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의 규칙따르기 해석에 대한 크리스핀 라이트의 비판 알아보기

Crispin Wright의 논문이 Kripke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을 어떻게 해부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게요. 논리적 허점을 파헤치는 데 관심 있으신 분들께 흥미로울 겁니다.

Kripke의 해석 개요
Saul Kripke는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변(PLA)을 규칙 따르기 고려사항(RFC)의 직접적 결과로 해석합니다. Kripke에 따르면, 회의적 논변은 의미와 이해에 대한 사실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제 "녹색"을 "green"으로 의미했는지 "grue1984"(1984년 이후 파란색으로 바뀌는 개념)로 의미했는지, 이상화된 기억(과거 행동과 정신적 역사 모두 포함)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죠. 여기서 Kripke는 회의적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의미를 진리 조건이 아닌 공동체 내 정당화 조건으로 재정의합니다. 이를테면, "Jones가 '+'로 덧셈을 의미한다"는 명제는 Jones가 공동체의 '+' 사용 실천에 적합하게 행동할 때 정당화된다고 봅니다. 사적 언어는 공동체 참여가 불가능하니 의미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이죠.

Crispin Wright의 비판 - 회의적 논변의 문제
Wright는 Kripke의 회의적 논변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봅니다. Kripke는 과거 행동의 유한성을 들어(예: 내가 "녹색"을 사용한 경우는 유한함), 무수히 많은 대안 해석("grue"류)이 가능하다며 의미 사실을 부정하는데, Wright는 이 접근이 직관적 의미 인식의 비추론적 성격을 무시한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녹색"을 "green"으로 의미했는지 묻는 질문에, Kripke는 과거 행동과 생각에서 추론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Wright는 우리가 의미를 즉각 회상할 수 있다고 반박하죠. 이는 Goodman의 유도 문제("green" vs. "grue" 선택의 합리성)와 맞닿아 있는데, Kripke가 이를 "사실 없음"으로 단정하는 건 성급하다는 겁니다. Wright는 Kripke의 논변이 전통적 회의론과 유사한 전제를 공유하며(추론적 정당화 요구),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 어긋난다고 덧붙입니다.

Crispin Wright의 비판 - 투사적 의미와 회의적 해결책의 모순
Wright는 Kripke의 회의적 해결책이 내부 모순을 안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Kripke는 의미를 투사적(projective) 개념으로 재구성하는데, 여기서 "투사성"이란 의미가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는 진리 조건을 갖는 대신, 화자의 태도나 공동체의 실천을 세계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뜻입니다. 흄의 도덕 철학에서 "옳다"가 도덕적 사실이 아니라 감정을 투사하듯, Kripke는 "Jones가 '+'로 덧셈을 의미한다"가 사실이 아니라 Jones의 행동이 공동체 기준에 맞을 때 주장 가능한 조건을 갖춘다고 봅니다. 하지만 Wright는 이 접근이 진리 개념을 붕괴시킨다고 경고하죠. 의미가 투사적이면, 상식적 전제(문장의 진리는 의미와 세계 상태로 결정된다)에 따라 "S가 참이다"도 투사적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이 파랗다"의 진리가 공동체의 주장 조건에만 의존한다면, 객관적 사실성이 사라지고 모든 담론이 투사적이 됩니다. 이는 Kripke가 주장 조건을 사실처럼 제시하려는 시도와 충돌하죠—만약 "Jones가 '+'로 덧셈을 의미한다"의 조건 자체가 투사적이라면, 그 조건의 참도 보장할 수 없어 논리적 기반이 무너집니다. Wright는 Kripke가 이 문제를 모호하게 다루며(73쪽 Dummett 인용), PLA를 공동체주의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불안정하다고 결론짓습니다.

Wright의 대안 제안
Wright는 Kripke의 회의론에 맞서 의미를 비추론적이고 일반적인 의도(intention)로 재구성할 가능성을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녹색"을 "green"으로 의미했다는 건, 과거 행동이나 생각에서 추론하는 게 아니라, 당시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회상하는 데서 확인된다고 봐요. 의도는 유한한 마음에서 무한한 상황에 대한 규범적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데, 마치 "내 땅에 침입하면 고소한다"는 의도가 무수한 경우에 적용되듯이요. Kripke는 이런 상태가 불가하다고 보지만, Wright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도를 비추론적으로 알고 그 내용을 일반적으로 이해한다고 반박합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초점이 주관적 내용이 아닌 공동체 실천과 직관적 인식에 맞춰져 있다는 해석과 더 조화롭죠. Wright는 Kripke의 해석이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를 왜곡하고, 논리적 엄밀함을 잃었다고 결론짓습니다.

Wright, Crispin (1984). Kripke’s Account of the Argument Against Private Language. Journal of Philosophy 81 (12):759.

아마 여기에서 '유도'는 induction을 이야기하시는 거겠지요?

본문과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크립키 하면 서강올빼미에 올라왔던 크립키 관련 개쌉소리(?)가 떠오르네요. 위대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사학 및 브랜드마케팅도 천재적으로 잘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글이었죠.

1개의 좋아요

네, 맞아요. 여기서 "Goodman의 유도 문제"는 'induction'(귀납)을 뜻합니다. Nelson Goodman이 "green"과 "grue" 같은 대안 가설을 통해 귀납적 추론의 합리성을 질문한 그 유명한 문제죠. 제 문단에서 Kripke의 회의적 논변과 연결한 건, Wright가 Kripke가 과거 행동의 유한성에서 의미 사실을 부정하며 비슷한 논리적 난관을 마주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크립키 관련 쌉소리(?)는 저도 잘 모르지만, 찾아보니 @voiceright 라는 분이 쓰신 글이네요. "분절적 인용"이니 "어그로 끌기"니 하며 재치 있게 쓰셨던데, @GOYS 님 말씀대로 수사학과 마케팅이 철학만큼 중요한 시대를 꼬집은 점이 인상적이네요. (다만 @voiceright 님의 말대로 크립키의 논의가 마케팅일 뿐이라면) 이런 식의 전략은 반짝 주목받을 뿐이니,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인용되는 글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깊이보다 화려한 포장에 치중하면 결국 빛이 바래기 마련이죠.

이런 수사적 전략은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던 시기에나 먹혔던 방식 아닐까요? 사람들이 바이럴에 순수하게 반응하던 때라면 몰라도, 요즘은 다들 정보가 넘쳐나니 그런 어그로에 쉽게 넘어가지 않죠. 피터 웅어(Peter Unger)를 떠올리게 하네요. 웅어는 70년대에 『Ignorance』로 회의주의를 화려하게 포장해서 주목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논변의 과장이 드러나 지금은 많이 언급되지 않잖아요. 크립키의 브랜드 마케팅도 비슷한 운명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