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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적으로는 상품의 시장가격(상품가격의 가장 경험적인 수준)은 주로 단순히 공급과 수요의 변동에 따라 등락합니다. 그러나 상품의 시장가격의 장기적인 하락 추세의 원인은 자본가들 간의 생산성 향상을 통한 생산비 인하 경쟁입니다. 쇼가 얘기한 경우처럼 생산비는 그대로인데 특정 자본가가 먼저 가격을 내린 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해당 부문의 모든 자본가들이 경쟁적으로 가격을 내리는 일은 현실적으로는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판매가 매우 부진할 경우가 아니면 자본가들은 그런 식으로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일시적으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경우는 결국은 수요의 변동이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일 뿐입니다.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따른 시장가격의 등락을 관통해서 장기적으로, 그리고 법칙적으로 관철되는 가격형성 추세에 관심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 경제학은 그 등락이 어떤 가격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 가격이 소위 '생산가격'입니다. 마르크스가 완전 독창적으로 구상/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 전 경제학에 이미 맹아가 있는 구상/발견입니다. 마르크스는 역시 이미 맹아가 있는 구상/발견을 발전시켜 구성한 특유의 노동가치론으로 생산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노동가치에서의 전형과정으로 봅니다. 상품의 생산가격은 상품의 노동가치에서 괴리되지만 생산가격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에 따른 부문 간 이윤율의 차이가 자본가들의 경쟁을 매개로 해서 균등화되는 장기적 과정에서 노동가치 중 잉여가치 부분이 각 부문의 투하자본량에 비례해 균등하게 분배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괴리는 노동가치론이 틀렸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의 전형론의 포인트입니다. 최근 3,4십년 사이 수학적으로조차 상당히 세련화되었지만 여전히 논쟁되는 주제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자체를 포기한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거꾸로 던컨 폴리처럼 주류 경제학을 하다가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변신한 인물도 있습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르크스 경제학 입장에서는 일단의 자본가들이 상품가격을 생산성 수준에서 인하요인이 없고 수요가 급락하지 않았는데도 인하하는 것은 일어나기 힘든 일이고 일어난다고 해도 노동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되는 장기적인 전체적 과정의 코스에는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치는 부분적 에피소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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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에 소비와 분배에 대한 이론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1과는 다른 종류의 더 일반적고 덜 급진적인 비판입니다. 1은 소박하게나마 마르크스 경제학 자체의 아이덴티티의 온전성을 겨냥하고 있지만 그 비판은 마르크스적 생산이론에 '상응하는' 소비 및 분배 이론의 부족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저는 의도적으로 '결여'가 아니라 '부족'이라고 썼습니다. 마르크스적 생산이론에 '상응하는' 분배 이론과 소비 이론이 아예 없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비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응을 아주 조금밖에 모릅니다. 그 조금 외에 약간의 감도 있습니다
그 부족을 지적하는 비판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대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것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만큼 결정적이지 않다, 분배와 소비의 차원에서 그 생산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전단계이다라고 생각해서 아예 대응을 안 하는 대응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생산주의입니다(이 생산주의가 프로메테우스주의적 의미까지도 갖느냐는 논쟁적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 특유의 구조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분배와 소비 차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재생산과 양립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일어날 수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 특유의 구조적 성격에 기인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장기적 다이나믹 -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떨어지고 경기침체가 끊이지 않는 등등 - 을 차단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 공상 혹은 환상"입니다(같은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소비 이론이 있기는 합니다. 이 소비 이론 중 한 부류는 소비가 노동자 계급을 포함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성원들들 무차별적으로 '대중화'시키는 - 자본주의에 완전히 순응하게 하는 -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이론입니다. 복지 제도와 임금 상승과 상품 가격을 대폭 내려가게 하는 혁신적인 표준화된 대량생산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상품들의 유혹에 힘입어 우리 거의 모두 만족스러운 소비자로서의 삶으로 지배되지 않고 착취되지 않고 소외되지 않은 삶에 대한 희망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 중에서도 아도르노 등의 문화산업론은 문화상품의 소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이론의 비교적 최근판은 보들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저는 잘 모르지만 보들리야는 흔히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벗어났다고 얘기됩니다. <소비의 사회> 시기부터 이미 그랬을 수 있습니다. 번역되어 있지만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이론들에서 소비는 실제로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것으로, 그러나 그럼에도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얼핏 보아 대안적 소비 실천/활동의 잠재력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한 부류는 케이트 소퍼 Kate Soper 가 발전시키고 있는 소비 이론입니다.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라고 얘기되고 있는데,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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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은 엄밀히 말하면 철학에 해당하지 않는, 따라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느슨하게라도 철학적인 논의로서의 학문론적인 차원의 답변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이기는 합니다. 저는 마르스크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니 더 구체적이고 더 만족스러운 답변은 김공회, 류동민 등 마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에게서 구하셔야 합니다. 두 분 중 한 분은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더는 운영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메일 주소라도 구해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