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저는 기본적으로 스피노자의 세계관을 좋아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연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가능세계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필연적으로 단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7+5=12"
"돌을 놓으면 땅으로 떨어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첫 번째 명제만이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저는 두 번째 명제 역시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스피노자는 실체,신,자기원인과 같은 개념에 의거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를 이끌어내는데, 저는 그런 것 없이 혹은 그런 과정 없이 위와 같은 명제를 필연적 참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우연적 존재, 우연적 명제와 같은 개념들을 다 삭제시키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말고도 다른 가능한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돌을 놓았는데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 세계는 충분히 가능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돌을 놓았는데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 세계가 존재할 수가 있다면, "돌을 놓으면 땅으로 떨어진다."는 명제는 우연적 명제가 아닌가? 라고 반문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조건을 현재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로 국한한다면, 위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인 것이다. 즉 현재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자연 법칙은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원인은 항상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는 인과성을 규칙성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나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연 명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p 는 우연명제다 iff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p가 참이다. 그리고 필연명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p는 필연명제다 iff 모든 가능세계에서 p가 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돌을 놓았는데 떨어지지 않는 가능세계가 있다면 "돌을 놓으면 떨어진다"는 정의 상으로 우연명제입니다. 조건을 우리가 사는 인간세계로 국한하고 그 안에서 명제가 사실인 것을 보이는 것과 명제의 우연성/필연성과는 관계가 크게 없습니다. 그냥 이 세계에서 그 명제가 참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명제의 필연성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닌 세계들에서 참인지의 여부에 따라 달렸습니다.

아마 구리님이 염두에 두신 건 New Actualism이란 흐름 같습니다. Vetter - Modality without Possible Worlds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자유의지에서도 이 주제로 많이 논의가 됩니다. Lewis - Are We Free to Break Laws?, Vihvelin - Free Will Demystified, Clarke - Dispositions, Abilities to Act, and Free Will, List - Defense of Alternative Possibilities 정도가 있네요. "x할 수 있었다"라는 말을 가능세계로 이해할지, 아니면 성향이나 본질과 같은 걸로 이해할 수 있는지, 그러면 자유의지는 어떻게 이해돼야하는지에 관한 논문들입니다.

저번부터 굉장히 테크니컬한 주제들을 공격하고 계십니다.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조금 어려운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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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드립니다.

이곳에 당분간 글 올리는 것은 쓸모 없으니, 소개해주신 것들을 충분히 공부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 있어 하는 주제들이 말씀하신 그런 것인가요? 그렇다면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괜히 시간 낭비 일거 같아서요. 그저 재미 만으로 접근하기에는 뻘짓이 될 거 같네요.

조금 어렵지요. 근데 뭐... 지적 고통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들어가볼만한 영역들입니다. 결국에 철학을 하는 이유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고, 지적 고통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건 그대로 가치가 있겠지요.

딴 얘기지만, 저는 셀라스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대단한 철학자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저서나 논문들은 아직까지 번역된 것이 없지요? 어쩔 수 없이 AI번역에 기대야 겠네요.

셀라스는 제가 아는 게 없으므로 다른 분들에게 토스하겠습니다. 여기 셀라스 아시는 분들 많습니다.

아 네. 그렇군요.

yhk님처럼 문제를 바라볼 수도 있겠군요. 흥미롭습니다!

제 방식대로 Guri님의 생각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것 같습니다.

(1) 7+5=12
(2) 공중에서 돌을 놓으면 땅으로 떨어진다.

이 두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입니다. 다만, (1)은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반면, (2)는 물리적으로 필연적인 명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필연적 명제라는 것은 yhk님이 제시한 정의대로

p가 필연적이다 iff 모든 가능세계에서 p가 참이다.

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모든"이 가리키는 논의영역이 맥락의존적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수업에 들어가서 "모든 분들은 과제를 제출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모든"은 그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 전부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가능세계"를 어떤 범위로 잡느냐에 따라 필연성의 의미 범위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필연성에 관해 말할 때는 보통 (1)이 가진 필연성으로 말하지만, 다른 층위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령,

p는 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iff 현실세계와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p는 참이다.
p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ff 현실세계와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p는 거짓이다.

라는 식으로 제한할 수 있죠. 마찬가지로 "기술적 필연성" 혹은 "기술적 불가능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조건을 현재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로 국한한다면"이 의도하는 것은 위와 같이 필연성을 따지는 가능세계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2)는 가장 넓은 의미로서의 필연적 명제는 아니지만, 물리적으로 필연적 명제이긴 합니다.
선생님의 의견은 가능세계 의미론에서 충분히 포섭할 수 있습니다.
그와 별개로 규칙성이나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분석하는 시도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아마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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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명제가 물리적 필연성일 수도 있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합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구리님이 원하시는 필연성이 물리적 필연성이 아닌 형이상학적 필연성인 것 같아요. 근데 그때부터는 심리학의 영역이니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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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이유율이 참이라면, 필연주의 역시 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하나의 우연적인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겠죠.

나는 지금 누워 있다는 명제는 충분이유율이 참이라면, 우연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능 세계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누워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명제 역시 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여기서 저의 혼란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가능 세계에 대해서 더 깊이 공부해봐야 겠습니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시작점이 같고, 모든 법칙이 같고, 충분이유율이 참이라면 모든 참인 명제는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다른 시작점이 하나가 있거나 법칙이 다르다면 세상은 다르게 흘러가겠지요. 그러면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현실세계에서는 참이 아닌 명제가 참일 수 있습니다. Lewis - Are We Free to Break the Laws?를 보시면 잘 나와있습니다. 루이스는 법칙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걸로 형이상학적 우연성을 이끌어내고 그걸로써 결정론이 사실이어도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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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