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테크놀로지의 향방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약간의 스포 있습니다.

테크놀로지로 인류의 공유된 번영을 만드는 게 진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에는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이 등장한다. 익스펜더블로 등록된 사람은 죽어도 그 이전 삶의 기억을 갖고 새로운 몸을 발급받아 무한하게 재생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를 통해 무한하게 죽고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유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을 도맡아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신약을 위한 생체 실험, 방사선에 노출된 우주선 고치기, 미지의 위험한 지역 탐험하기 등이다. 주인공 미키가 바로 익스펜더블이다. 영화상의 미키는 현재 17번째 다시 태어난 미키17이다.

<미키 17>에서 익스펜더블이 상징하는 바가 노동자 계층인 것은 명확하다. 죽어도 대체해버리면 그만인 소모품이고 생산성에 복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익스펜더블을 끝없이 착취하는 행태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반드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만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억압과 카르텔의 권력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키17>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인류 전체의 진보와 번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테크놀로지는 오히려 특정 집단의 권력과 이익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흐를 수 있다. 극 중 개척자들을 이끄는 지배자인 마샬은 행성이 개발되는 대로 우량종자를 통해 우월한 인류를 양산해내자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마샬)과 특정 기득권만을 위한 비전(마샬의 슬로건과 정책)과 그 비전에 복무하면서 착취당하는 노동자 계층(익스펜더블)이 이 영화의 구도다.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현재의 문제를 다 해결해줄 것이라며 기술의 발전에 관해 낙관하는 경향이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공지능이 발전해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되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며 기술 발전에 거는 기대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빅테크와 실리콘밸리에 대한 열광은 우리에게 기술을 이용할 다른 가능성과 기술을 활용하는 다른 방식은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특정 소수의 부와 권력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기술이 오히려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노동자의 실업을 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기술이 노동자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을 미키 반스의 사례는 잘 보여주지 않는가?


정치를 통한 비전 설정이 테크놀로지의 쓰임을 결정한다

이 영화는 테크놀로지 발전이 노동자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술이 노동자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흐를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번영을 이끌어낼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대안적인 선택에 관해 다 같이 고민하는 과정이 정치다. 결국 미키 반스와 친구들은 기술을 전체에게 좋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다른 가능성을 실현한다.

테크놀로지의 방향이 어디로 흐를지를 정하는 건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의제를 설정하고 비전을 정하는 권력의 역할이다. 그리고 누가 권력을 가질 것인가를 정하는 게 정치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술 낙관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기술이 중요해진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와 민주주의의 회복이다. 마샬이 트럼프를 빗댄 거라는 얘기가 많은데 정치가 실패하고 정치가 기득권층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시대에 봉준호가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특권층(마샬)만을 위한 비전에 대항해 전체의 공유된 번영을 끌어내기 위해 지배적인 비전에 대한 길항 권력을 창출해내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우주 개척을 가능하게 해서 크리퍼를 말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었고 그들과 공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 길항권력이 창출됐을 때 인류는 진보했다

대런 아세모글루는 인류 역사를 되짚어볼 때 길항 권력이 창출돼 특권층의 편협한 비전을 견제했던 사례로 산업혁명 시기를 든다. 산업혁명 당시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반대해서 차티스트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인권은 크게 신장됐고 노동자는 더 이상 공장의 기계 부품처럼 일하는 존재가 아닐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테크놀로지는 세 가지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첫째, 테크놀로지는 노동자를 완전히 대체해버려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생산성을 증대하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컨베이어 벨트가 그랬다. 둘째 테크놀로지의 전방효과와 후방효과가 일어나 한 산업은 다른 산업에 도움이 되었고 이것들이 맞물려 돌아갔다. 증기기관차의 발명은 철도를 짓는 데 필요한 철강산업의 발전을 불러왔고 철강산업의 발전은 또다시 증기기관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선순환이 일어났다. 셋째, 생산적인 일자리가 더 많이 창출되었고 과거의 노동자는 새로운 일자리로 전환할 수 있었다. 기존의 마차를 몰던 마부들은 증기기관차의 차장이나 승무원이 되었다. 기차와 관련된 수많은 사무직도 창출되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유럽의 봉건 중세 시대에는 무수히 많은 혁신적인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 기술들이 농민들의 생산성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기술을 통해 높아진 생산성으로 얻은 결과물들은 성직자와 봉건 영주들에게로만 귀속되었다. 많은 자료들에 따르면 노동자의 실질 소득은 과거와는 증가하지 않았다. 이는 수많은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규합해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길항권력을 만들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기독교라는 봉건 영주와 성직자들만의 협소한 비전이 사회를 꽉 움켜주고 있었다.

​산업혁명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규합될 수 있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 증진과 처우 개선을 목표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억압과 착취에 대항할 수 있는 힘, 즉 길항권력을 창출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차티스트 운동과 러다이트 운동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력을 강화하고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특정 소수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가, 아니면 다수의 번영을 이끌 것인가는 정치적 결정에 달려 있다. 결국에 나샤는 정치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가. 실제로 우리는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와 경제적 기회를 창출한 사례도 봐왔다. 하지만 문제는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고, 누구를 위해 활용되느냐이다. 영화 속 마샬이 ‘우월한 인류 양산’을 내세우는 순간, 기술은 소수의 권력 강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미키 반스와 친구들은 기술을 통해 또 다른 가능성을 실현한다. 크리퍼들을 구해내는 데에도 테크놀로지로 발명한 소통기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원래 이 통역기는 크리퍼들을 학살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테크놀로지의 향방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권 보호, 기술 윤리 규범 강화, AI 민주적 거버넌스 구축 등은 우리가 기술을 다수의 번영을 위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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