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형이상학정초>를 읽기 위해 <순수이성비판> 해제와 서문을 읽던 도중 질문이 생겨서 글을 올립니다. 백종현 역자는 칸트에게 공간과 시간은 결코 경험적이지도 않고 개념도 아니고 가장 순수한 직관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경험하지 않고서우리가 시공간을 표상할 수 있나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공간을 경험하고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보니까 후천적으로 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우리가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못 보고 텅 빈 흰 공간에서 아무것도 없이 생활한다고 하더라도 시공간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을 때 저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즉 시공간에 대한 생각이 어떤 외부 감각에 의해 촉발되 어 생겨났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칸트도 태어날 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느끼면서 살았으니 그걸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해주실 분이 있을까요?
+) 추가적인 질문, 만약 시공간이 순수한 직관이 맞다면, 그것이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객관적 실재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요?
칸트 철학에서 '선험적'(a priori)은 우선 실재적으로 경험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경험에 앞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가 실제로 제2판 서론의 첫 문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B2)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그래서 "시간상으로는"(B1) 경험과 함께 인식이 시작되지만, 논리적으로 봤을 때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선험적 인식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중 직관에 속하는 것이 말씀하신 공간과 시간 표상이 됩니다. 그리고 칸트는 순수 수학의 예시를 들면서 이것이 '선험적인' 종합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7+5=12라는 선험적인 명제는 우리가 점 7개와 점 5개를 '시간상에서' 덧붙이면 다음과 같은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사실 수학이 선험적 종합판단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칸트가 이것이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말한 점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관적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경험의 한계를 넘어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초월적 관념성' 또한 갖고 저 두가지가 동전의 두 양면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표상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경험에 앞선다는 것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논의를 이전에도 본 적이 있긴 한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칸트 공부를 할 때마다 제 머릿속에서 아주 흐릿하게 드는 의문 중 하나는 -물론 제 공부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 완전히 적절한 표현이 현재로선 떠오르지 않는데) 칸트 자신조차도 후험적으로 알게 된 것을 마치 순수하게 사고를 통해 인식해낸 것으로 착각하고 어떤 지식을 경험 이전부터, 경험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던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위에 언급한 하얀 방 예시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데 이 예시가 적절하지 않은 것일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칸트도 비슷한 예시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 서설』에서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손만 남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본 다음에, 그럼에도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 밖에 있어서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네요... 그런데 이것은 질문자님의 가정적 상황과 약간 다르죠.
사실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의 "경험의 유추들" 에서 '시간 그 자체는 지각될 수 없다'(A184=B227)고 말했습니다. 다만 시간상에 놓인 하나의 실체가 있어야지 시간이 인식 가능하다고 보았죠. 공간의 경우에도 "빈 공간은 없다"고 말하면서, 경험의 대상들이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질문자님이 제기하신 의문점에 중요한 내용이 되리라고 봅니다.
질문자님께서 칸트가 '자신도 후험적으로 알게 된 것을 선험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주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칸트의 근본적인 전제, 즉 수학이 선험적이라는 전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수학의 학문적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연에 스스로 집어넣은 것만을 인식한다'는 사고방식(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발견했고, 이로부터 공간과 시간이 그런 선험적 종합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표상이라고 생각했다고 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적인 문헌들이 여럿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 답변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만, 제가 추가적인 답변으로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분석적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x, y에 대해 "x는 y에 논리적으로 앞선다"라는 것은 대강 "x를 빼놓고는 y가 유의미하게 이해/설명/성립할 수 없다"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x가 y보다 먼저 알려져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x를 "공간", y를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으로 치환한다면, 곧 "'공간'이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에 논리적으로 앞선다"라는 진술이고, 이것은 곧 "'공간'을 빼놓고는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이 유의미하게 이해/설명/성립할 수 없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제게는 퍽 직관적으로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그리고 앞으로 가능한 모든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은 공간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 의미에서 공간은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에 대해 "선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술했다시피, 이 진술은 "'공간'이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보다 먼저 알려져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질문자님의 사고실험에서처럼 그 어떤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라면 애초에 "x는 '외부대상에 대한 경험'에 앞선다" 하는 진술이 무의미해지겠죠. 아마 칸트 역시 "외부대상에 대한 (인간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게만 공간 개념이 유의미하다" 라는 진술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저도 칸트를 읽으면서 글쓴이님과 비슷한 고민(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자라난다면 시공간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을 해본적 있는데, 제 생각엔 칸트에게 이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을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칸트의 주장은 정확히 말해서 '우리의 직관 형식에 시 공간 표상이 존재한고, 그 형식에 따라 외부 경험들을 받아들이는게 가능하다는 것'이니까요.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에 있다고 해도, 나는 내가 공간안에 위치한다는걸 경험 하고 시간이 흐른다는걸 내적으로 경험(칸트에 의하면 시간은 내감,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것과 관련됩니다)할 수 있습니다. 설령 내가 시간 공간 개념을 모른다해도 내 직관 형식에 있는 시공간 표상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직관에 위치한 표상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이 객관적 실재성을 갖고있다고 칸트는 말합니다. 단, 그런 객관적 실재성이 사물자체의 진짜 모습인지는 알수 없다는것이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감성학 1절 2절에 나와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