절망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에 관계함’에 대한 절망이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음 문장에서 ‘인간의 자아가 스스로 자기를 정립했을 때의 절망을 말합니다…

의문이 드는 이유는 이제까지 타자가 자아를 정립한 경우를 말하고 있었고 ’이런‘, ’그것‘, ’따라서‘라는 표지로 문장을 잘 이어오다가 갑자기 자기 스스로 정립한 경우를 말하니까 ’이게 뭐지?‘ 싶은 겁니다..

  1. (마지막 문장)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원하는 형태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도 본래적인 절망의 한 형태임에도 왜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ㅠ

위 1), 2), 3), 4) 5)에 대한 답을 해주실 분 계신가요 ㅠㅠ?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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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키르케고르를 읽을 때 느꼈던 바대로 답변을 드려보겠습니다. 엄밀하게 학계 내에 통용되는 독법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1. 말씀하신대로 키르케고르에게 자아란 "영과 육, 가능성과 필연성, 무한성과 유한성 등의 '변증법적 종합'"이 맞습니다. 이 종합 양상을 깨닫지 못하는 이는 절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신을 가능성으로만 파악하려는 허황된 인간이나, 필연성으로 파악하려는 운명론자의 방식 대로요. 그러나 자아의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상태'에 놓인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2-3. 이때 타자를 꼭 '신'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키르케고르가 절대타자로서의 신을 이야기하고, 그 개념은 몹시 중요하지만, 『이것이냐 저것이냐2』, 즉 '윤리적 실존' 단계에서 서술되는 타자들은 평범한 세인으로서 타자들입니다. 이를테면 결혼 상대라던지, 같은 법률을 따르는 시민들이라던지요. 글쓴이께서 궁금해하는 맥락에서 타자를 '남들',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일반'으로 이해해보면, '나를 남에 의해 정립하는' 수동적이고 (타자) 의존적 자기에 대한 서술로 읽어볼 수 있습니다.

4-5.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절망은 불가피합니다. 마치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듯 생각하기 쉽지만, 절망은 '빠질 수밖에 없기도'하고 동시에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절망하는줄 모르고 절망하고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절망해야지만 (이건 일종의 '결단'입니다)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죠. 그리고 '종교적 실존' 단계도 항구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자의든 타의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절망하여 남에게 귀속되거나, 포기하여 허무에 빠지거나, 쾌만 추구하거나 하지 않고 '절망한채 자기 자신으로 있음'은 실존으로서 최선의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행복하다거나 살기 쉬운 단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개인으로서 자아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상태임은 분명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의 괴로움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용기와 결단력을 강조하는 맥락을 많이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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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비전공자이고 철학책을 몇 번 읽어보지 않아서 저에겐 난이도가 좀 높은 것 같네요. 주신 답변을 천천히 잘 읽어보겠습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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