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얼 데닛은 자신의 저서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3장: 이유의 기원에 관하여>에서 진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창조주와 같은 고대의 이데올로기 없이도 자연 현상들의 합리성을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생물권은 설계와 목적과 이유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시대에 뒤쳐진 목적론을 새로운 후기 다윈주의적 목적론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데닛은 진화의 과정에서 이유와 이유 이해력(reason-appreciation)이 차례대로 출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특히 이유가 이유 이해력보다 먼저 출현하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가령 흰개미 성의 구조와 형태에는 이유들이 있지만, 성을 건축한 어떤 흰개미도 그 이유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개미는 성의 구조를 계획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성을 짓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반면 가우디가 남긴 성당의 형태와 구조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들은 가우디의 이유입니다. 가우디에게는 자신이 창조하기로 마음먹은 형태에 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흰개미 성과 가우디의 성당 모두에 이유가 있지만 흰개미와 달리 가우디는 그 이유를 표상하고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유들은, 이유 표상자(reason-representer)인 우리가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진화에 의해 추적된 이유들을 나는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라 불렀는데, 이 표현은 확실히 몇몇 사상가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그들은 내가 모종의 유령을 불러내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들은 수나 질량중심이 그러하듯 전혀 문제적이지도 않고 유령 같지도 않다. 사람이 산수를 표현할 방식을 고안하기 전에도 육면체는 8개의 모서리를 지니고 있었고, 소행성들의 질량중심은 그 개념을 생각하고 계산해낼 물리학자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유들은 이유추론자(reasoner), 즉 이유를 생각하는 존재들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왔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며 아마도 불건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내가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기를, 그리고 이유-인간 탐구자들 또는 그 어떤 마음들에 의해 표상되거나 표현되기 전에 존재했으며, 진화에 의해 밝혀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음을 확신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데니얼 데닛,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3장)
저는 데닛의 이 논의를 보면서 YOUN님의 블로그에서 본 브랜덤의 철학이 떠올랐습니다. 블로그에 따르면 브랜덤은 인간이 속한 암묵적(implicit)과 명시적(explicit)이라는 두가지 층위를 구분합니다. 인간은 일상 속에서 암묵적 규범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수업 시간에 지켜야 하는 규칙은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행동하는 한 우리는 합리적인 존재입니다. 반면 토의의 상황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말하기라는 활동을 통해 암묵적으로 따르던 규범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활동을 수행합니다. 브랜덤은 이것을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라는 모델로 구체화합니다.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 속에서 암묵적으로 따르던 규범을 논리적 어휘를 통해 명시화할 수 있는 존재는 이제 합리적 존재를 넘어 논리적 존재가 됩니다.
저는 데닛의 '이유'는 브랜덤의 암묵적 층위에, 데닛의 '이유 이해력'은 브랜덤의 명시적 층위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 참여하는 논리적 존재는 '이유 이해력'을 갖춘 '이유 표상자(reason-representer)'이며, 그곳에서 언제나 이미 존재해왔던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는 비로소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유가 있는 곳마다 암묵적인 규범이 호출될 수 있다. 실제 이유는 언제나 좋은 이유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논의되고 있는 특성을 정당화하는 이유라고 가정되는 것이다."(데니얼 데닛, 같은 책, 3장) 인간은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 동물들과 구분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가 맞다면,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는 다른 언어놀이와는 달리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를 <표상>하거나, '암묵적 규범'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선 인용문에서 데닛은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가 전혀 문제적이지도 않고 유령 같지도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유가 이유 추론자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것은, 마치 산수를 표현할 방식을 고안하기 전에도 육면체는 8개의 모서리를 지니고 있었고, 소행성들의 질량중심은 그 개념을 생각하고 계산해낼 물리학자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처럼 당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데닛은 그저 마음이 자연의 거울이라는 근대 표상주의적 전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오히려 진화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나 산수 체계, 소행성들의 질량중심을 계산하는 방식 모두 유기체가 매 순간 환경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도구, 하나의 언어놀이에 불과할 뿐이지, 그것이 숨겨져 있던 이유와 본질을 있는 그대로 <표상>하거나 <표현>한다고 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서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가 명료화된다는 데닛과 브랜덤의 주장은, 인간이 암묵적 규범을 조망하며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신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있던 암묵적인 이유를 표상하거나 명료화하는 작업이라기보다 새로운 이유를 매 순간 구성해내는 창조적인 활동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하는 문제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이유들은 사라지고, 일리가 있는 이유들은 설득에 유용한 도구들로 남아 다음 토의의 발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말로 상대방을 설득해서 공동체를 안정적이고 민주적으로 유지하는 기술이지, 그것이 실제 이유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지가 아닙니다.
최근 인지과학의 여러 연구 성과들의 제 주장을 보충해줄 수 있습니다. 마이클 가자니가는 좌뇌와 우뇌가 고립되어 작동하는 분리뇌 환자들을 대상으로 다음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좌뇌는 신체의 오른쪽 부분을, 우뇌는 신체의 왼쪽 부분을 담당하며, 언어 처리 능력은 좌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자니가는 순차적으로 환자의 왼쪽 눈에는 눈이 오는 장면을, 오른쪽 눈에는 닭발 그림을 보여주었으며 (뇌의 교차 회로에 따라) 눈이 오는 장면은 우뇌로, 닭발 그림은 좌뇌로 보내졌습니다. 이후 가자니가는 환자에게 자기가 본 그림과 관련 있는 그림을 고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눈이 오는 장면에 해당하는 우뇌는 왼쪽 손으로 하여금 삽을 고르게 하였고, 닭발에 해당하는 좌뇌는 오른쪽 손으로 하여금 닭 머리를 고르게 했습니다. 언어 처리 능력은 좌뇌에 있으므로 오른쪽 손이 왜 닭 머리를 골랐는지 환자는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왼쪽 손이 삽을 고르게 한 것은 우뇌이고, 환자는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었으므로 왼손의 선택에 대해 좌뇌는 혼란에 빠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좌뇌는 눈이 오는 장면을 인지하지 못했으니깐요. 하지만 가자니가가 "왜 삽을 선택했나요?"라고 묻자 좌뇌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의 이유를 유창하게 답변합니다. "그건 간단해요. 닭발은 닭하고 연결되죠. 그리고 그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거든요."
상기의 실험은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가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해내는 활동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일 이유가 표상되는 것이라면 좌뇌는 가자니가의 질문에 어떤 답도 할 수 없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삽을 선택한 이유는 전적으로 우뇌에 귀속되는 것이고, 환자의 우뇌와 분리된 좌뇌는 그 이유를 표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좌뇌는 자신의 선택에 그럴듯한 이유를 댐으로써 최소한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자니가를 설득시키지는 못했네요. 그랬다면 이 실험이 나올 수 없었으니깐요) 이처럼 아무 이유나 목적이 없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그 선택의 이유를 묻는 순간, 다시 말해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럴듯한 이유를 매끄럽게 구성해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받은 사람은 그 선택을 한 시점에 실제로 이유가 있었든 없었든 자신의 선택을 상대방에게 정당화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제시한 이유가 납득할 수 없다면 상대방은 계속 질문을 던질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는 무한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내가 제시한 이유는 실제 이유에 부합해. 그러니까 더 묻지 마!"라고 하거나 "너가 제시한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그것이 실제 이유라는 점을 증명하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않겠어."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저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를 즐길 수 없는 강박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 불과할 뿐이죠.
지금까지 저는 데닛의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를 비판했습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는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언어놀이 이면에 존재하는 이유나 암묵적 규범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활동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하는 우리는 상대방을 말로 설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이유를 대고, 변명하며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이유를 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