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짧은 글을 한 편 써봤습니다. 이 주제는 제가 몇 년 전부터 마음에 계속 품고 있었던, '다른 사람이 되어 본다는 것'에 대한 하나의 단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문헌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철학사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잡념에 가까운 것 같네요. 사실 많이 대충 쓴 감이 있는데, 나중에 조금 더 논의와 생각을 보충해서 조금 더 글다운 글로 고쳐볼까 해요. 특히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밖에 안읽어봐서, 자기의식 장을 다루지 못한게 많이 아쉽네요. 마지막 4장도 사실은 더 길게 다루려다가, 논의가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단독적으로 갈까 우려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글쓰기가 좀 힘들어서 대충 끝내긴 했는데, 언젠가 더 발전시켜 봐야겠습니다.
1. 들어가며
때로는 두 철학자 사이에 결코 메울 수 없는 대립의 간극이 나타나곤 한다. 이 간극이라는 현상은 철학사 전체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다른 모습을 하며 나타나는 근본적인 양상이었다. 경험 대(對) 이성, 주관 대 객관, 개념 대 직관, 현실 대 가상, 동일성 대 차이, 이러한 대립적 구도는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개념적 논쟁 자체의 쟁점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는 프랑스의 한 현대 사상가가 독일 근대철학의 정점에 선 사상가와 매우 격하게 대립구도를 보이는 현상을 목도한다. 질 들뢰즈의 철학, 이른바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헤겔의 체계와 완전히 달라 보인다. 헤겔이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을 통해 모든 것을 근원적 일자(一者)에 지양시키고자(aufheben) 한다면, 들뢰즈는 동일성 내의 비개념적 차이에 주목하여 이러한 사유에 반발하는 현대적 존재론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의 철학적 도정, 게다가 더 나아가서는 서양철학 전체의 도정에서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는데, 바로 '타자'(他者)의 문제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물음은 오랫동안 서양철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타인이란 무엇인가, 또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들을 빼놓고 철학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방대한 연구를 단번에 수행해내는 대신에, 우리는 먼저 두 현대적인 사상가를 중심으로 그들이 타자의 문제를 어떻게 전개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다른 사람 되기'라는 철학적 주제가 암시적으로 놓여 있음을 밝혀내고, 그 주제가 의미하는 바를 서술할 것이다. 만일 이 과제가 잘 성취된다면, 그것은 나의 '다른 사람 되기' 논의에 대한 하나의 초석이 잘 마련되는 것이겠다.
2. 헤겔의 타자 철학
그의『정신현상학』(1807)에서 헤겔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과감히 표현하건대, 단순히 의식이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나 사태의 변증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문제는 어떻게 존재가 자신과 다른 것, 즉 타자와 관계함으로써 변증법적 지양에 이르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 타자의 도정에서 절대지에 이르는가였다. 그에게 있어서 "실체는 곧 주체"(『정신현상학』 15쪽)이고, 결국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됨으로써만 진리가 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직접적 일자의 상태에서 머무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태는 그것의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 수행 과정에서 비로소 남김없이 다루어지고, 또한 결론이 아니라 결론과 그것의 생성이 함께 현실적인 전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3~4쪽) 그가 이 '서문'에서 형식주의와 같은 선입견들을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정적 태도이다. 이로부터 그가 왜 실체를 또한 주체라고 명명하는지가 드러난다. 곧, 헤겔은 참된 것인 실체를 그 자체로 참된 어떤 '부동의 원동자'(ho ou kinoúmenon kineî )가 아니라, 그 자제로 운동하는 것, 주체적 능동성 속에서 부단히 지양의 과정을 통해 운동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서 진리란 곧 운동이고, 그 운동의 핵심은 '타자'에 있다. 다음의 표현은 이 생각을 가장 명료하게 뒷받침해준다.
"[...] 생동하는 실체는 참으로 주체인 존재, 즉 그 실체가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인 한에서만 또는 자기 자신과 자기 타자화의 매개인 한에서만 참으로 현실적인 그런 존재이다."(같은 책, 16쪽. 인용자 강조)
이런 절대적 실체는 자기 자신을 전개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완성하는 본질이다(같은 책, 17쪽 참조). 헤겔의 '자기 내로의 복귀'라는 표현은, 바로 그의 이런 참된 것의 운동의 근본성격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철학적 방법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참된 것은 전체"(같은 곳)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인식하는 한에서, 모든 다른 것들은 하나로 모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헤겔의 문제는 '어떻게 나와 다른 것을 나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그가 보기에 단순히 정신과 자연을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에 만족하려는 당대의 이른바 '형식주의', 곧 피히테와 셸링적 방식은 매우 불충분할 뿐더러 사태 자신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가 타자를 해명하는 방식은 곧 하나가 다른 하나(타자)가 되고 다시 자기로 돌아감으로써 더 완전하고 참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문'에서 이미 이러한 내용들을 매우 잘 관찰할 수 있다. 앞서 자기 타자화에 대한 언급을 인용한 같은 페이지에서, 헤겔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근원적 통일 그 자체나 직접적 통일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이렇게 스스로를 재구축하는 동일성만이 또는 타자 존재 속에서 자기 자신 안으로의 반성만이 참된 것이다."(마지막 강조 부분은 인용자) 참된 것은 매개, 더구나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비로소 참된 것으로 고양된다. 본질적인 측면은 매개항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난해해 보이면서도 중요한 개념, 즉 '즉자'(an sich)와 '대자'(für sich), 그리고 그 통일로서 '즉자 대자'(an und für sich)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맨 처음의 의식(또는 존재)의 상태는 자신에게 있어 직접적이다. 즉 그것은 자기 스스로 그 자체로 존재한다. 매우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이때 나는 자기에 '대해' 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일차원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이 의식하는 것은 단지 바깥의 '이것' 또는 '저것'일 뿐, 자기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그것들이 결국 자기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지만 말이다. 진부하지만 매우 유용한 예시를 들자면, 갓 태어난 갓난아이는 단지 자신 눈앞의 이러한 것과 저러한 것에 주목할 뿐, 자신의 의식 자체를 주제화하지는 못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사태는 이제 대자존재로 이행하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사춘기적 상태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끊임없이 갖게 된다. 이것이 곧 나의 주제화, 즉 대자적 상태이다. 그런데 이 성장의 예시에서는 불가피하게 은폐되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 있다. 그것은 자기대상화는 곧 자기타자화와 같다는 점이다. 일상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이지 어떻게 내가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손을 나 자신의 다른 손으로 만질 때 내가 만지면서 동시에 만져짐을 느끼듯이,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직접적 상태로부터 잠시 떨어져 나와서, 나를 다른 사람처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자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존재의 타자화이다. 그리고 이것이 헤겔의 체계 내에서는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즉자 대자'적 존재는 이러한 타자화로부터 자기 안으로 복귀하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이 앞서 말한 헤겔의 체계적인 개념의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자존재'에 관해서이다.
한 의식이 대자적이라는 것은 그가 자신에 대해 타자로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자 존재는 곧 타자 존재와 다르지 않다(『정신현상학 1』 22쪽 참조). 그리고 그 자기 타자화가 실체이자 주체로서의 정신이 자기 내로 환수되는 과정의 매개적 위치에 있는 한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해 타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 대해 타자가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자. 거울 앞에 서서 어떤 옷이 나에게 어울리는지를 보는 것은 단순히 자기 평가가 아니라, 자기를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자기 타자화이다. 여기서는 나 자신의 몸을 내가 거울을 통해 바라보면서, 그 인식내용을 동시에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울과 같은 매개체가 없이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타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잠에 들기 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돌이켜 보는 일도 어떤 의미에서는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본질적인 것은, 그러한 자기 타자화가 끝나면 단순히 예전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헤겔 또한 '타자존재에서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을 '고차적 통일'로서 규정한다. 직접적 의식은 대자적으로 됨으로써 이전의 자신을 지양하고 더 높은 단계의 의식으로 고양된다. 이것은, 이러한 지양과 고양의 과정이 존재에 본질적인 한에서, 거시적인 정신의 관점에서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개별적 존재의 경험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반성하고 규정함으로써 더 나은 나, 더 성숙한 내가 된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예시가 되겠지만,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은 이보다 더 근본적이면서도, 주목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타자화'(Sichanderswerden) 내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동일한 자기에 대해 반성적 활동을 수행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완전히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기를 생각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남성이 아니라, 한 명의 여성이었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한다. 나는 내가 이곳에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령 외국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면 어떨지를 상상한다. 이때 주목할 점은 이렇게 함으로써 나의 삶 전체의 지평이 변경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반성은 곧 지평적 반성이고, 자기 반성은 자기타자화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지평으로 살아감을 생각해봄을 뜻한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나 자신을 꾸미고, 연기하고, 기만한다고 해도 나는 나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생각해볼 수는 있다. 타자는 이념이다. 그러나 그것에서부터 나는 나 자신의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헤겔의 철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 타자가 되고, 그것에서 다시 필연적인 나 자신으로 돌아옴으로써 나는 더 발전된 내가 되는 것이다.
3. 들뢰즈의 타자 철학
두 세기를 넘어서, 우리는 들뢰즈의 사유에서도 타자라는 문제가 중심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 특히 펠릭스 가타리와의 작업이 주를 이루는 후기 사유에서, 들뢰즈는 '되기'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되기'라는 것은, 무엇보다 고대 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을 지배해 왔던 본질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특징지어진다. 종래 서양철학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계속해서 되물어 왔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본질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사유를 고착화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무기력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 고정된 답변을 계속해서 원한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들을 잃게 된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곧, 우리가 자신에게 타자일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가능성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가능성은 지금과 다르게 됨이고, 다르게 됨은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됨'이다. 이러한 타자화가 없다면, 우리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더 나아진다는 것은 지금의 나와 다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되기'는 존재의 무한한 변용가능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스피노자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체는 무한히 변용될 수 있고, 그것이 존재의 긍정적 가능성이다(『디알로그』 115쪽 참조). 되기(devenir)는 곧 생성(devenir)이다. 그리고 이 '되기'라는 것이 다른 것으로 됨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한에서, 타자화는 생성의 과정 바로 그것과 다름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되기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그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인디언-되기와 흑인-되기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을 하거나 피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한 동물-되기는 동물을 흉내내거나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 오히려 [이것은] 두 계(界) 사이의 우연한 마주침, 직접 교섭이고, 각각의 계가 탈영토화하는 코드를 획득하는 것이죠."(『디알로그』 86~87쪽)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란 단순히 그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되기는 '배치'(agencement)에서 이루어지는 우연적 마주침의 과정이다. 이러한 마주침이 가능한 것은, 관계들이란 그 항들에 "외부적"이기 때문이다(『디알로그』 107쪽). 전통적 존재론에서의 이다/있다(est)는 그리고(et)로 대체된다. 말벌은 더 이상 난초에 대해서 본질적인 관계가 아니다. 말벌과 난초는 우연히 '마주치며' 그것이 말벌을 난초-되기, 난초를 말벌-되기로 이끈다(같은 책, 11쪽).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이러한 마주침의 '연결'이 곧 되기의 의미인 것이다. "되기란 [...] 한 선에서 다른 선으로 껑충 뛰고,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갑자기 도약하는 것입니다. 균열들, 지각할 수 없는 단절들이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하고 선들을 끊어 놓습니다. [...] 점이 아닌 선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뿌리가 아닌 리좀을 만드늘 것입니다."(같은 책, 53쪽) 이러한 '되기'는 따라서 탈주선을 그리는 과정에 다름아니고, 이 탈주선은 다시 마이너리티-되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되기는 바로 마이너리티-되기이다. 백인, 남성, 이성에서 소수적으로, 마이너리티가 되어보는 것이 이 되기의 참된 의미이다. 여성-되기는 따라서 여자를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이너리티-되기, 즉 일반성이라는 동일성에서 벗어나 차이를 생성하고 '다르게 되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다른 사람 되기'는 '차이 나게 되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게 됨으로써 이전의 모든 동일한 나와 차이 나는 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곧 존재의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결코 내가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처럼 흉내낸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삶의 흐름 속에서 우연한 마주침들을 긍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을 변화의 흐름 속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동성 말고도 능동적 되기가 또한 가능하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봄으로써 나 자신의 삶 전체의 지평을, 들뢰즈의 말로 하면 삶의 선적인 흐름을 껑충 뛰어넘으며 더 성숙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가 랭보의 시구 '나는 타자이다'를 인용하며 칸트의 경험적 자아와 초월론적 자아를 균열시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순전히 자기 자신에 머무는 정적인 칸트적 자아에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발생적인 들뢰즈적 자아로 이행함으로써, 다른 사람 되기라는 존재론적 윤리학의 새 지평이 열린다는 것이다.
4. '다른 사람 되기'라는 공통분모
헤겔과 들뢰즈라는, 얼핏 보면 서로 완전히 대적하는 두 사상가는 이렇게 '타자가 됨'이라는 문제에서 서로 만난다.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존재 운동의 본질의 관점에서, 들뢰즈는 안티-본질주의적인 변용가능성의 관점에서 나 자신이 '다르게' 된다는 것이 곧 존재의 긍정적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다른 사람 되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실천적 반성이다. 그래서 이 다른 사람 되기는 나를 현재의 삶으로 국한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삶도 가능하게 하는, 매우 근원적인 활동인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해 봄으로써, 나의 삶에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여 성숙한 자기로 자기 내 복귀하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의 유작 『막간』에서 "우리가 감히 삶을 우리 자신으로 국한시킬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삶은 비개인적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우리의 삶은 단순히 '나 자신'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 자신'에 대한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통해 점차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삶 자체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G.W.F. 헤겔, 『정신현상학 1』 김준수 옮김, 아카넷, 2022.
질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 전승화 옮김, 동문선,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