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내 철학과 학부 재학중인 한 학생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회원가입을 해 글을 작성해봅니다.
커뮤니티의 성향과 규칙을 아직 파악하지 못해, 만약 제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면 편히 지적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론은 이쯤 하고, 본론입니다.
[과학은 사회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가 제 토론의 주제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너무 복잡한 의미 관계의 문장이네요.. 단어의 범위를 지정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란, 경험론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검증되었다고 믿는 명제들입니다. "있음"과 "원리"의 혼합인 "이론 명제"들의 종합....... 어째 설명하면 설명할 수록 모호해집니다만... {'뇌'가 있다.} 정도의 예시를 들면 괜찮을 것 같네요. 다음으로 사회란, "2명 이상의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상태의 집단"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회 속의 위치는 그것이 그 사회 속에서 가지는 권위(authoritas)가 되겠네요.
전공 수업을 듣다보면 교수님들이 과학들을 많이 끌어오십니다. 대표적으로 "통 속의 뇌"같은 개념입니다. 생명-현상, 호르몬 작용이 어떻냐느니~ 그런 말들이지요. 철학을 공부하기 이전에 물리학 전공을 희망했던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과학의 개념과 그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 이해가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듣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과학을 근거로 들어 주장을 정당화 하는 작업이랑...
신을 근거로 들어 주장을 정당화 하는 작업이랑...
인간을 근거로 들어 주장을 정당화 하는 작업이랑...
다른 점은 정당화 근거일 뿐이지, "정당화"라는 작업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진리'치'죠... 저에게는 미신으로 치부된 모든 것들과 과학이 딱히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냥... 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냐의 차이일지도 모르죠... 중세, 근대, 현대... 다 똑같다고... 좀 허무한? 생각이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의견인데... 다른 분들의 다양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질문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말씀하신 내용은 과학철학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입니다. 글쓴이님의 견해는 과학에 대한 일종의 반실재론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견해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견해들을 촉발시킨 고전적인 책으로는 다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책으로는 다음이 있죠.
한 가지 사소한 문제이지만, '진리'와 '진리치'라는 구분이 다소 어색합니다. 보통 '진리치' 혹은 '진리값'이라는 말은 철학에서 'truth value'라는 용어의 번역어입니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용법이 좀 다양하기는 하지만,) 보통은 어떤 명제가 '참/거짓' 중 어떤 특정한 값을 가진다는 것을 표현할 때 '진리치' 혹은 '진리값'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요. 그러니까 '진리치' 혹은 '진리값'은 '참'이나 '거짓'을 의미하고, '진리'는 그 진리값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항으로서 '참'을 의미하는 거죠.
이 사이트에 익숙하지 않아 좀 불편하지만 ...
처음 질문의 요지가 과학적 진리와 다른 분야 진리가 별 차이가 없다는 질문으로 보아 차이가 있다고 저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반론을 보니 처음 질문의 수준을 뛰어 넘는 군요. 그렇지만 과학적 진리는 다른 것과 다릅니다. 다른 것은 사실은 진리도 아니지요. 과학적 진리는 과학자가 동의했고 현실과 일치합니다. 진리의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는 사람이 약속한 겁니다. 사람 약속은 늘 바뀝니다. 현실과 일치하는 이론은 사람이 약속한 진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공리는 너무 단순하여 약속없이 받아 드립니다. 이렇게 받아 드려도 공리가 위배된 적은 없습니다. 물론은 약속없이 받아 드리는 공리의 엄밀성은 과학에서도 하나의 문제이지만 이 공리를 받아 드렸다고 문제가 된 적은 없습니다.
과학에서도 다른 이론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공학적 이론이라 늘 바뀝니다. 과학자들은 공학 이론은 늘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보고 있습니다. 복잡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말씀이 엄밀하지 않다는 인상이 드네요. (1) 1+1=2가 역사 이래 바뀐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1+1=2가 진리라는 점을 보장하진 않습니다. 1+1=2는 공리와 그에 근거한 정의에 따라 나온 것이고, 공리는 증명 없이 참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죠. 우리 마음 및 세계와 독립적으로 참인 진리가 아니라요. (2)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해서 과학 이론으로 수용되는 것이라는 주장에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언급하신 청동설과 지동설의 사례에서도, 모든 사람이 지동설을 참이라고 받아들여서 청동설이 폐기되고 지동설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죠. 지금도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 이론이 제시되지만, 해당 과학 이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다른 과학 이론 또한 제시됩니다. (3)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었다는 말씀, 관측의 한계로 인해 특정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변화될 수 있다는 말씀은 현상에 대한 과학의 이론은 미신이나 신앙 그리고 법과 달리 정확하며 바뀌지 않는다는 말씀이나 과학은 진리라는 말씀과 모순됩니다. 고전적으로 진리는 정의상 변화 불가능성을 내포합니다.
과학철학의 작업에 대해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과학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현장 과학자들의 작업이 틀렸다거나 오류가능하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 그런 과학철학자는 없을 뿐더러, 위의 쿤이나 파이어아벤트의 작업도 그런 작업이 아닙니다.) 과학철학자들은 단지 과학의 명제들이 지닌 형이상학적 함의나 인식론적 함의에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예로 드신 1+1=2를 사용하자면, 수학에서 이런 '수'나 '덧셈' 등은 페아노 공리계에 근거하여 정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묻는 것은 "우리가 페아노 공리계를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공리계는 단순히 발명된 것인가, 발견된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1+1=2가 틀렸다거나 오류가능하다는 식의 관점을 전혀 함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수학은 그 공리들을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자명하게 받아들이지만, 철학은 다시 한 번 그 공리들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혹은 공리들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그 공리들이 우리에게 그렇게나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일 뿐입니다.
수학과 과학의 층위는 매우 깊습니다. 괴텔이라는 수학자는 무결함이 없는 공리계는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깊게 내려가도 무결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따라서 수학체계, 과학체계는 적어도 증명없는 몇개 공리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과학적 진리를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논의는 의미가 없습니다.
쿤이 과학혁명의 어휘를 주조한 것은 이런 수학의 최하위단에서 검토한 것이 아니라 천동설이라는 매우 상위 수준의 현상에서 얻어낸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과학혁명이라는 어휘가 과학에 대한 통찰을 넓히 것은 인정하겠지만 과학의 실제를 대변한다고 저는 볼 수 없습니다. 특히 과학이론의 통약 불가능성 등은 대다수 과학자들이 수용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쿤의 과학철학이 과학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가 처음 문장에서 철학이나 과학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라고 언급한 것도 어휘에 매몰되어 현실에서 벗어나는 점을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yeonsub님은 괴델의 theorem으로부터 "수학체계는 증명되지 않는 공리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결론을 내시는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이해하기로 괴델의 theorem은 공리가 증명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수학체계 안에서 원래는 증명돼야할 문장이 증명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괴델의 theorem이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당연히 공리는 증명되지 않는 것이고, 그에 더해서 공리가 아닌 것들이 증명이 안 된다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 괴델의 theorem이겠지요. 애초에 공리가 증명되지 않는다라는 걸 증명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싶기도 하고요. SEP 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예 저의 주장을 잘 이해하셨고요. 문제점도 잘 지적했습니다. 저는 과학을 전공했고 수학은 근본을 파다보니 흥미를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괴텔의 증명도 여러번 보았지만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한계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공리는 그냥 수용하고 그 공리계에서 증명하기 어려운 정리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분이 많기는 합니다. 그래서 증명이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괴델 핑계를 대면서 참도 거짓도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저는 증명되지 않는 정리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받아 드리지만 공리의 증명 불가능성으로 좀 받아 드리는 편입니다. 공리를 그냥 받아 드린다는 논리는 좀 이상하기는 하거든요. 공리보다 한단계 낮은 세계에서 보면 공리도 분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요.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크리드 기하학의 공리는 다른데 이는 평면인지 비평면인지 차이에게 기인합니다. 그런데 만일 한 단계 더 근원적인 세계에서 보면 두개를 통일시키는 새로운 공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괴델도 메타수학의 논리로 자신의 증명을 완성했는데 수학을 한단계 분해한 세상이 메타수학입니다. 저는 과학하고 과학철학이 더 환원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고요. 저가 과학을 하면서 얻은 체험에 오염되어 있으니 괴델의 해석이 좀 다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엉터리는 아니라는 생각은 있습니다. 저가 또한 파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한가지 덧붙이면 한단계 아래에서 새로운 공리를 발견하면 현상 세계를 설명하는 폭은 넓어집니다. 그렇지만 한 단계 아래 공리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따르면 자신의 완전성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의 심원 물질의 심원을 찾아가지만 어떤 경우에도 완전성을 허용하는 이론은 없습니다. 찾는 과정에서 기쁨과 찾은 공리에서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일 뿐..
글이 좀 길었습니다만 공리의 증명불가능성을 괴델로 해석했다는데 대해서는 저 자신도 문제 의식을 느낀 것이니 정확한 지적임은 인정합니다.
괴델의 정리는 제 철학적 전공과 다소 거리가 있다 보니 제가 이 주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부담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로, 제1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의 기본 공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괴델이 말하는 것은 수학의 체계 내에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한(true but unprovable)' 진술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진술은 소위 '괴델 진술' 혹은 'G 진술'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일컬어집니다. 일상적 언어를 통해 억지로 표현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형식의 진술이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한 진술입니다.
G 진술: "이 진술은 증명 불가능하다."
괴델은 이러한 진술을 '괴델수'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 지시적이지 않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기호 정의법을 생략한다면, 괴델 진술은 대략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g: ~(∃x)Dem(x, Sub(n, a, n))
그래서 괴델이 결국 보여준 것은,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일종의 '거짓말쟁의의 역설'과도 매우 유사한 형식의 진술이 수학의 체계 내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진술은 자신의 정의상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하고(제1불완전성 정리), 그 진술을 공리계 내에서 증명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다 보니, 공리계의 무모순성을 그 공리계 내에서 증명 불가능하다는 결론까지도 도출되는 것입니다(제2불완전성 정리).
참고:
그래서 저로서는 괴델의 증명으로부터 "수학체계, 과학체계는 적어도 증명없는 몇개 공리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아울러 과학철학이 결코 과학이나 수학에서 '공리'처럼 받아들이는 진술들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실재론적 과학철학조차도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철학에서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은 그 공리에 해당하는 진술들을 모두 인정한 상태에서, 그 진술들이 우리에게 '실재'를 반영해 주는지, 아니면 그 진술들이 단순히 '사회적 합의'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 벌어집니다.
제2불완전성 정리까지 보았군요. 선생님의 답변에 이미 진술했듯이 공리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은 공리를 증명 없이 받아 드릴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저가 이야기하는 주장과 유사하지요.
그리고 공리의 논쟁을 벗어나면 수학에서는 결함이 없습니다. 과학도 수학의 공리에서 쌓아 올린 것이므로 문제가 없고요.
문제가 없는 과학에서 반실재론이라는 어휘는 제대로된 어휘가 아닙니다. 공리가 틀리지 않으면 그 위층은 천편 일률로 전개되는데 사회적 합의가 왜 필요합니까?
이런 논의는 아마 추상명사를 같은 것을 가지고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과 동일하지요. 사랑이 존재하나요? 사랑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동일하게 과학적 현상도 관계를 나타냅니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람에게는 과학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존재라는 척도로 논쟁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까요? 그래서 반실재론은 잘못된 어휘라고 봅니다.
공리가 증명될 수 없다는 뜻은 증명이 무엇인가에 따라 갈릴 수도 있는 논쟁이겠지만,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proof의 정의에 따르면 공리 자체는 자기 근거적이기 때문에 공리는 공리에 의해 증명됩니다.
그리고 공리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 자체는 공리를 증명 없이 받아 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구요
무모순에 대한 증명이 없다는 것과 그것이 증명없이도 수용가능하다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무모순에 대한 증명이 없다는게 그 진술이 곧 참 임을 보장한다는 건 아니죠.
물론 괴델의 완전성 증명 때문에 증명가능성과 모델에서의 참 개념이 동치로 간주되는 경우는 있어서, 증명의 존재에 대한 사실을 근거 삼아 참인 진술에 대한 수용 여부를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여기서의 문제와는 별개처럼 보이구요.
그리고 괴델의 정리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 뿐이기 때문에 그 결론이 말하는 대상의 후보군에 공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할 것이다는 예측은 뭐 사람마다 다르니 그리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할말이 없겠다마는 적어도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말만 따지자면, 괴델의 정리가 도출하는 결론의 후보군들 중에서 공리는 반드시 제외되어야 합니다.
저가 수학을 깊게 파는 사람은 아니지만 님의 주장은 제가 배워온 진리와 좀 다릅니다. 공리를 참으로 둘 수도 있고 거짓으로 둘 수도 있습니다. 평형한 두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공리를 참으로 두면 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고 거짓으로 두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옵니다. 공리를 선택하는 정도에 따라 수학 과학 이론 체계가 달라집니다.
예 좋은 질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공리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 말은 공리가 증명은 되지 않지만 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몇 개의 공리를 가지고 수학체계를 세워 가지요.
그렇지만 증명되지 않는 공리를 거짓으로 두고도 수학체계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공리는 증명이 되지 않으니 참으로 두든지 거짓으로 두든지 자유롭지요.
중고등학교에서는 공리를 참으로 두는 것만 배웠지요.
예를 들어 두 직선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인 공리이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거짓인 공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는 유클리드 수학체계, 하나는 비유클리드 수학체계가 각각 나타납니다.
유클리드 수학체계나 비유클리드 수학체계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거짓의 공리도 의미가 있고 참의 공리도 의미가 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더 근본적인 지하층을 파면 두 공리를 구분하는 더 근원적인 공리가 있을 거라는 느낌을 줍니다. 유클리드, 비유클리드의 경우에는 공간의 평면성입니다.
이를 일반화 시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공리보다 더 근원적인 공리가 있을 수 있다는 통찰을 줍니다.
그래서 공리는 항상 참이지만 이를 거짓으로 두고도 새로운 수학을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이야기 합니다.
이는 저가 수리 철학을 보면서 전문 수학가의 주장을 보고 느낀겁니다. 타당하다고 저는 생각했지만 저는 대학 때 수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수학을 매우 좋아한 사람입니다. 암튼 저의 주장은 중고등학교 수학 수준을 한층 뛰어 넘는 것이니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세오.
두 분이 동일한 주장을 하고 게시군요.
공리외에 참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정리가 있다. 이것이 두분이 말씀하는 요지이지요. 예 저도 이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공리는 다른 문장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겁니다. 즉 다른 문장을 공리로 두면 원래 공리는 증명할 수 없는 괴델의 문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리는 고정된 형식의 문장이 아니라 등가의 다른 문장으로 치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괴델의 제2 정리에서 공리계의 불완전성을 이야기 합니다. 이 표현은 공리도 증명하고 싶지만 공리는 그냥 약속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는 한계를 제시한 것이라고 봅니다. 학문에서 약속은 비이성적인 행위이지요. 즉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약속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공리의 한계를 이야기 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냥 요지는 공리는 증명의 정의상 증명가능하기 때문에 불완전성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괴델의 정리를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이를 러프하게 말하자면, 참이지만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이며, 명제가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 할 때, 어떤 명제의 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해당 명제에 대한 증명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제가 계속 얘기하는 것은 모든 공리는 그 자신에 대한 증명이 있는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해당 체제에서 증명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유클리드 공리는 유클리드 체제 내에서 증명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말을 지금 계속 곡해하고 계시는데, 이 문제는 공리를 다른 문장으로 치환하거나 변형되는것 따위의 문제랑은 전혀 별개입니다.
yeonsub님이 계속 주장하시는 바는 괴델의 정리가 공리를 증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제시한 것이라는 괴델의 정리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주장하시고 계시는 것인데, 그 해석은 정리가 말하는바에 따르면 틀린 것이란 말입니다.
공리는 증명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괴델 증명의 결론에 공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관련하여 증명의 정의가 어떻게 형식 논리에서 정의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는게 왜 공리는 해당안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공리는 자체의 정의 때문에 증명이 됩니다. 정의로 증명하는 논리가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신이 완전한게 어떤 체제에서 공리로 수용되면, 그 체제 내에선 신이 존재한다는게 자체로 증명이 되는거죠. 그런데 왜 그런 비유를 여기서 꺼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말을 누가 믿든 말든 해당 체제 내에선 신은 정의상 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증명의 존재여부를 얘기하는데 왜 사람들이 그 증명을 믿겠느냐에 대한 설득력이라는 논의되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끌고 오나요.
지금 얘기하는 것은 메타 논리에 대한 규칙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증명은 뭐 거창한게 아닙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도출될 수 있으면 증명이 된거죠.
제가 말하는건 계속 그것이구요.
메타 논리상에서 한 명제가 증명되었다는 것을 러프하게 말하자면, 공리와 몇몇 문장들을 통해 유한한 추론단계들을 통해 결론을 그 명제로 가지는 명제들의 순서적인 나열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리는 공리이기 때문에 공리로부터 공리가 도출이 되죠.
이러한 증명이 언뜻 보기엔, 동어 반복적처럼 보일 순 있지만, 그래서 메타 논리 단계에서 정의된 증명의 정의에 모순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있다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동어반복적인 것처럼 보이든 말든 정해진 논리 규칙 따위에 위배되지 않으면 그건 증명입니다. 그리고 공리는 증명이 되니 증명도 반증도 안되는 명제가 아닌 것이 되겠구요. 그래서 괴델이 말하는 불완전성의 대상도 되지 않지요.
이러한 증명의 개념은 논리학의 교과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내용이니 살펴 보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