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이론에서 지시는 분석명제도 해당이 되나요?

지시이론에서 보통 예시로 드는 것은 고유명사나 실제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인데 혹시 지시이론의 입장에서 총각=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같은 분석명제도 총각의 의미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지시한다와 같이 설명이 되나요?

언어철학에서의 지시이론 주창자는 아니지만 플라톤은 추상적인 대상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진리'라고 여긴 걸 생각하면 이론적으로 가능하긴 한데 지시이론에서의 의미론이 모든 개념 혹은 용어의 의미가 지시되는 대상으로 결정된다고 여긴건지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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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라는 용어로 아마 ‘지시체(referent)‘를 가리키신 것 같습니다. 답만 우선 말씀드리자면, 추상물도 지시체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철학자들 중에서도 잭슨이나 암스트롱 등은 (언급하신 플라톤처럼) 추상물 지칭 현상으로부터 보편자 실재론을 옹호하기도 합니다.

또한 ‘지시 이론‘에서도 크게 두 가지의 상이한 입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미가 지시를 결정한다.“라고 주장하는 ‘프레게주의‘ 혹은 ‘기술주의‘ 지시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지시가 의미를 결정한다.“라고 주장하는 ‘크립키주의‘ 혹은 ‘지시주의‘ 지시 이론입니다.

질문자님은 아마도 크립키주의 지시 이론을 염두에 두시고 질문을 하신 것 같습니다. (크립키주의가 실제로 오늘날 주류 지시 이론이기는 하죠.) 하지만, 크립키주의가 프레게주의에 반대한 점은 의미와 지시 중에서 무엇을 우선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보니, 반드시 지시체가 물리적 대상이어야 하는지 추상적 대상이어야 하는지는 그 둘 사이의 논쟁에서 쟁점이 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크립키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추상물에 대한 지시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죠.

아울러 크립키주의도 고유명사와 자연종 명사에 대해서는 직접 지시 이론을 주장하긴 하지만, 반드시 모든 명사적 표현이 직접 지시 이론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심지어 고유명사 중에서도 "잭 더 리퍼" 같은 명사에 대해서는 그 명사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기술구를 통해서 지시가 일어난다고 크립키 본인도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같은 기술구 표현이나 "잭 더 리퍼" 같은 아주 특수한 고유명사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미가 지시를 결정한다는 논제가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어상의 혼동이 있으신 것 같네요.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같은 표현은 '분석명제'가 아니라 '기술구description'라고 불리는 것이 적절합니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가 분석명제죠.)

다만, 크립키주의 지시 이론에서는 소위 ‘빈 이름‘ 문제가 발생하기는 합니다. 아무런 지시체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이름은 과연 어떻게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죠. 가령, “셜록 홈즈“, “벌칸“, “산타 클로스“ 같은 이름은 아예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지만 의미를 지닙니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지가 크립키주의 지시 이론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요 난점이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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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이 부분은 다소 적절하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기술구도 대상을 지시합니다. 다만, 이때 이 기술구가 지시하는 대상이란 이정재, 소지섭, 조인성, 이서진 같은 개체들라고 해야 합니다. (이분들은 다들 결혼하지 않으셨죠.)

즉, 질문자님의 글에는 몇 가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하는 요점들이 있습니다

(1) 추상물에 대한 지시란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2)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분석명제인가?: 아닙니다. 이런 명사적 표현은 ‘기술구‘라고 불립니다.

(3)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추상물을 지시하는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 기술구는 개체들을 지시합니다.

(4) 그렇다면 추상물을 지시하는 언어 표현은 무엇인가?: 가령, “빨강“, “분홍“, “삼각형“ 같은 추상 단칭명사가 추상물을 지시하는 표현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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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너무 감사합니다 ㅜ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여러 개체들이라 한다면 '물'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은 어떠한가요? 물은 단일한 대상이 아니지만 (지시이론에 따르면) 개체로 나뉠 수는 없기에 물은 co2를 지시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또한 빨강, 분홍, 삼각형과 더불어 가령 창의성과 같은 개념도 새롭고 유용한 사고라는 지시체를 지시한다는 식으로 지시이론에서 설명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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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라는 자연종 명사는 H2O라는 분자구조를 지닌 모든 대상을 지시합니다.

다만 "창의성"에 어떤 지시체가 대응한다고 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창의성"은 얼마든지 술어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창의적인 것들'이 존재할 뿐 '창의성 자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유명론적 입장을 취할 경우, "x는 창의적이다."와 같은 문장은 유의미한 문장이겠지만, "창의성은 F다."와 같은 문장은 다소 사이비적인 문장이거나 개체로의 환원이 필요한 문장으로 여겨지겠죠.

추상적 단칭 명사가 무엇을 지시하는지에 대한 고민 때문에 보편자의 문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기는 합니다만, 사실 (a) 애초에 지시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자들은 이런 논의가 가짜 문제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b) 지시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이는 철학자들조차도 반드시 모든 추상적 단칭 명사가 보편자를 지시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세부적인 입장에는 의견 차이가 있고, 그런 점에서 '창의성'이라는 명사에 지시체가 있는지는 철학에서 그다지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주제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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