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이 칸트를 비판한적이있나요

어쩌다 후설의 칸트비판같은걸 읽은적이있는데
도저히 그 글을 찾을 수 가 없네요
혹시 아시는분이 있으실까해서
그리고, 후설은 자신의 인식론적 견해를 밝힌적이있나요

1개의 좋아요

칸트에 대한 후설의 비판은 꽤나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져 왔고, 관련된 유고 자료들도 많은 걸로 압니다. 다만 저도 그것들을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만 답변을 드리자면, 먼저 (1) 표상주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으로, 여기에는 칸트가 그 비판의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더 좁게는 (2)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에 대한 논의에서 나타나는 비판으로, 이는 『위기』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됩니다. 전자는 주로 『논리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고요.
(1) 후설의 현상학의 기본 입장이 전통적 표상주의에 대한 반론입니다. 표상주의라는 입장이 곧 '모든 인식은 실재에 대한 표상이다'라고 이해되는 한에서, 이것은 그가 보기에 애초에 잘못된 문제, 즉 '무한소급'애 빠지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의 논지는 어떤 것 A를 인식할 때 그 인식이 표상이기 위해서는 우선 A에 대한 해석이라는 인식이 선행해야 한다는 거에요. 저명한 현상학 연구자 단 자하비는 자신의 책에서 초상화의 예시를 가져오는데, 즉 초상화 A에 대한 인식 a가 그에 대한 표상이기 위해서는 'a는 A의 표상이다'라는 해석이 성립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 A를 칸트처럼 전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정하면 문제는 불합리하게 얽혀 버린다는 거죠. 이는 칸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칸트를 위시한 표상주의애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겠고요.
(2) 좀 더 칸트를 명시적으로 비판한 것은 그의 후기저작 『위기』 3부 초입에 중점적으로 보여집니다. 제가 지금 바깥에 있어서 책을 정확히 확인해볼 수는 없으나, 후설의 요점은 '칸트가 생활세계라는 아프리오리를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후설은 후기로 가면서 생활세계라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모든 학문들의 명증성을 근거지으려는 경향을 더 강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활세계는 모든 이런 경험의 원천이 된다는 의미에서 '아프리오리'인데, 정작 경험의 아프리오리를 계속해서 탐구한 칸트의 체계에는 이 중요한 개념이 결여된 채 공허한 사변에만 머물고 있다는 거죠. 칸트는 주지하다시피 경험의 근거를 초월론적 인식론에 두었고, 이는 세계를 배제한 채(또는 단지 세계를 인식의 반대편에 두기를 고수한 채) 순수 인식을 찾으려는 결과로 이어졌죠. 물론 칸트도 '초월론적 이념'이라는 이름 하에 세계라는 계열의 통일성을 염두에 두지만, 이것은 인식의 규제적 근거일 뿐 구성적 근거가 되지는 못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후설은 칸트가 생활세계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그의 주요 문제제기입니다.
이 외에도 이소 케른의 『후설과 칸트』등에서 비판점들을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4개의 좋아요

무한소급이 잘못된문제라고 한 이유가 잘 이해가안되는데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수있나요
무언가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계속 요구하는게 잘못되었다는것인가요?

1개의 좋아요

무한소급은 단순히 '무언가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계속 요구하는'게 아니라, 무한히 진행되지 않고서는 그 근거 자체가 정립될 수 없어서 말의 근거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철학적 인식에서는 보통 이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고요.

2개의 좋아요

후설은 왜 무한소급이 잘못된 문제라고 한건가요

1개의 좋아요

후설의 입장에서 봐도 무한소급은 잘못된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후설이 특히 인식의 근원적 토대를 요구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후설은 학문이 학문일 수 있으려면 그에 대한 엄밀한 토대가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2개의 좋아요

혹시 후설은 주관주의적 태도를갖나요?
후설이 그 학문 또는 인식의 토대를 어떻게 마련하는지 궁금합니다

1개의 좋아요

후설의 현상학을 '주관주의'라고 단순히 규정하기에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명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관주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냐에 따라 후설에 대한 오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후설은 『위기』에서 "모든 객관적인 것은 주관성이라는 우주에 포섭된디"고 말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모든 객관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거든요. 후설은 객관적 사물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설은 주관이 객관을 존재하도록 한다고 말하지도 않아요. 후설의 '구성'(constitution)이라는 개념은 얼핏 보면 대상을 우리가 만든다는 의미인 듯하지만, 사실 이것은 '미리 주어져 있는' 대상의 '대상성'이라는 의미를 구성하도록 해주는 작용이지, 대상의 존재를 무에서부터 구성하지는 않거든요. 그럼에도 후설은 주관성을 우위에 두는데, 왜냐하면 후설은 '세계 없는 주관'은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주관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한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주관을 수반한다는 거죠. 사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주저 『이념들 1』에서 '세계무화'라고 불리곤 하는데, 꽤나 논란이 많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 단 자하비는 후설의 현상학을 1인칭(주관주의)도, 3인칭(객관주의)도 아닌, 그 둘의 긴밀한 결합관계로 파악하기도 해요. 결국 후설을 단순히 주관주의라고 명명하기에는 해명해야 할 지점들이 너무 많아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후설에게 있어서 인식론적 우위는 주관성에 있다고 이해하시는 게 옳다고 봅니다.

4개의 좋아요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큰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상학 쉽지않네요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