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와 실존: 비트겐슈타인 전통에서 논리

로버트 브랜덤의 Making It Explicit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이 책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 질문으로 끝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영미권의 아주 전문적인 언어철학 혹은 논리철학을 다루는 책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굉장히 실존적인 질문을 책의 처음과 끝에서 제기한다는 점이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너와 나일 수도 있고, 말하는 모든 것이나 움직이는 모든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이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계는 유동적이기에, 우리는 경계를 정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즉,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을 우리 세계에서 발견되는 다른 종류의 대상이나 유기체들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Brandom, 1994: 3)

결국, 이 언어, 마음, 논리에 대한 표현적 설명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표현적 존재로 구성하는 어떤 종류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즉, 명시적으로 만드는 존재이자, 자신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존재로서의 설명이다. 우리는 지성적이다: 이성적이고, 표현적이다—즉, 담론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이성적이고 표현적인 존재 그 이상이다. 우리는 또한 논리적이고, 자기-표현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단지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명시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Brandom, 1994: 650)

그런데 이 점은 사실 (브랜덤이 속해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전통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긴 합니다. '논리'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우리 자신'에 대한 사유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논리적인 것인지가, 결국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로서, 어떤 삶을 살면서, 어떤 가치를 지향하면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바탕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인 주장 중 하나이니까요.

실제로, 러셀은 어느 날 한 밤 중에 자기 집을 찾아와 서성대면서 심각하게 철학적 문제를 고민하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자네는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인가, 자네의 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물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비트겐슈타인은 "둘 다 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하죠.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적/비논리적'이란, 단순히 형식적 탐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관련된 문제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가, 무엇이 '논리적'인지를 결정하니 말이죠.

”성탄절에는 비트겐슈타인을 만나러 헤이그에 갔다가 도라를 만났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전쟁이 터지기 전에 케임브리지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는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부친이 굉장한 갑부였다. 처음에 그는 기술자가 될 생각으로 맨체스터로 갔다. 수학 책을 읽다가 수학의 원리에 흥미를 느끼고, 수학 뿐야에 누가 있는지 맨체스터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누군가 내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트리니티로 짐을 싸들고 왔다. 그는 정열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천재의 완벽한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순수함 같은 것도 있었는데, 그 점에서 맞먹을 만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 G. E. 무어밖에 없었다. […] 그는 매일 한밤중에 날 찾아와, 심란한 침묵 속에 들짐승처럼 세 시간씩 방안을 서성대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물어보았다. "지금 논리학을 생각하는 건가, 자네의 죄를 생각하는 건가?" "둘 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왔다갔다 하는 짓을 계속했다.” (버트런드 러셀, 『러셀 자서전』, 상권,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561-562쪽.)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그건 논리적이야."라거나 "그건 논리적이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 '논리/비논리'에서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형식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로 '논리'를 말하려고 해도, 애초에 '논리'라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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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내용에 대한 의견은 아니고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저는 여전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사유를 선호하는 사람이구나를 느낍니다. 좋은글 늘 잘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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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접했던 둘의 대화 내용과는 조금 다른데 이게 정확한 내용인가 보네요. 비트겐슈타인의 그 짧은 응답은 단지 두 사안이 모두 중요하다는 뜻을 넘어, 그에게는 논리와 윤리가 단순히 병렬적으로 작동하는 두 개의 층위가 아니라, 서로를 성립시키는 전제이자 조건으로서 상호 포섭된다고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층위에서는 특히 그러한 상호 의존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며, 논리와 윤리는 각각 독립된 항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서로를 정당화하는 관계로 얽혀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컨대 "백인은 흑인보다 우월하다"라는 명제를 떠올려보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적 반응 때문이 아니라,
그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몇 가지 조건들—예를 들면 인간의 본질적 위계 가능성이나 타자의 가치 상대화—이 실제로는 논리적 정합성이나 보편 타당성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제의 비정당성은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생성하며, 그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논리적 실패는 결국 윤리적 결함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윤리의 실패가 아니라, 논리의 실패가 윤리로 이행되는 과정인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논리와 윤리는 이처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유가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 명제가 내부적으로 보편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구조를 품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요.

이 맥락은 비트겐슈타인과 튜링의 논쟁에서도 드러난다고 느낍니다.
튜링은 “모순이 정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 모순된 계산으로 설계된 다리가 무너져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는 모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고 응답하죠.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모순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어떤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가—그 해석과 태도야말로 진짜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문득,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 했던 건 ‘다리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전제 자체에 이미 어떤 인간 중심적 사고와 실용적 무의식이 깃들어 있는 것이며, 오히려 그 전제조차 걷어내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순된 계산으로 다리를 만들면 다리가 붕괴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물리적 실패에 대한 진술일 뿐인데, 거기에서 곧바로 모순이라는 개념의 타당성까지 단죄하는 것은, 어쩌면 모순이라는 이론적 개념과 현실의 안전이라는 정서적 반응, 모순이라는 사유의 층위와 현실 적용의 층위를 혼동한 범주 오류일 수 있으며, 결국 그 오류는 사유의 개방성을 제한하고, 사유의 층위를 현실 적용의 층위에 환원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응답은 그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 경고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아니 더 나아가 우리가 언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그 통사적 한계가 사고를 어떻게 제한하는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도 다시 보게 됩니다.
이 문장 안에서 '나'는 철학의 출발점으로 호출되지만, 실제로는 그 존재가 먼저 증명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언어는 이미 그 ‘나’를 주어로 전제한 채 출발하죠. 이처럼 언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우리는 반드시 언어의 룰에 포획되어야만 하며, 그 언어의 통사적 규칙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게 되는 많은 개념들의 기반이 되며, 비트겐슈타인의 사유 역시 이 점에서 언어의 문법적 착각을 깊이 파헤치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법적 착각’이야말로, 철학이 전제하는 주체 개념을 재고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언어 구조에 포획된 결론이라는 점에서, 데카르트적 자아의 토대는 언어에 의해 사전에 배치된 구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우리가 논리적이라고 믿는 사유의 바탕에는 이미 언어적 조건과 존재론적 전제가 함께 얽혀 있으며, 이 전제들은 종종 무비판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무비판성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논리적 억압이 윤리적 문제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구요.

그래서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그 짧은 응답이, 단순한 철학적 태도의 표명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를 반성적으로 되묻는 실존적 사유의 압축된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언어의 사용 방식에서 출발해,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로 사유의 층위가 확대된다는 점에서,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소여’ 혹은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 안에 이미 윤리와 논리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제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언어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윤리와 논리는 분리된 범주가 아니라 함께 작동하는 구조적 요소였다는 것으로요. 이 점에서, 그 역시 라캉처럼 ‘언어가 주체를 만든다’는 입장을 어느 층위에서는 일정정도 공유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도 들구요.

저는 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겉핡기 수준으로 아는 것에 불과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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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고민이 느껴지는 깊이있는 의견. 감사히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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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저도 윤리의 문제를 단순히 감정적 반응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고 봅니다. 특히, 제시하신 차별 문제에서는 잘못된 가정을 비판하는 작업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2)

아마 이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의 모순론에서 Answer님이 조금 더 생각을 전개하신 내용인 것으로 보입니다.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 20-23강에서 직접 독해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논리학적' 문제와 '물리학적'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P & ~P"라는 형식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논리학적' 문제이고, 그 타당하지 않은 형식을 다리 건설에 사용할지 말지는 '물리학적' 혹은 '공학적' 혹은 '실용적' 문제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1차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이죠.

하지만 저는 Answer님처럼 독해하신 것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모순이라는 이론적 개념과 현실의 안전이라는 정서적 반응, 모순이라는 사유의 층위와 현실 적용의 층위를 혼동한 범주 오류일 수 있으며, 결국 그 오류는 사유의 개방성을 제한하고, 사유의 층위를 현실 적용의 층위에 환원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라는 주장도 비트겐슈타인적 사유에서 충분히 도출될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이라고 봅니다.

(3)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비판은 "나는 ……안다."라는 문법적 구조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은 (a) "나는 아프다."라는 문장과 (b)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라는 문장이 아무런 실질적 차이가 없다고 지적하죠. 즉

  • 데카르트는 (b)와 같은 문장이 '자기 의식'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그 자기 의식의 구조가 (a)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하였지만,
  •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는 "나는 ……안다."가 없이 사용된 (a)와 같은 문장이나 "나는 ……안다."가 덧붙여진 (b)와 같은 문장은 모두 동일한 의미일 뿐이고, 오히려 (a) 없이 (b)가 단독으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심리철학: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비판
https://blog.naver.com/1019milk/220756320718

자기의식의 구조: "나는 내가 안다는 것을 안다."
https://blog.naver.com/1019milk/memo/220836898185

(4)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만으로는 이 내용을 직접 찾기는 힘들 수 있지만, 충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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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이 완전히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튜링과의 논쟁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려 했던 것은, 모순을 철저히 제거해 무결점의 체계를 구축하려는 학문적 집착, 혹은 학자들의 강박적 태도를 포함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도는, 실은 불완전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정서적 반응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 정서가 논리의 층위에까지 스며들면서 범주 오류를 야기하는 주된 원인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요.
만약 그렇다면, “다리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실용적인 판단조차도, 그 무너짐을 견딜 수 없다는 감정적 강박에 뿌리를 둔 판단일 수 있고, 이는 결국 논리학의 층위에서 다루어야 할 ‘모순’의 문제를 현실 안전이라는 감정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또 다른 범주 오류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링크 주신 것 잘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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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 먼저 본 글인데, 일화가 정말 인상적이라 계속 기억에 남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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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논리적인 것인지가, 결국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로서, 어떤 삶을 살면서, 어떤 가치를 지향하면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바탕으로 결정된다는 것

논리함수 결과나 추론 방식이 mind-independent하다는 직관과 위배되는 거 같은데 맞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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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전통의 주장이 얼핏 형식논리학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이나 직관에서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형식논리학 자체와 상충하는 주장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저런 주장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논리학' 자체보다는 '논리철학'과 좀 더 연관이 있는 이야기라서요.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드는 예시는 아니지만,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저런 주장을 조금 더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 '어떤 논리학'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 서로 다른 논리학 체계들 중에서 어떤 논리학을 선택할 것인지는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죠. 가령, 모순을 거부하는 고전논리의 체계를 받아들일 것인지 모순을 허용하는 초일관논리의 체계를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실질함언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고전논리처럼 조건문의 전건과 후건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볼 것인지 연관논리처럼 관계가 있다고 볼 것인지 등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관점이 개입하는 문제니까요. (실제로, 초일관논리 같은 경우는 모순율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전통에서 나왔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종종 있어요.)

(2) 일상언어의 기호화 문제: 기호화의 과정에서도 일상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자신의 관점이 개입하죠. 일상언어로 주어진 논증을 우리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그 논증을 얼마나 엄밀하게 기호화하여 타당성을 증명할 것인지가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가령, "모든 철학도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성실한 사람이다. / 따라서 모든 철학도는 성실한 사람이다."라는 논증은 (a) 명제논리로 기호화하면 "p / q / 따라서 r"이라는 타당하지 않은 논증이 되어버리지만, (b) 술어논리로 기호화하면 "(∀x)(Px → Tx) / (∀x)(Tx → Sx) / 따라서 (∀x)(Px → Sx)"처럼 타당한 논증이 되죠. 어떤 방식으로든지 '기호화' 자체는 수행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어떤 기호화를 그 논증에 적합한 것으로 볼 것인지는 우리 자신의 관점이 깊게 개입하는 문제죠. (이 점은 브랜덤이 Making It Explicit 제2장에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해요.)

(3) 평가 기준의 문제: 형식논리학을 넘어서 비형식논리학까지 고려하면 '우리 자신'이라는 기준이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나죠. 가설 연역적 방법을 평가할 때 사용되는 '설명력', '정합성', '검증가능성', '반증가능성', '증거력', '단순성'과 같은 기준에는 사람의 관점이 굉장히 깊게 개입하니까요. 가령, 현상 a, b, c를 설명하는 가설1과 현상 b, c, d를 설명하는 가설2 중에서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a와 d 중 무엇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지에 대한 가치 평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이런 선호나 중요도에 따라, 두 가설 중에서 무엇이 더욱 설명력이 있다고 볼 것인지 혹은 무엇이 더 단순성이 있다고 볼 것인지가 달라지게 되고요. (실제로, 퍼트남이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넘어서』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과학적 가설에 대한 평가조차도 가치 평가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강조하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비트겐슈타인 전통에서 제시되는 저런 주장은 논리학 자체와 상충하는 반직관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논리학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관점이 개입한다는 (어떤 의미에서) 아주 평범하고 직관적인 이야기에 가깝지 않은가 하고 저는 생각해요. 특정한 논리학 체계 내에서 한 명제가 다른 명제로부터 형식적으로 도출되도록 구성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a) 왜 그러한 체계가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에는 결국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대답할 수밖에 없고, (b) 그러한 체계를 일상언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도 결국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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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이자 엔지니어로써 일을 하다보면 문제를 푸는 일상을 살게 됩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항상 여러가지이고, 그 때마다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 장단점을 분석하여 선택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설득해야 하죠. "은탄환은 없다"는 공학계에서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귀중한 격언입니다. 비트겐슈타인도 공학도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의 사상이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엔지니어와 닮았다고 느껴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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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동의합니다ㅋㅋㅋㅋ 비트겐슈타인-튜링 논쟁을 보다 보면, 공학자적인 비트겐슈타인의 사고 방식(가령, "어떤 계산법을 사용하든 다리를 잘만 만들면 된다.")과 수학자적인 튜링의 사고 방식(가령, "모순을 절대로 허용하면 안 된다.")이 굉장히 대조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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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관점이군요.
논리층과 윤리층은 저는 다르다고 보고 있는데...
논리층에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짓는 엔지니어가 상상하기 어렵지요. 모순이 없으니 다리를 건설하지요. 다만 설계 때 고려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다리가 무너지겠지요.
논리층에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모르는 부분이 포함된 지식으로 다리를 건설하지는 않지요. 확신하고 검증된 논리적 기술로만 다리를 건설하지요.
정리하자면 윤리층의 문제를 논리층에 떠 넘겨야 하는 사례가 있는지 궁금하여 댓글 달았습니다.

"다리가 무너지면 왜 안되지?" 까지 가는 거 아닐까 싶네요. 이미 어떠한 가치평가가 선재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논리학이 이와 무관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듯 합니다. 이에 대한 더욱 직접적인 반박은 인간의 마음에 독립적인 논리적 실체가 있다는 걸 보이는 것일 듯 합니다. 아마 이를 위해서는 가추법이나 최선의 설명에 의한 추론이 이용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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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논리학의 실체가 무엇인지 5년 이상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았습니다. 물론 명제, and, or 등의 논리 연산도 논리학의 일부분이지만 철학에서 논리학은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충족이유율 이라고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사고의 규칙이지요. 답글에서도 명시했듯이 논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증명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논리학이 인간의 맘과 독립적이라고 보며 수학, 자연과학, 공학의 수많은 이론을 보면서 인간의 맘과 독립적인 사고의 규칙을 보았습니다.
후설은 인간의 심신상태에서 수학, 논리학을 세우려다 프레게의 객관성 비판을 받고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비른 비판이고 올바른 대응리라고 보지요. 인간의 맘과 독립적으로 논리학을 정립할 수 있는데 인간의 맘을 넣을 필요가 없지요. 사실 인간의 맘은 너무나 복잡한 현상으로 기초 학문의 근거가 될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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