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신학에 입문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적합한 게시물일지 모르겠네요.
요즈음 관심이 생겨서, 철학적 기독교 신학에 관한 책들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기독교에 관해서 많은 오해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 자체로 흥미로운 학문이라고 생각하기도 때문인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우선 성경부터 읽어 나가는 것이 좋을까 싶지만, 조금 더 이론적인 책을 읽고 싶기도 합니다. 어떤 책으로 입문하는 것이 좋을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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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신학', '철학적 신론' (혹은 좀 더 중립적이고 포괄적 용어로 '종교철학')도 유럽권의 논의를 따를 것인지 영어권의 논의를 따를 것인지에 따라 경향이 다소 갈립니다.

보통 명시적으로 '철학적 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은 분석철학 계열에서 알빈 플란팅가(A. Plantinga)를 통해 촉발된 일련의 논의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롤스가 영어권 철학에서 정치철학의 부활을 일으킨 중심 인물인 것처럼, 플란팅가는 영어권 철학에서 종교철학의 부활을 일으킨 중심 인물이거든요. 플란팅가는 본래 가능세계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에서 뛰어난 업적들을 남긴 인물인데, 자신의 논의를 종교철학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적용해서 기독교 계열의 다른 철학자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았죠.

저의 경우에도 서강대 학부 시절에 '철학적 신론'이라는 철학과 수업과 '종교철학'이라는 종교학과 수업을 들었을 때 신 존재 증명이나, 삼위일체나, 악의 문제 등 종교적 주제와 관련된 분석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었습니다. 철학과에서의 교재는 마이클 머레이(Michael J. Murray)와 마이클 레아(Michael Rea)가 쓴 Philosophy of Religion이었고, 종교학과에서의 교재는 존 코팅햄(John Cottingham)이 쓴 The Spiritual Dimension: Religion, Philosophy and Human Value이었죠. 또, 제가 직접 수강한 것은 아니지만,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의 책으로도 철학과에서 수업이 열린 적이 있었고요. (아래 스윈번의 책은 그때 그 수업을 진행하면서 교수님이 번역하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저는 이런 분석철학 스타일의 종교철학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철학적 신론으로 수업을 자주 개설하셨고, 플란팅가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까지 한 K 교수님조차 종종 "플란팅가식의 종교철학은 주일학교 수준이야."라고 농담을 하셨죠. 그만큼 분석철학에서 종교를 다루는 방식은 다소 피상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 가지 교리적인 논제들을 제시하고서, 그 논제들을 정당화하거나 논박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거든요. (가령, 머레이의 책은 정말로 기독교 교리 중 하나인 예수의 이성일인격 논제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논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리 자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낯설게 생각하는 비기독교인의 입장이라면, 이런 논의가 다소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대륙철학 스타일의 '철학적 신학'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경우 대륙철학자들이 종교와 관련된 현실적인 주제들을 향해 곧바로 직진해서 들어가는 경향을 보이거든요. 대륙철학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적 신학은, (종교의 교리 자체보다는) 불안, 실존, 삶의 의미, 법, 정의 같은 주제들에 대해 종교가 제시하는 사유들이 어떻게 오늘날 철학적으로도 의의를 지닐 수 있는지를 주로 다룹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대단히 감명을 받으면서 읽었던 최초의 철학적 신학 저서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존재의 용기』였습니다. 틸리히는 아도르노의 교수자격 취득논문을 지도한 학문적 스승이었고,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은퇴할 때는 후임으로 폴 리쾨르가 그 자리에 들어왔을 정도로 현대 대륙철학의 여러 거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죠. 『존재의 용기』는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을 아주 압축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강의록입니다. '용기'라는 개념에 대한 일종의 현상학적 기술을 제시하면서, 그 개념이 철학사에서는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 우리 시대의 문화에서는 그 개념이 왜 중요성을 지니는지, 기독교는 우리에게 어떤 용기를 가르쳐주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책입니다. 단순히 심리 상태로서의 용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해 분석하는 아주 심오한 철학서인 데다, 그런 이론적인 내용을 대단히 수려하고 감동적인 문체로 제시하기도 하여서 읽으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던 책입니다.

틸리히의 후임으로 시카고 대학교 종교학과에 부임한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대표 저서 『해석의 갈등』도 일종의 '철학적 신학'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서 리쾨르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화 이론'이나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일종의 해석 이론으로 독해합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등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거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해석 이론'인 것처럼, 기독교 신학자들의 작업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해석 이론'으로 그들과 나란히 읽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해석 이론들을 경쟁하는 관점에서 비교하고 분석할 때, 그 각각이 지닌 의의가 드러날 수 있다고 리쾨르는 주장합니다. 특별히, 리쾨르 본인이 개신교인이다 보니, 그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해석 이론으로서 지닌 가치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이후에도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과 희망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가 리쾨르의 주요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사도 바울』도 아주 독특한 형태의 철학적 신학을 전개하는 책입니다. 물론, 바디우 자신은 무신론자이지만, 이 책에서 바디우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바디우 자신이 주장하는 '사건', '진리', '충실성' 개념들을 미리 선취한 인물이라는 아주 개성적인 신약성경 해석을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당대 세계의 범주 구분을 넘어서서 일종의 보편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는데, 그런 사도 바울의 활동은 그가 다마스커스에서 경험한 진리 사건에 충실하게 개입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바디우의 분석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최고의 신약성서학자 중 한 명인 존 M. G. 바클레이는 바디우의 바울 서신 해석이 성서신학적으로도 꽤나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남겨진 시간』이라는 책도 철학자가 사도 바울을 해석한 아주 독특한 책입니다. 이 책은 바디우의 보편주의적 사도 바울 해석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저는 바디우의 해석보다도 아감벤의 해석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아감벤은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들 중에서도 「로마서」를 아주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심지어 그리스어 원문을 인용하고 직접 번역까지 하면서,) 사도 바울이야말로 '예외상태'라는 개념을 가장 철저하게 사유하였던 사상가 중 하나라고 지적합니다. '(율)법'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론과 체계는 예외의 등장과 함께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예외상태를 고려하면서 살고자 할 때 따라야 하는 윤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29-32에서 주장한 “마치 …가 아닌 것처럼“의 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아감벤은 지적합니다. 칸트나 아도르노가 “마치 …인 것처럼“의 윤리를 강조한 것과 달리, 사도 바울과 아감벤은 어떠한 (율)법도 파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고려하면서 “마치 …가 아닌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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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보론을 드리자면,

이러한 분석철학 계통의 종교철학은 필연적으로 기독교 중심의 - 아주 넓게 잡아도 아브라함 계통 중심의 "종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논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요즘 세대 종교-분석철학을 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지협성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 종교 분석철학에서 발전된 개념과 도구들을 글로벌 종교에 적용해서 생산적인 논의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단초들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Cambridge element 시리즈 중에서도 * Elements in the Philosophy of Religion, * Elements in the Problems of God, * Elements in Global Philosophy of Religion

정도가 있습니다.

이 시리즈들도 비교해보시면 흥미로운 통찰과 발전상을 아실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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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러운 답변 감사드립니다!

이 책들도 궁금하네요. 감사합니다!

최고의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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