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아래 글 보니까...생각 나서 올려봅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민주주의는 강력한 자정 장치를 갖춘 권력이 분산된 정치 시스템이다. 이는 정부나 다수 유권자가 실수하거나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다른 기관, 단체, 시민의 견제와 비판으로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주의는 이러한 자정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어떤 정책을 펴건 모든 사람이 순응하고 침묵했던 것은 전체주의다. 권력을 내부에서 견제하는 자정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세기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시작했을 때 시민과 언론이 정부를 비판했던 것은 민주주의에 기반한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 시민들은 ‘정부의 오류와 실수’를 바로잡으려 했다. 물론 그로 인해 혼란과 분열을 감수해야 했고 질서를 희생해야 했지만 민주주의는 권력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와 실수를 바로잡아 왔다. 이러한 시스템을 바로잡는 자정 능력이 민주주의가 가진 힘이자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재 세력은 민주주의가 가진 이러한 자정 장치를 공격하고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12월 3일 대통령이 군사를 동원해 의회를 장악하려고 한 시도는 민주주의의 자정 장치를 파괴하려는 시도다. 자정 장치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쿠데타로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법원과 언론부터 시작했다. 전형적인 독재형 지도자들과 다르지 않게 법원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모든 독립적인 언론 매체들에 외압을 가했다.

법원이 더 이상 법적 수단으로 정부 권력을 견제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유발 하라리는 『넥서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이 정부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적기만 하면 정부에 감히 반대하는 기관이나 개인은 모조리 반역자, 범죄자 또는 외국 스파이로 매도되어 박해받는다. 학술 기관, 지방자치제, NGO, 민간기업은 해체되거나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법원이 더 이상 법적 수단으로 정부 권력을 견제할 수 없게 되고 언론은 정부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적기만 하면 정부에 감히 반대하는 기관이나 개인은 모조리 반역자, 범죄자 또는 외국 스파이로 매도되어 박해받는다. 학술 기관, 지방자치제, NGO, 민간기업은 해체되거나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이 단계에 이른 정부는 선거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기 있는 야당 지도자를 구속하거나 야당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선거구를 제멋대로 고치거나 유권자의 투표권을 박탈할 수 있다. 이런 반민주적인 조치들을 고발하면 (거부권을 행사하는 식으로) 사법체계를 교묘히 이용하거나 정부가 심어놓은 판사들이 이를 기각한다. 이런 조치들을 비판하는 기자와 학자는 해고된다. 살아 남은 언론 매체, 학술 기관, 사법 당국은 이러한 조치들이 반역자와 외국 스파이로부터 국가와 '민주주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며 찬양한다.”

시스템이 스스로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 역사는 비극을 낳는다. 중세 기독교가 신의 말씀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으며 벌인 마녀사냥은 이러한 비극의 대표적 사례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자정 노력을 거부했던 역사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스탈린의 말이나 김정은의 말에 틀려도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탈린이나 김정은이나 그들의 시스템에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했던 것도 히틀러는 결코 틀릴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는 선거 그 자체가 아니다. 선거는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다. 선거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다. 그러한 오해가 다수의 독재를 부른다.

유발 하라리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에서 51%가 선택한 정부가 투표자의 1%를 다수가 싫어하는 소수 종교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민주적일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이긴 당선자 또는 다수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인기 없는 소수를 제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며 중앙 권력에 분명한 제한이 있는 제도다.” 따라서 다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본인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와 반대되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는 숫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선거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김정은이 통치하는 북한과 푸틴의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독재 국가가 선거를 치른다. 하지만 이때 치르는 오히려 독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중앙에서 정보를 통제하지 않고 정보가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분산되어 흐르는 체제에 있다. 또한 정부와 다수 유권자조차 언제든 실수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을 교정할 자정 장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특징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권력을 박탈한다면 민주적 네트워크에 필수적인 자정 장치를 해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선거는 민주적 네트워크가 “우리가 실수했으니 다른 것을 시도해보자.”라고 말하는 장치다. 1찍이냐 2찍이냐 편을 나누며 “우리가 이기면 너네는 다 죽었어.”라고 말하는 장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소수를 비롯한 모두에게 자유가 보장되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아무리 다수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권리를 모두에게 보장하는 제도다.

우리는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와 실패를 많이 목도해왔다. 하지만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에서 말했듯이 역사의 실패를 회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역사를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 피구 시합에서, 날쌔게 피하기만 하다 결국 혼자 남으면 공을 받아안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처럼” 결국 우리는 언제까지나 회피할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이 역사의 상처를 마주보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역사를 다시 반복할 수 없다. 과거의 상처를 재현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피할 수 없는 과거다.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아픔이고 상처다. 상처의 흔적은 힘이 세다.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 미래를 써내려갈 수 있다. 또 한강 작가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바꿔쓸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게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년이 온다》에서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소년의 혼이 “어린 새”가 되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깃들었듯, 민주주의의 혼 또한 “어린 새”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날아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