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닛의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와 브랜덤의 '암묵적 규범'에 대한 비판

데니얼 데닛은 자신의 저서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3장: 이유의 기원에 관하여>에서 진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창조주와 같은 고대의 이데올로기 없이도 자연 현상들의 합리성을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생물권은 설계와 목적과 이유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시대에 뒤쳐진 목적론을 새로운 후기 다윈주의적 목적론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데닛은 진화의 과정에서 이유와 이유 이해력(reason-appreciation)이 차례대로 출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특히 이유가 이유 이해력보다 먼저 출현하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가령 흰개미 성의 구조와 형태에는 이유들이 있지만, 성을 건축한 어떤 흰개미도 그 이유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개미는 성의 구조를 계획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성을 짓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반면 가우디가 남긴 성당의 형태와 구조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들은 가우디의 이유입니다. 가우디에게는 자신이 창조하기로 마음먹은 형태에 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흰개미 성과 가우디의 성당 모두에 이유가 있지만 흰개미와 달리 가우디는 그 이유를 표상하고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유들은, 이유 표상자(reason-representer)인 우리가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진화에 의해 추적된 이유들을 나는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라 불렀는데, 이 표현은 확실히 몇몇 사상가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그들은 내가 모종의 유령을 불러내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들은 수나 질량중심이 그러하듯 전혀 문제적이지도 않고 유령 같지도 않다. 사람이 산수를 표현할 방식을 고안하기 전에도 육면체는 8개의 모서리를 지니고 있었고, 소행성들의 질량중심은 그 개념을 생각하고 계산해낼 물리학자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유들은 이유추론자(reasoner), 즉 이유를 생각하는 존재들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왔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며 아마도 불건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내가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기를, 그리고 이유-인간 탐구자들 또는 그 어떤 마음들에 의해 표상되거나 표현되기 전에 존재했으며, 진화에 의해 밝혀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음을 확신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데니얼 데닛,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3장)

저는 데닛의 이 논의를 보면서 YOUN님의 블로그에서 본 브랜덤의 철학이 떠올랐습니다. 블로그에 따르면 브랜덤은 인간이 속한 암묵적(implicit)과 명시적(explicit)이라는 두가지 층위를 구분합니다. 인간은 일상 속에서 암묵적 규범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수업 시간에 지켜야 하는 규칙은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행동하는 한 우리는 합리적인 존재입니다. 반면 토의의 상황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말하기라는 활동을 통해 암묵적으로 따르던 규범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활동을 수행합니다. 브랜덤은 이것을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라는 모델로 구체화합니다.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 속에서 암묵적으로 따르던 규범을 논리적 어휘를 통해 명시화할 수 있는 존재는 이제 합리적 존재를 넘어 논리적 존재가 됩니다.

저는 데닛의 '이유'는 브랜덤의 암묵적 층위에, 데닛의 '이유 이해력'은 브랜덤의 명시적 층위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 참여하는 논리적 존재는 '이유 이해력'을 갖춘 '이유 표상자(reason-representer)'이며, 그곳에서 언제나 이미 존재해왔던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는 비로소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유가 있는 곳마다 암묵적인 규범이 호출될 수 있다. 실제 이유는 언제나 좋은 이유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논의되고 있는 특성을 정당화하는 이유라고 가정되는 것이다."(데니얼 데닛, 같은 책, 3장) 인간은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 동물들과 구분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가 맞다면,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는 다른 언어놀이와는 달리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를 <표상>하거나, '암묵적 규범'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선 인용문에서 데닛은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가 전혀 문제적이지도 않고 유령 같지도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유가 이유 추론자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것은, 마치 산수를 표현할 방식을 고안하기 전에도 육면체는 8개의 모서리를 지니고 있었고, 소행성들의 질량중심은 그 개념을 생각하고 계산해낼 물리학자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처럼 당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데닛은 그저 마음이 자연의 거울이라는 근대 표상주의적 전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오히려 진화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나 산수 체계, 소행성들의 질량중심을 계산하는 방식 모두 유기체가 매 순간 환경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도구, 하나의 언어놀이에 불과할 뿐이지, 그것이 숨겨져 있던 이유와 본질을 있는 그대로 <표상>하거나 <표현>한다고 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서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가 명료화된다는 데닛과 브랜덤의 주장은, 인간이 암묵적 규범을 조망하며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신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있던 암묵적인 이유를 표상하거나 명료화하는 작업이라기보다 새로운 이유를 매 순간 구성해내는 창조적인 활동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하는 문제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이유들은 사라지고, 일리가 있는 이유들은 설득에 유용한 도구들로 남아 다음 토의의 발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말로 상대방을 설득해서 공동체를 안정적이고 민주적으로 유지하는 기술이지, 그것이 실제 이유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지가 아닙니다.

최근 인지과학의 여러 연구 성과들의 제 주장을 보충해줄 수 있습니다. 마이클 가자니가는 좌뇌와 우뇌가 고립되어 작동하는 분리뇌 환자들을 대상으로 다음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좌뇌는 신체의 오른쪽 부분을, 우뇌는 신체의 왼쪽 부분을 담당하며, 언어 처리 능력은 좌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자니가는 순차적으로 환자의 왼쪽 눈에는 눈이 오는 장면을, 오른쪽 눈에는 닭발 그림을 보여주었으며 (뇌의 교차 회로에 따라) 눈이 오는 장면은 우뇌로, 닭발 그림은 좌뇌로 보내졌습니다. 이후 가자니가는 환자에게 자기가 본 그림과 관련 있는 그림을 고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눈이 오는 장면에 해당하는 우뇌는 왼쪽 손으로 하여금 삽을 고르게 하였고, 닭발에 해당하는 좌뇌는 오른쪽 손으로 하여금 닭 머리를 고르게 했습니다. 언어 처리 능력은 좌뇌에 있으므로 오른쪽 손이 왜 닭 머리를 골랐는지 환자는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왼쪽 손이 삽을 고르게 한 것은 우뇌이고, 환자는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었으므로 왼손의 선택에 대해 좌뇌는 혼란에 빠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좌뇌는 눈이 오는 장면을 인지하지 못했으니깐요. 하지만 가자니가가 "왜 삽을 선택했나요?"라고 묻자 좌뇌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의 이유를 유창하게 답변합니다. "그건 간단해요. 닭발은 닭하고 연결되죠. 그리고 그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거든요."

당신이 사실 2명인 이유

상기의 실험은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가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해내는 활동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일 이유가 표상되는 것이라면 좌뇌는 가자니가의 질문에 어떤 답도 할 수 없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삽을 선택한 이유는 전적으로 우뇌에 귀속되는 것이고, 환자의 우뇌와 분리된 좌뇌는 그 이유를 표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좌뇌는 자신의 선택에 그럴듯한 이유를 댐으로써 최소한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자니가를 설득시키지는 못했네요. 그랬다면 이 실험이 나올 수 없었으니깐요) 이처럼 아무 이유나 목적이 없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그 선택의 이유를 묻는 순간, 다시 말해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럴듯한 이유를 매끄럽게 구성해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받은 사람은 그 선택을 한 시점에 실제로 이유가 있었든 없었든 자신의 선택을 상대방에게 정당화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제시한 이유가 납득할 수 없다면 상대방은 계속 질문을 던질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는 무한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내가 제시한 이유는 실제 이유에 부합해. 그러니까 더 묻지 마!"라고 하거나 "너가 제시한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그것이 실제 이유라는 점을 증명하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않겠어."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저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를 즐길 수 없는 강박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 불과할 뿐이죠.

지금까지 저는 데닛의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를 비판했습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는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언어놀이 이면에 존재하는 이유나 암묵적 규범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활동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에 참여하는 우리는 상대방을 말로 설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이유를 대고, 변명하며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이유를 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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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부분이 글쓴이 님이 제기하는 비판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글 쓰신 쪽 내용을 잘 몰라서 질문드립니다.

인용문장만 보면, 데닛은 '이유-표상자가 represent한 무언가는 실제 이유(혹은 이유 그 자체)와 같다. 즉, 이유-표상자는 거울처럼 이유를 represent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데닛은 '이유-표상자는 자신이 represent한 것이 실제 이유와 같다고 믿는다(혹은 가정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데닛의 입장은 위 인용문에서 '좋은 이유일 것이라고, ... 정당화하는 이유라고 가정되는 것이다'라고 서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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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은 그 가정(이러한 관행)이 정당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같은 문단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으니깐요.

이는 이러한 관행이 시대에 뒤떨어진 전 과학적 사고방식의 잔재임을 의미할 수도-그리고 많은 생물학자가 그렇게 짐작한다-일 수도 있지만, 역설계가 생물의 영역으로까지 훌륭하게 확장된다는 것을 생물학자들이 발견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이 발견은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생각 도구들을 사용했기에 가능했다. 이 생각 도구들 덕분에 우리는 세계에 실재하는 패턴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패턴들이 또 다른 실제 패턴들의 존재를 위한 이유라 불릴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후자의 주장을 옹호하려면 진화 자체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었는지를 좀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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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두 가지가 동일시되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브랜덤이 말하는 '암묵적 규범'은 인간의 사회나 공동체에 의존해서요. 이유가 '부유한다'는 데넷의 주장과 이유가 인간의 사회에 '박혀 있다'는 브랜덤의 주장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데넷은 브랜덤의 작업들을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한 적이 있고, 적어도 의식의 지향성과 관련된 논의에서 그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일치할지 저는 다소 의문스럽습니다.)

아울러, 저는 언어놀이를 통해 이유가 새롭게 창조될 수 있다는 주장을 브랜덤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브랜덤이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새롭게 창조되는 이유조차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이유 자체의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니까요. 실제로, 브랜덤의 지도교수인 로티는 새로운 규범이나 새로운 진리의 창조 과정을 매우 강조하였고, 브랜덤은 로티의 그 논의를 '점수기록 모형'과 같은 방식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도 평가할 수 있죠. 또 브랜덤이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헤겔도, 새로운 개념이 끊임없이 창조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강조하잖아요. 브랜덤은 그런 '변증법'이 현대 영미철학에서 어떻게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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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데닛에 따르면 (1) 이유-표상자는 자신이 represent한 것이 실제 이유와 같다고 가정하는데, 데닛이 보기에 (2) 이러한 가정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데닛의 입장이 '마음은 자연의 거울이라는 전제, 혹은 인간이 암묵적 규범을 조망하며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전제'와 같은 입장으로 놓일 수 있냐는 의문이 듭니다.

간단히 말해, 데닛은 "'이유-표상자들이 자신 나름의 표상(truth)이 실제로 그러하다고 믿는 관행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근대 표상주의자들은 "'이유-표상자들은 Truth를 포착할 수 있다'라는 명제는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 지적은 지금 맥락에서 '정당함'와 '참'이 구별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어요.

제가 데닛이나 브랜덤을 잘 몰라서 우둔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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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덤과 독립적으로, 이것이 데닛의 논증 전부라면 그냥 non sequitur가 아닌가요? "이유"라는 개념의 외연이 "육면체의 모서리"나 "소행성의 질량중심"처럼 실제 세계에서 물리적 위치를 점유하는 물리적 상태라면 데닛의 논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이유"가 성을 짓는 흰개미의 nervous system 안에 핀포인트 될 수 있는 그러한 물리적 개체라면, 확실히 이러한 개체는 인간 존재 이전에도 존재하겠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유"라는 개념이 단순히 서술적이지 않고 규범적이고 평가적인(evaluative)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유"라는 개념의 의미론적 성격이 인간이 부여한 규범적 언어게임을 전제할 때에만 유의미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 후자의 경우, 인간의 존재하기 "이전의" 이유에 대해 논하는 것이 좀 기이해 보입니다. 직관적으로 말해서, 이유 표상자가 없다면, 그렇게 표상되는 이유 역시 없는 것이죠. 이 점에서 저 역시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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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최근에 사 놓은 데닛의 박테리아에서 바흐로 3장을 잠깐 읽었습니다.

제가 데닛에 대해 그렇게 알지 못하고, 글도 빨리 읽어서 틀릴 가능성도 있지만, 제 생각에 데닛은 '이유'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실제한다 보는것 같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무엇을 위해'(목적설명) 와 '어떻게 해서'(과정설명)으로 나뉘는데, 데닛은 진화과정을 통해 과정이 아니라 목적의 이유를 표상할 수 있는 존재(인간)가 나타난다 봅니다. 비 생물 세계에서 다른 조합들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조합이 존속되고, 그것이 재생산으로, 나아가 유리한 지점을 증폭시키는 복제를 통해 증식되며, 데닛에 따르면 이 과정이 엄청난 시간동안 지속되며 마침내 생명이 나타나고 생명 또한 자연선택에 따른 존속과 재생산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여기까지에 이르게 된 과정서사)와 무엇을 위해(존속을 위해, 아직 그것을 명시적으로 생각할수 있는 존재는 없지만)에 관한 정당화, 즉 이유라는게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중에는 이유를 명시적으로 생각하고 논할수 있는 이유 표상자인 인간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유를 물을 수 있는 인간이 있기 전에도, 이유는 '과정으로서'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고 있다는 것이 3장에서 데닛의 주장 같습니다. 흰개미는 이유표상자가 아니여도 개미집을 짓는 과정과 존속이라는 목적을 위해 개미집을 짓는 다는 점에서 이유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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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의문을 좀 더 구체화시켜 보자면, 여기서 말하는 이유의 "물리적 연관"이 원초적인 의미에서 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입니다.

가령 자연에서 일어나는 과정, 예컨대 흰개미가 성을 짓는 과정을 순수 물리적이고 서술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순수 자연과학적 언어 L이 있다고 할 때, "이유"라는 개념 및 행위의 이유에 대한 기술들은 L에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은 적어도 제게는 꽤나 자명해 보입니다 (물론 생물학의 철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제가 무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즉 "이유"라는 개념은 분명 자연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사태를 기술하는 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와 물리적 세계와 "연관"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L을 통해 기술되는 물리적 사건 외에 별도의 이유-사건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죠. 행위철학의 예시를 들면, 내가 "방을 밝히기 위해"라는 "이유"를 가지고 스위치를 켤 때, 물리적 자연세계에서 발생한 사건은 그냥 스위치를 켜는 물리적 사건일 뿐, "방을 밝히기 위해"라는 별도의 물리적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이 점에서 "이유"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인간적인 관점 내지 인간의 의미론을 전제하는 특수한 서술일 뿐, 물리적 사건을 일대일로 반영하는 그러한 "자연의 거울"이 아니라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흰개미가 성을 짓는 사건 S가 발생했다고 할 때, 이 S를 한편으로는 순수 자연과학적 언어 L을 통해서 서술할 수 있고 이 서술에는 "이유"라는 개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한 사건 S를 "이유"라는 개념을 통해 독특하게 기술할 수 있습니다. "마치" 흰개미가 개미집을 짓는 과정과 존속이라는 "이유"를 위해 개미집을 짓는 것처럼요. 흰개미는 데닛도 인정하듯 이유-표상자가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흰개미 스스로가 이유를 표상한다는 것은 넌센스로 보입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이 인간 고유의 "이유" 개념을 통해 흰개미의 행위를 "해석"하고, 동시에 그러한 "이유"를 흰개미에게도 "귀속"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 점에서 저는, "이유 표상자가 없다면, 그렇게 표상되는 이유 역시 없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흰개미 스스로가 이유-표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이유가 인간 이전에도 부유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데닛의 설명보다 더 직관적이라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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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브랜덤이 왜 규범을 암묵적인 층위와 명시적인 층위로 구분하고 암묵적인 질서를 명시적으로 explicit 한다고 설명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가 명시적으로 먼저 이루어지고, 낯선 주장들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끊임없이 죽어가면서 '암묵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주장을 한꺼번에 의심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당연시되는 주장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논의의 암묵적인 층위를 구성하는 거죠. 굳이 암묵적인 층위와 명시적인 층위를 구별하고 싶다면 딱 이 정도로 충분할 거라고 봅니다. 저에게는 브랜덤의 암묵적 규범이 파롤 이면에 랑그가 있다는 구조주의자들의 주장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암묵적인 규범이 있다 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explicit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신의 관점'을 전제하지 않고 가능한가요? 이유를 묻고 답하는 언어놀이는 낯선 주장에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상대를 설득시키는 과정이지, 숨겨져 있는 규범을 끄집어내는 과정으로 볼 수 없지 않을까요.

브랜덤은 암묵적 층위를 합리적 존재와 연결시키고, 명시적인 층위를 논리적 존재와 연결시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비논리적인 존재가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리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서 고도의 논리적 추론은 어렵다 하더라도, 합리적인 사람은 보통 논리적으로 추론하므로 합리적이라고 가정되는 거 아닌가요? 이유를 묻고 답하는 명시적인 언어놀이에 아직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대체 무슨 근거로 합리적이라고 가정되는 건가요? 실제로 이웃을 돕거나 가난한 자에게 베풀지 않으면서 예수를 따르고 있다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그냥 예수를 따르고 있지 않다고 봐야겠죠. 마찬가지로 명시적인 층위에서 누군가에게 이유를 묻고 논리적으로 대답하는지를 보기 전까지는 실제로 그 사람이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따르고 있는 척하는지를 구별할 수 없을 겁니다. 논리적이지는 않은데 합리적인 존재? 그게 정말로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혼잣말로 저 자신과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를 즐기고 있고, 커뮤니티에 이 글을 올리면서 또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드러나 있는 명시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명시적 과정이 없다면 제가 애초에 규범을 따르고 있는지 따르고 있지 않은지조차 불분명하죠.

솔직히 써놓고 보니 제가 브랜덤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박해주시면 많이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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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말씀하신 내용들이 브랜덤의 추론주의와 상충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브랜덤은 그 내용들을 이미 추론주의 속에 받아들이고 있어서요.

1. 명시적 규칙들이 암묵적 규범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은가?

실제로, 브랜덤은 이런 식의 주장을 지각철학에서 강조해요. 가령, 처음에는 과학자들이 안개상자에서 뮤 입자의 존재를 증기 자취로부터의 '추론'을 통해 도출하지만, 이런 추론들이 자주 누적되고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증기 자취만으로 뮤 입자의 존재를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바로 이 과정이 '명시적' 추론에서 '암묵적' 실천으로의 이행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브랜덤의 추론주의는 (a) 암묵적 실천을 지배하는 규범에서 명시적 추론을 지배하는 규칙으로의 이행도 강조하지만, (b) 명시적 추론을 지배하는 규칙에서 암묵적 실천을 지배하는 규범으로의 이행도 부정하지 않아요.

2. 이유를 묻고 답하는 놀이는 상대를 설득시키는 과정이다.

이 부분도 브랜덤의 주장과 상충하는 내용이 아니에요. 브랜덤은 저 어딘가에 절대적 규범이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가 그 규범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애초에 신의 관점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규범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부정하려는 것이 브랜덤의 입장이에요. 그래서 브랜덤이 말하는 규범이란 시대와 문화마다 변화하는 사회적 규범일 뿐이에요. 특정 규범에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강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 규범에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불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가령, (a)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규범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상적'인 주장이지만, (b) 그 규범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신의 명령에 근거한 규범이라는 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주장이죠. 브랜덤이 말하는 것은 (a)와 같은 주장일 뿐이지, 결코 (b)와 같은 주장이 아니에요.

3. 논리학을 명시적으로 공부하지 않고서도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브랜덤이 사용하는 '합리적/논리적'이라는 구분은 전문 용어라서, 그 용어를 모든 일상의 맥락에 적용하려 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봐요. 게다가, 이미 말씀하신 내용 속에 브랜덤이 강조하고자 하는 요지가 들어 있어요. (a) 사람들이 논리학을 명시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해도 (b) 자신의 삶에서 암묵적으로 추론을 사용할 수 있듯이, (a') 사람들이 모든 추론 규칙들을 명시적으로 의식하는 '논리적' 존재가 아니라고 해도, (b') 일상의 삶에서 그 규칙들을 암묵적으로는 사용할 줄 아는 '합리적' 존재일 수는 있다는 것이 브랜덤의 주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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