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종,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비트겐슈타인과 현상학

(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적은 일종의 감상이라, 다소 두서없을 수 있습니다.)

1.
이승종 교수의 연구서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아카넷, 2022)는 언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라는 독창적인 조명 아래서 새로이 바라보려는 매우 탁월한 시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언어 사용이라는 자연사적인 사실에 관해 탐구한 철학자이며, 또한 언어의 문제를 삶의 문제로 본 구도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여러 남겨진 논쟁적인 구절들을 재해석함으로써 그를 언어적 "현상학자"(8~9쪽)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토대주의나 그 진리에 대한 정당화 이론을 넘어서서, 우리의 '삶의 형식'으로서의 인간적 토대에 주목한 한 사람인 것이다.
이 책의 제1부는 "자연주의"라는 표제 아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러한 말하자면 현상학적인 자연주의 철학 해석을 개진하고 있으며, 나는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현상학적 성격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2.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현상학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상학은 일반적으로 대상들의, 그리고 주관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탐구가 아닌가?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그 본질주의—어떤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동일성을 상정하고 그것에 따라 그 "통일에의 열망"(33쪽)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36~37쪽)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전통적인 철학적 태도에 반대하는 이유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이야말로 현상학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통적인 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지적대로 '일반성에의 갈망'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일종의 도그마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현상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전통적 현상학자 또한 이러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후설은 우연적이고 변화가능한 '사실들'이 있다는 생각에서 곧바로 그것과 반대로 이념적 필연성을 지니는 '본질들'이 있다고 추론한 후에(Husserl 2021, 62쪽), 우리가 경험에서 마주하는 모든 대상들에는 어떤 영역적인 본질적 '대상성'이 귀속한다고 말한다(Husserl 2021 94쪽 참조).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현혹상태를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그것에 대항해 투쟁하고자 한다'(34쪽). 특히 이승종 교수는 자연주의는 그런 전통에 반해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적 제한 조건을 인정하는 입장이고,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일반성에의 갈망'을 어떻게 '치료'하고자 하는가?

3.
저자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논의를 우리의 자연적 한계에 국한시키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본질에 대한 논의들을 인간의 언어의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서 그런 물음들을 거부한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하지만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그 어떤 토대도 부정하는 해체주의로 극단적으로 향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삶'을 그 토대로서 생각한다(171쪽). 그리고 그 토대—정당화의 '끝'—란, 사람들이 '그렇게 행위한다'는 자연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 토대로서의 '삶의 형식'에 대해서는 인식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36쪽).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 현상학의 본질주의 및 토대주의적 전제에 반하는, 새로운 자연주의적 현상학자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다시 후설로 되돌아가야 한다. 후설이 '확실성'에 관한 탐구들을의식이론의 틀 안에서 시도하긴 했지만(Husserl 2018, 122~128쪽 참조), 그 또한 이 '토대'를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의 세계인 '생활세계'(Lebenswelt)에서 찾는다. "객관적-학문적 세계에 관한 지식은 생활세계의 명증성에 근거한다'"(Husserl 2016, 255쪽). 그러니까 후설의 생활세계는 "근원적인 명증성의 세계"(Husserl 2016, 251쪽)로서, 모든 학문과 실천의 토대이자 원천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이나 후설이나 우리의 삶을 궁극적 토대로 보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후설에서 생활세계는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다르게 어떤 인식론적 정당화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을 본질이론 및 형이상학과는 차별적인, 인간의 자연적인 실천의 영역으로 보았던 반면, 후설은 이러한 생활세계 안에서도—그런 '실천'과 결부시켜—'본질'을 찾는다. "이 모든 객관적 아프리오리도 그에 상응하는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로 되돌아가 필연적으로 관계됨으로써 생활세계에 속한다. 이렇게 생활세계로 되돌아가 관계되는 것은 타당성의 기초를 세우는 것으로 되돌아가 관계되는 것이다(Husserl 2016, 270쪽)." 또한 "경험에서 (근원적으로) 순수하게 학문 이전에 우리에 대해 존재하는 것인 세계 자체는 그 불변의 본질적 유형 속에 미리 모든 가능한 학문적 주제를 부여한다"(Husserl 2016, 398쪽). 후설이 대상들에게서 '본질들'을 찾으려고 하는 한, 그것들의 원천인 생활세계는 본질주의의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4.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삶이라는 토대를 고수하면서도 본질주의에서 벗어나는가? 이는 이 책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의 제3장에서 저자가 가버의 '초월적 자연주의'를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탐구』에서 가끔씩 '삶의 형식'(Lebensform)에 대해 말한다. 가버에 따르면 이것은 '초월적 자연주의'라는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바로 자연과학적 탐구 영역을 '넘어서 있는', 근원적인 인류학적 현상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04쪽). 이는 저자가 지적하듯이 3인칭적 관점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에 해당한다. 이와 비슷하게, 현상학은 '1인칭 대 3인칭'이라는 고전적인 대립을 거부하긴 하지만(Zahavi 2022, 84쪽), 후설은 아직 '사람의 얼굴을 한' 2인칭적 관점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1인칭과 3인칭의 연결 속에서 여전히 초월적인 본질을 찾고자 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적 고찰로서의 현상학을, 그러니까 의미의 가능성에 관계하는 기술적 작업으로서의 현상학을 중기에 도입하지만, 이는 '문법적 고찰'이라는 단어가 들어오면서 필요없게 된다(88쪽).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탐구는 위에서 본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바로 그 삶의 모습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현상학적이라고 불릴 만하며, 그뿐 아니라 그의 탐구는 현상학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상학자들이 현상들의 원천으로서의 '본질들'을 찾고자 하는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은 현상들을 주목함으로써 언어적 탐구, 즉 문법적 탐구에 관심을 보인다. 여기에는 어떤 본질주의도 없다. 그저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의 의미들, '언어게임들'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고정되고 단일한 동일적인 본질이 아니라, 어떤 '가족 유사성'이 보이게 된다(Wittgenstein 2020, 40~41쪽). 언어 게임의 이러한 풍부함, 그리고 그런 탐구의 2인칭적 관점은 우리의 현상학적 삶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이승종,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아카넷, 2022 (이 글에서는 쪽수만 표기함)
Ludwig Wittgenstein, 『청색 책ㆍ갈색 책』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20
Edmund Husserl,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16
Edmund Husserl,『수동적 종합』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18
Edmund Husserl,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21
Dan Zahavi, 『현상학 입문』 김동규 옮김, 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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