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건 선생님의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요즘 관심 있는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장치란 무엇인가 2)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어보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도중에 이런 부분을 인용하고 계신데,
후기산업 민주주의의 시민이 주문 받은 것은 뭐든지 열심히 수행하면서도 일상적인 몸짓이나 건강, 휴식이나 일, 영양섭취나 욕망을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장치들에 의해 지휘되고 통제되도록 내버려둘 때, 권력은 이런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시민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게 된다. 전자지문에서 인상기록 사진에 이르기까지 인체인식 테크놀로지는 ... 유럽의 새로운 규범에 의해 모든 시민에게 부과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비디오카메라를 통한 감시는 도시의 공적 공간을 거대한 감옥 내부로 변형시킨다. 당국의 관점에서 보면 보통의 일반인들만큼 테러리스트와 닮은 자도 없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아감벤이 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충격적인 사태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 한국에서는 너무나 일상화된 장치들임에 위화감이 느껴지네요. 그런데 이러한 통치장치들이 시민을 즉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게 계십니다.
적어도 속죄 장치가 기능하기 위해서도 속죄할 수 있는 주체의 능동성이 전제되기 마련이며, 이 점을 인정한다는 것은 지적되는 것만큼 장치들의 구성력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학교에서 피교육자들을 사회가 원하는 이념에 맞추어 제아무리 엄격하게 교육시킨다고 해도,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실천적 처방"을 촉구하는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주체의 능동성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