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강의』 (아카넷, 2010.)
서론
이 책에선 형이상학을 존재로서의 존재(being qua being)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파악한다.
형이상학 내에서의 주된 논쟁은 범주에 대한 논쟁이며, 이는 곧 1) 어떤 범주의 엔터티가 존재하는지, 2) 어떤 범주의 엔터티가 다른 범주의 엔터티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제1장 보편자 문제 I: 형이상학적 실재론
실재론자들의 주장)
속성 일치 현상(phenomenon of attribute agreement)은 보편자 때문에 나타난다: a부터 n까지의 대상들이 속성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그 대상들이 사물 Φ와 관계 R을 맺기 때문이다. (e.g. 여러 예술 작품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아름다움’이라는 형상Form에 참여하기partake 때문, 혹은 그들이 ‘아름다움’이라는 보편자를 예화하기exemplify 때문)
실재론자들의 존재론)
개체(particulars): 시공간 속에 자리하는 구체적 대상들, 반복적이지 않은 엔터티
보편자(universal): 다른 엔터티에 의해 드러나는(exhibit) 엔터티, 반복적인 엔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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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항 보편자(monadic/one-place)::) 개체들이 개별적으로 예화하는 보편자, 종kind/속성prop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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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항 보편자(polyadic/many-place): 개체들 여럿에 의해 예화되는 보편자, 관계relation
※ 종과 속성은 모두 단항 보편자이지만, 어떤 철학자들은 다음처럼 이들을 구분하려 한다. 종은 개체화하는(individuative) 보편자로서, 그 종에 속하는(belonging to) 원소들을 다른 개체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개체로서 구성한다. 반면, 속성은 그 속성을 소유하는(possessing) 개체를 꾸미거나 특징지을 뿐이다.
나아가 보편자는 일반성 면에서 위계를 갖는다(e.g. ‘개’보다 ‘포유류’가 더 일반적임). 이렇게 생각하면 속성 일치 현상에서 나타나는 정도의 차를 설명할 수 있다. 개체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보편자가 더 특수하고 규정적일수록 속성의 일치는 더 긴밀하다.
**또한 보편자들끼리 속성의 일치를 보일 수도 있다.**다시 말해 보편자가 상위의 보편자를 예화하기도 한다(e.g. ‘노랑’과 ‘초록’이라는 속성들은 ‘색’이라는 종에 속한다).
술어화와 추상물 지칭)
실재론자들은 실재론만이 주술 담론 현상(phenomena of subject-predicate discourse)과 추상물 지칭 현상(phenomena of abstract reference)을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술어화와 추상물 지칭은 실재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인 동시에 실재론을 옹호하는 근거인 것이다.
(1) Socrates is courageous.
(2) Plato is courageous.
실재론자들은 주술 문장의 진리 조건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주술 문장의 술어는 보편자를 지칭하며(refer), 문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주어가 지칭하는 개체가 술어가 지칭하는 보편자를 예화해야(exemplify) 한다.
a) 한 주술 문장이 참이기 위해서 그 문장의 언어적 구조와 세계의 비언어적 구조가 대응해야 한다는 점은, 술어가 주어의 지칭체와 연결되는 어떤 엔터티를 지칭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즉 문장이 참이기 위해 주어와 술어는 각자 비언어적 대상을 지칭하며, 지칭체들은 문장이 말해주는 방식대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에 의하면 문장 (1)이 참이기 위해 “Socrates”는 물론 “courageous” 역시 어떤 비언어적 대상을 지칭해야 하며, 그 대상은 소크라테스와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b) 또한 술어가 여러 개체들에게 적용되는 일반 용어(general term)라는 점은 술어의 지칭체가 반복적 엔터티임을 드러낸다. 우리가 문장 (1)의 “courageous”를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말하려는 바와 문장 (2)의 “courageous”를 통해서 플라톤에 대해 말하려는 바는 같다. 마찬가지로 다른 문장들에서 사용되는 “courageous”들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여러 “courageous”들은 동일한 엔터티를 지칭하여, 그러한 반복적 엔터티(보편자)가 문장의 주어가 지칭하는 개체와 어떤 관계(예화)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그 문장의 참 · 거짓이 결정된다고 자연스럽게 결론지을 수 있다.
여기서 술어와 보편자 사이의 지칭관계는 단순히 이름과 이름의 보유자 간의 관계가 아니다. 어떤 용어가 어떤 엔터티의 이름이라면, 그 용어는 문장의 주어 자리에 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장 (1)의 “courageous”는 주어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해당 보편자의 이름은 “courage”일진대, 이는 또 문장의 술어 자리에 올 수 없다. 기저에 놓인 의미론적 문제가 있다. 이름은 그 이름의 보유자만을 가리키는 단항 용어(singular term)인 반면 술어는 일반 용어이다. 술어는 따라서 여러 대상들과 관계를 맺으며, 의미론적 용어로는 대상들에 대해 참이며 대상들에 의해 만족된다.
대신 많은 실재론자들은 술어가 보편자를 표현하거나(express) 의미하는(connote) 방식으로 보편자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문장 “a is F.”는 “a exemplifies F-ness.”와 같이 번역될 수 있고, “F-ness”는 보편자의 이름이다. 이렇게 술어 “F”는 보편자를 담론 안에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보편자를 지칭한다. 실재론자들은 이렇게 이름 관계에 기반한 지칭 관계를 표현/의미 관계라고 이르겠다는 것이다.
(3) Courage is a moral virtue.
(4) Some species are cross fertile.
실재론자들은 추상 단칭 용어(abstract singar term)가 포함된 문장의 진리조건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추상 단칭 용어는 보편자의 이름이며, 추상 단칭 용어가 포함된 문장이 참이기 위해선 그 용어를 이름으로 삼는 보편자가 현실적으로(actually) 존재해야 한다.
추상 단칭 용어가 보편자의 이름이 아니라고 가정하거나, 추상 단칭 용어의 지칭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그 용어가 포함된 문장이 참임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Courage”가 보편자의 이름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앞서 들었던 언어적 구조와 비언어적 구조의 대응 논제에 의해, 문장 (3)의 참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Courage”가 지칭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지칭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문장 (3)이 참임을 설명하기 어렵다. 없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 어떻게 참이 될 수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추상물 지칭 현상은 추상 단칭 용어를 포함하지 않는 문장들에서도 나타난다. 문장 (4)는 “인류”와 같은 추상 단칭 용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4)가 참이기 위해서는 이종 교배가 가능한 어떤 종이 존재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보편자가 존재해야 한다.
추상물 지칭 현상에 대한 실재론적 설명이 술어화에 대한 실재론적 설명에 선행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추상물 지칭을 설명할 때 우리는 술어에 대한 어떤 이론도 차용하지 않았다. 반면 술어와 보편자의 지칭 관계를 정당화할 때 실재론자들은 “F-ness”가, 다시 말해 추상 단칭 용어가 보편자의 이름 역할을 수행한다고 가정했다.
또 실재론자들은 실재론의 설명만이 성공적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 진영인 유명론자들의 설명이 정말 성공적이지 못한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실재론에 부과되는 제약-예화)
**무제약적 실재론은 역설과 무한 퇴행을 일으킨다.**다시 말해 모든 속성 일치 현상마다 서로 구별되는 보편자를 상정하려는 시도나, 모든 술어와 모든 추상 지칭 용어 각각이 서로 구별되는 보편자를 지칭한다는 주장은 역설과 무한 퇴행에 직면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역설은 러셀의 역설과 유사하다.“자기 자신을 예화하지 않는다”라는 술어 P1을 생각해보자. P1이 술어 기능을 하는 참인 주술 문장이 존재한다(“빌 클린턴은 자기 자신을 예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제약적 실재론은 P1이 지칭하는 어떤 보편자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를 U1이라 하자. 이때 U1은 자기 자신을 예화하는가? 만약 U1이 자기 자신을 예화한다고 가정하면, U1은 자기 자신을 예화하지 않는다. 반대로 U1이 자기 자신을 예화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U1은 자기 자신을 예화한다. 따라서 역설이 발생한다. 역설을 피하기 위해서는 P1이 보편자를 지칭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실재론에서 발생하는 첫번째 무한퇴행은 속성 일치에 관한 것이다. 여러 대상들이 모두 F라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가정하자. 실재론자들은 이를 그 대상들이 F-ness를 예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다른 속성 일치를 마주한다. 이 대상들은 모두 F-ness를 예화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따라서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F-ness를 예화함이라는 보편자를 이들 대상이 예화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무한히 이어지고, 설명은 끝나지 않는다.
두번째 무한퇴행은 주술 문장에 관한 것이다. 실재론자들은 “a is F.”가 참이 되는 것은 “a exemplifies F-ness.”이 참일 때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무제약적 실재론에 따르면 술어 “exemplifies F-ness”는 어떤 보편자 U(F-ness를 예화함)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a exemplifies F-ness.”가 참이 되는 것은 “a exemplifies U.”가 참일 때라고 설명하게 된다. 이 과정 또한 무한히 이어지고 설명은 끝나지 않는다.
세번째 무한퇴행은 관계에 관한 것이다. 실재론자들은 a가 F인 것은 a가 F-ness를 예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예화는 a와 F-ness라는 엔터티 사이의 이항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a가 F-ness를 예화하는 것은 a와 F-ness가 예화라는 관계를 예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 예화는 a와 F-ness와 이 둘 간의 예화를 연결하는 삼항관계이며, 마찬가지의 논리로 과정이 무한히 이어진다.
실재론자들은 무한퇴행을 나쁘지 않은 것으로 여겨 무제약적 실재론을 유지하기도 한다. 무한퇴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무한한 과정 중 첫째 과정을 통해서 문제의 현상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러 대상들이 F인 것이 그들이 F-ness를 예화하기 때문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것으로 속성 일치 현상을 충분히 설명한 셈이다. 이때 그 대상들이 F-ness를 예화함을, 설명하고 싶다면 설명할 수도 있겠다만, 우리가 또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또는 무한퇴행을 나쁜 것으로 여겨 예화가 비관계적이라는 주장을 통해 이를 피해가기도 한다. 관계는 예화라는 매개적 고리를 통해 대상들을 묶을 수 있지만, 예화는 무매개적 사슬, 그들의 용어로 묶음(tie) 혹은 결합(nexus)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a가 F인 것은 a가 F-ness를 예화하기 때문이겠지만, a가 F-ness를 예화하는 것은 a와 F-ness가 그 예화를 예화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러한 대처는 앞서 제기된 역설도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
실재론에 부과되는 제약-기본적인 술어와 정의되는 술어)
실재론에 부과되는 또다른 제약은 잉여적 속성을 존재론에서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총각”이라는 술어에는 총각이라는 속성이 대응할진대, 이는 어떤 사물이 남성이라는 속성, 인간이라는 속성, 결혼하지 않았다는 속성을 예화할 때에만 그 사물에 의해 예화된다. 그런데 총각인 사물이 이 3개의 속성들에 총각이라는 속성을 더해 4개의 속성들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선택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어떤 속성은 잉여적이고, 존재론에서 덜어내는 편이 나아 보인다.
어떤 실재론자들은 정의되지 않는undefined, 기본적인primitive 술어들만이 그에 대응하는 보편자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정의되지 않는 술어들은 다른 술어들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반면 그외의 모든 술어들, 즉 정의되는defined 술어들은 다른 술어들에 의해 정의된다. 이중 정의되지 않는 술어만이 보편자와 직접적으로 연계한다.
이 제약에 가해지는 첫째 문제는 술어의 구분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론틀에서는 정의되는 술어였던 것이 다른 이론틀에서는 정의되지 않는 술어일 수 있다. 따라서 술어의 구분은 이론틀의 자의적 결정에 의존한다. 하지만 어떤 보편자가 존재하는지를 결정하는 술어의 구분이 자의적이어선 안된다. 경험론자들은 인식적으로 기본적인 측면을 표현하는 술어들이 정의되지 않는 술어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술어의 구분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했다. 다만 인식적으로 기본적인 술어들이 과학의 이론적 술어들과 윤리적 술어들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경험론은 큰 타격을 입었다.
두번째로 이 제약은 기본적이지 않은 모든 술어가 다른 술어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는 의심스런 전제에 의존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 많은 술어들은 “총각”과는 달리 느슨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술어들에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여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체주의자들은 두 가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술어의 구분을 폐지하고 “예화”를 제외한 모든 술어가 그에 대응하는 보편자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기본적인 술어들은 옳은 물리 이론을 형식화하는 데 필수적인 술어들이다. 그렇다면 비물리적인 술어들은 존재론적으로 어떤 지위를 갖고 또 물리적 술어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과학적 실재론자들 중 일부는 물리적 보편자에 더불어 비물리적 보편자도 존재하며, 비물리적 보편자가 물리적 보편자에 수반한다고(supervene) 주장한다. 즉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속성들이 그가 가지는 비물리적 속성들을 고정fix/규정한다determinate. 반면 제거주의자들은 애초에 비물리적 술어들에 대응하는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리이론은 우리에게 최선의 이론틀을 제공해주며, 그에 맞지 않는 술어나 추상용어는 그저 잘못된 이론틀 내의 용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플라톤주의자라고 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고 부르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플라톤주의가 형이상학적 · 인식론적 문제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보편자는 시공간상에 자리하는 개체들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 존재하기에, 시공간적 세계와는 독립적인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 세계 존재론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개체와 보편자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더불어 구체적 세계에 속하는 존재자인 우리가 어떻게 보편자에 인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두 세계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가 보편자에 대해 갖는 지식은 선험적일 수밖에 없는데,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그 보편자를 예화하는 개체들에 인식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얻어지는 후험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참인 주술 문장으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로의 추론을 거짓인 주술 문장의 경우까지 확장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a is F”가 참이라면 술어 ‘F’가 지칭하는 보편자 F-ness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장이 거짓일 경우에도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 따라서 거짓인 문장의 술어도 그가 지칭하는 보편자가 존재해야 하며,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러한 확장은 잘못되었다. 앞서 참인 주술 문장으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를 유도해낼 때, 보편자의 존재는 문장이 참이라는 점에서 도출된 것이다. 앞선 논증의 핵심 근거는 참인 문장의 언어적 구조와 세계의 비언어적 구조가 대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방금의 논증은 주술 문장의 내용이,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동일하기 때문에 거짓 주술 문장의 술어도 그가 지칭하는 보편자를 가진다고 결론내린다. 하지만 보편자의 존재를 확증하는 것은 문장의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문장의 참됨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모든 보편자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보편자에 대한 필연적으로 참인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각형은 속성이다.”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어떤 대상에 대한 주장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면, 그 대상 또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보편자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보편자와 개체 간의 존재론적 선후관계를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보편자는 원래 개체들 간의 속성 일치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그러한 설명이 성공적이려면 보편자의 존재가 개체의 존재에 선행해야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보편자의 존재가 개체의 존재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두 세계 존재론 비판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세계 간의 연결은 예화라는 결합nexus에 의해 가능하다. 또한 어떤 플라톤주의자들은 개체를 통해서만 보편자에 인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접근이 가능한 보편자는 예화되는 보편자뿐이다. 그러나 예화되지 않은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예화된 보편자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추정함extrapolation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다만 예화된 보편자로부터 확인할 수 없는 보편자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