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성에 호소하는 것에 대한 분석적 경고가 어떤 경우에는 유보되지만, 분석 철학 내에서 선험적인 경우보다 정말 덜 문제가 있는 것으로서 그런 경우들을 가려내는 일반적인 규범들이 있다.
첫째 그리고 가장 분명한 것으로, 어떤 요청된 필연성은 좀 더 쉽게 옹호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직접적으로 논리적 모순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렌슨이 가능성-논박(possibility-refutation)의 한 작동 예로서 제시하는, 다신론의 한 형태에 대한 아주 진부한 논증을 생각해보라. 즉, 완전히 전능한 두 존재가 있는 것이 가능했다면, 한 존재가 일으키기를 바라지 않는 한 사태를 다른 존재는 일으키기를 바라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전능의 정의를 고려할 때) 일으켜지기도 하고, 일으켜지지 않기도 하는 사태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신론 가정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선험적 논증들은 유사하게 행위소적인 사태 획득(agential state of affairs obtaining)과 비-행위소적인 사태 획득 간의 연결 필연성을 확실하게 주장하지 못한다.
둘째, 철학과 상식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적 개념도 선험적 전제들의 이례적인 지위를 표시하는 데 쓰인다. 많은 분석적 작업은 데이비드 루이스의 철학자 역할 개념에 입각해서 수행된다.
"우리는 이미 물려받은 대량의 의견들을 가지고 철학에 이른다. 이런 이미 존재하는 의견들을 상당 정도로 손상시키거나 정당화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질서 있는 체계로 확장시키는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1973)
그런 태도는 철학자를 (루이스 자신의 양상 실재론처럼) 매우 이례적인 자리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유형의 전제들에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 그리고 대체로 그 제한들은 보수적인 제한들이다. 직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또는 어떤 다른 면에서 상식으로 신임받지 못하는) 전제들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만일 그런 전제들이 어떤 사태 획득의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에 관한 주장들이라면, 그리고 (다신론 논증의 경우에서 그런 것처럼)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이 성격상 논리적, 정의적, 개념적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 의심이 영속적인 논쟁거리가 된다고 제안할 것이다. 우리를 요청된 필연성으로 데려가는 철학적 작업이 아무리 꼼꼼하다 할지라도, 그것의 거부를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전적으로 잠정적인 주장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장은, 선험적 논증이 분석적 입장의 생산적인 발전에서 결코 또는 거의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선험적 추리가 분석 철학의 아주 대표적인 적극적 발견법(positive heurisitc)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글의 맥락은 이해가 되는데, "행위소적인 사태 획득"과 "적극적 발견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니면 이 두 가지에 대한 문헌이 있을까요?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행위소적인 사태 획득(agential state of affairs obtaining)'이라는 표현은 정말로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행위소적'으로 번역된 'agential'은 직역하면 '행위자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은데, '행위자와 관련된 사태'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행위자에 의해 "일으켜지기도 하고 일으켜지지 않기도 하는 사태"를 표현한 것일까요? 하지만 저 내용만 읽어서는 아주 분명하지는 않네요.
(2) '적극적 발견법(positive heurisitc)'은 가설 연역적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자들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자 할 때 가설을 세우고서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그 가설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것처럼, 영어권 철학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형이상학적 사실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가령, "이 종이는 하얗다."도 참이고, "저 지우개는 하얗다."도 참이라는 점을 떠올려 봅시다. 서로 다른 두 대상이 동일한 속성을 지니는 이런 현상을 소위 '속성 일치 현상'이라고 하죠. 형이상학자들은 바로 이런 현상이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 가설을 세웁니다. "개체에 동일한 속성을 부여하는 보편자(이데아)가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 다음 그 가설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형이상학적 사실들을 발견해내려 하죠.
(1)과 같은 경우에는 사실 이 이상으로 해석에 도움이 될 만한 맥락이 보이진 않았습니다. 일단 (1)이 나오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이 글은 분석적 전통 내에서 선험적 추리(transcendental reasoning 혹은 a priori reasoning)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부적으로는 선험적 논증에 대한 피터 스트로슨의 옹호(선험적 논증의 반회의론적인 기능)에 대한 스트로우드와 쾨르너의 비판(선험적 논증의 반회의론적인 기능의 거부 및 요청된 필연성에 의존한다는 비판)에 대한 재반박(선험적 논증의 설명적 가치는 반회의론적인 기능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청된 필연성에 관한 비판은 다른 논증들에서도 나타난다.)으로 인해 이제 글은 분석 철학 내에서 선험적 논증이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근거를 요구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해당 문단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이해한 해당 문단의 내용은 "요청된 필연성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옹호될 수 있는 경우(이 경우엔 논리적 모순)"를 제시하고 이것을 선험적 논증과 구분해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이 글 뒤에 나오는 글이 대륙적 전통에서의 선험적 추리에 대한 내용인데, 거기서는 선험적 추리를 현상학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 "행위소적인 사태 획득"과 "비-행위소적인 사태 획득" 간의 연결 필연성을 확실하게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상학에서의 기본 주장(일상적 세계와 이론적 세계 중 일상적 세계에 선행성 내지는 선재성을 두는 것)에 선험적 추리가 의존하고 있고, 이를 적어도 논리적 모순과 같은 정도의 강도로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해석이 적절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