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analyticphilosophy.kr/attach/p/41_SHChoi.pdf
2번째 목차에 나와있는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저 논리대로 모든 행위가 근거가 없는걸까요
인식론적 논의와 비슷해보이는데 좀 다른
알고있는 것도 부족하고, 질문에 대한 답도 자신없지만 느낀바를 몇자 적어봅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를 보면, 존 코너는 인류의 미래를 구할 지도자이기에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지만, 미래에 수행할 사명을 이유로 현재에서 그의 존재가 정당화됩니다. 즉, 그의 존재 이유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영화같은 이야기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런 고백들을 살면서 가끔씩 듣기도 하거든요.
제 주위에 최근 엄마가 된 분이 계신데, 출산 직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만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나봐.”
이 고백은 시간의 순서로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이보다 먼저 태어났고, 그 시점에는 아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엄마는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엄마의 존재 이유가 아이의 존재에 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현재가 과거의 조건이 되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흔히 논문이나 논리적 설명에서 사용하는 “왜?”라는 질문은 항상 어떤 선행 조건을 전제로 합니다. A의 정당성은 A에,* A*는 다시 A**에 의존하며, 이렇게 근거를 찾는 과정은 끝없이 이어져 결국 무한퇴행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무한퇴행은 결국 근거의 소멸로 이어지고,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게 됩니다. 허무로 가는 것이죠.
하지만 위 고백처럼, 만약 어떤 행위의 이유가 미래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존재하고, 아이는 또 그 다음 세대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구조에서는 근거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기 때문에, 현재의 행위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의미를 향해 계속 나아갑니다. 무한퇴행이 아닌, 무한한 전개 입니다.
무한퇴행과 무한한 전개는 모두 "완전한 근거 없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무한퇴행은 현재의 행위를 마비시키지만, 무한한 전개는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내일의 의미는 모레에서, 그 모레의 의미는 또 그 너머에서 계속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의 행위는 완결되지 않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삶에 대한 과거의 정당성이 아닌 불가능의 희망을 통해서 채워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과관계는 항상 시간순이라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위에 예시에 나온 엄마의 고백은 벌어진 사건을 회상하며 만들어진, 그냥 그때의 감정을 나열한 것일 뿐 행위의 정당성이 될 순 없다고 말이죠. 시공간에서 시간의 순방향으로만 살아가는 주체로서, 시간을 역행하는 근거는 어찌보면 이해불가능함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이는 신앙의 영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예시의 엄마처럼, 삶을 우리가 가질 수 없는 불가능한 미래를 선취하는 방식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논의가 주체-객체를 이미 나눠놓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의 시공간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언어구조의 특성상 ‘왜’ 라는 질문이 선조건을 필요로하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다른 부분으로도 많이 논의 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전 글들을 찾아보니, 한가지 주제로 계속 고민하시는 것 같았고 그것이 위에 나열한 담론보다 “(이미 존재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주체에게 있어 행위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에 대한 어느정도의 제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