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오류

루소는 직접 민주주의자를 지지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사회 계약론> 등지에서 대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대신에 소규모 직접 참여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지지한다. 한편 후기 저술에서 그는 국가적 규모에서 인민 주권을 실현하는 최선의 형태로서 선출 귀족정을 옹호하기도 한다. 즉, 루소 철학에는 다소간 간극이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 턱을 비롯한 학자들은 루소가 초기 견해를 수정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을 제공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루소는 근대 상업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조건을 탐구하는 시도를 후기에 펼쳤으며, 그 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소의 ‘주권(sovereignty)’과 ‘통치(government)’를 구분을 주목해야 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귀족에게 일반 의지를 실현하고 시행할 책임이 부여되어 그들이 일상적인 법 제정과 정책 입안이라는 과제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즉 귀족이 통치하는 정체에 위임되는 경우에도 어떤 정체를 인민 주권을 잘 보존하는 민주적인 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르비나티의 경우, 루소의 주권과 통치의 구분에 더해 의지와 판단을 구분함으로써, 인민의 대리인은 판단과 관련된 통치를 책임지나, 의지는 언제나 여전히 전체 인민의 특권으로 남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루소 해석에 따르면, 주권은 최종 결정권을 갖는 실질적이고 강한 권력을 의미하고, 의지에 따른 결정을 형성하고 그에 대해 반성하는 판단은 약한 권력이다. 그래서 법안 표결에 참여하는 일을 포함해 최종 결정에 앞서 대리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주권 행위가 아니라, 판단 행위이다. 결국, 루소의 기획에서 말해지는 위임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기획은 여전히 직접 민주주의이다.

한편, 최종결정권이나 주권의 의미에 관한 해석이 다양한데, 앞서 논한 우르비나티와 턱의 해석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두 용어에 관한 우르비나티의 해석에 따른다면, 의회에서 표결된 모든 법률은 인민에 의해 승인되므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이 같은 직접 민주주의 모델에서 시민에게 요구되는 참여는 극도로 피상적이고 단순한 투표행위로 축소되나 상당히 빈번한 것이다.
반면 최소주의적 해석을 옹호하는 턱에 따르면, 결국 정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것은 전체 인민이 ‘핵심적인’ 입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지만, 통상적으로 입법 기능과 같은 경우는 실질적인 개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모델에서 민주적 주권은 단지 헌법 수준에서 추구되고 발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현행 선거 민주주의 제도가 사실상 과두제와 기이할 정도로 닮아 있는 상황이나 인민 주권이 실현되는 드문 계기인 국민투표에 관한 현대적 이해와도 잘 들어맞는다.

어쨌든 두 해석 모두 주권이 수반된 대의제라는 견해를 거부하면서도 통치 수준에서는 대의제를 수용함으로써 루소에게 발견되는 시기적 간극을 좁히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루소에 대한 제시된 루소의 해석들이 옳다면, 이는 루소의 이론뿐만 아니라 루소에 기반한 현대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엇보다 큰 오류는 민주적 주권을 최종결정권을 갖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곧 의제 설정과 숙의와 같이 결정의 순간에 앞서 이뤄지는 판단이 민주적 주권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이고, 판단과 관련된 행위들을 인민으로부터 손쉽게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1) 대부분의 정치적 의사 결정 권력의 토대는 의제 설정과 의제 관리에 있다는 현대 정치학의 통찰에 비추어 봤을 때, 루소의 민주주의는 막대한 권력을 인민에게 부여하기보다는 대리인에 부여함으로써 민주적 주권을 상당히 약화하기 때문이다. (2)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이의 공적 숙의가 정치적 정당서의 주요 원천에 해당한다는 현대 정치철학의 통찰에 비추어 봤을 때는, 루소의 민주주의는 결정적 숙의 단계를 관료나 귀족에게 위임한다는 점에서 조금도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의 비판은 직접 민주주의에 관한 루소의 이상이 직접 민주주의나 숙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염두에 둔 형태와 매우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규범적으로 호소력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출처: 랜드모어 2024, c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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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가 직접 민주주의를 지지했는지도 저에게는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이런 논문(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 - 역사비평 - 역사비평사 : 논문 - DBpia), 또는 포스팅과 그 코멘트들 (이우창)을 좀 인상깊게 읽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루소를 직접민주주의의 대표적 지지자로 읽는 논법이 적어도 요새 학계에서는 없어진 것인가 생각했는데, 2024년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지성사학계와 정치학계가 별 교류 없이 따로 노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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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루소도 잘 모르고 지성사학계에 대해서는 아예 몰라서 아쉽게도 적극적으로 어떤 의견을 개진하지는 못하겠네요. 다만 요새 루소-켈젠 쪽을 보고 있는데 예전에 댓글 다신 것이 생각나서 돌아와 댓글을 달아봅니다.

언급하신 논문을 대강 스키밍했는데, 루소가 직접 민주주의 지지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접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결론말이에요. 민주주의에 관한 위 논문의 전반적인 논의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직접) 민주정은 수립되기도 어렵고, 수립된다고 한들 무너지기 쉽다'로 보이기 때문이에요.

인민의 실제 덕성 상태를 반영하여 인민주권의 원칙에 충실한 입법을 이루어내면 인간이 타고난 자유를 지키며 사회 상태에서 정치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것은 평등이 지배하고 사치가 없는 소국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국에서조차 민주정은 너무나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하므로, 인간이 운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오직 신들에게서나 가능한 것이다. (457)

그리고 아마 지성사학계와 정치학계가 따로 놀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본문에서 언급된 리처드 턱은 대표적인 지성사 연구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성사 중에서 정치사상사 연구자는 정치학과에 소속인 경우가 많은데 (턱도 정치학과 소속), 우르비나티나 랜드모어가 1급 정치 이론가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이 루소와 직접 민주주의 사이에 거리를 두려는 지성사학계의 시도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지금 속한 학교의 박사 과정 선생님 한 분도 정치학 소속인데 지성사 연구—특히 루소!—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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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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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사상을 이해하기 어렵군요. 직접 민주주의를 한다는 말인지 아닌지? 깊게 파고들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그냥 원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개체는 모여 복합체를 창발합니다. 세포가 인체가 되고 개인은 국가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개체의 속성은 복합체의 속성으로 창발됩니다. 개인만 살 때 자유롭지마 국가가 되면 법이 생기고 권력이 나옵니다. 국가 권력은 개인의 자유에서 승화된 것입니다. 국가 권력은 신이 준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위임받는 형식으로 창발된 것입니다. 루소의 일반 의지도 각 개인이 위임한 의지의 최소한 공통 집합을 의미하지요. 창발 과정으로 이해하면 루소의 일반 의지는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일반의지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려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대의원을 뽑아야하고 뽑힌 대의원이 일반의지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상적인 이론을 세우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기체를 이해하기 위해 이상기체방정식을 도입하지만 어느 기체도 이상기체 방정식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이상기체방정식을 폐기하지 않습니다. 기체 현상을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루소의 일반의지도 저는 기체 방정식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지만 정치가 일반의지대로 구현되기는 어렵지요. 과학자들이 이상기체방정식을 인정하면서 현실 기체를 다루듯이 루소도 비슷하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일반 의지 덕분이 왕권신수설같은 인간을 얽매는 제도가 사라졌다는 점은 다행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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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요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