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존엄한가? - 한강, <소년이 온다>

다음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 작품에 대한 제 독후감입니다. 제목의 주제에 대해 학술적 또는 이론적 지식은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해당 주제에 대한 선생님들의 조언 또는 견해를 구합니다.

< 소설 읽기: 소년이 온다, 한강 >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p.134

철학독서모임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호소하셨습니다. 감정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인데요. 저도 읽으면서 몇몇 장면에서 눈가가 시큰거리기도 했습니다.

한강은 작품 곳곳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하찮은(?) 측면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망 후 신체가 부패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장면(1장),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가족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영재가 먹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물을 보이는 장면(5장, 120쪽), 열십자로 쌓여 있는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는 혼령이 자신의 죽은 몸에 ‘부끄럽고 증오스럽다’고 느끼는 장면(2장, 53쪽)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면서, 한강은, 위 인용구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라는 “인간존엄성” 사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요. 한강이 실제로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철학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인지는 물론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서술자의 시각이나,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의 주제가 인간존엄성 비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된 테마는 분명 인간의 폭력성이겠지요. 한강은 그러한 인간의 폭력성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비교적 객관적이고 잔잔한 문체로 묘사합니다. 다만, 폭력성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 역시 존엄성의 측면에서 문제시될 수 있다는 점을 한강이 암묵적으로 작품에 담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추측입니다.

좋은 소설은 여전히 정신적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순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과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 좀 더 소설의 세계를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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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인권에 대한 로티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지지합니다. "인권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쿼크가 존재한다."는 주장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층위에 놓인다는 설명이요. 쿼크가 객관적인 만큼이나 인권도 객관적이지만, 인권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만큼이나 쿼크도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입니다.

The question of whether there really are human rights is, from the point of view I am proposing, as pointless as the question of whether there really are quarks. Human rights are no more or less “objective” than quarks, but this is just to say that reference to human rights is as indispensable to debates in the UN Security Council as is reference to quarks in debates in the Royal Society. The causal independence of quarks from human discourse is not a mark of reality as opposed to appearance; it is simply an unquestioned part of our talk about quarks. Anybody who doesn’t know this fact about quarks is as unlikely to grasp what they are as is somebody who thinks that human rights were there before humans. We can say, with Foucault, that both human rights and homosexuality are recent social constructions, but only if we say, with Bruno Latour, that quarks are too. There is no point to saying that the former are “just” social constructions, for all the reasons that could be used to back up this claim are reasons that would apply to quarks as well. (R. Rorty, Truth and Progres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p. 7-8.)

인권이 정말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제가 제안하는 관점에서 볼 때 쿼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만큼이나 요점이 불분명니다. 인권이 쿼크보다 더 "객관적"이거나 덜 객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유엔 안보리 토론에서 인권에 대한 언급이 왕립학회 토론에서 쿼크에 대한 언급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쿼크가 인간의 담론으로부터 인과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 현상과는 다른 실재의 표시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쿼크에 대한 논의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부분일 뿐입니다. 쿼크에 대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인권이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이나, 쿼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푸코와 함께 인권과 동성애가 모두 최근의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브루노 라투르와 함께 쿼크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때만 가능합니다. 인권이 '단지'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요점이 없습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모든 이유가 쿼크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유이니 말입니다. (DeepL 번역 및 인용자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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