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쓰고 있는 학위논문의 내용 중 일부를 올려봅니다. 저는 2016년 무렵에 서강대 고 김영건 교수님의 논문 「하이데거와 분석철학」을 통해 '에른스트 투겐트하트'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이 사람에 대한 본격적인 글을 쓰게 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네요.
투겐트하트는 정말로 읽기 어려운 철학자이고, 이 사람의 대표작인 Traditional and Analytical Philosophy에 대한 여러 리뷰에는 언제나 그 어려움에 대한 하소연이 등장하고는 합니다.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투겐트하트의 책을 "이 독창적이고, 흥미롭고,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라고 논평한 바 있고, 윌리엄 브레너(William Brenner) 역시 이 책을 "이 뛰어나고도 어려운 책"이라고 논평한 바 있죠.
그렇지만 동시에 이 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책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한스요한 글록(Hans-Johann Glock)은 투겐트하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단칭어 이론에 감탄하면서, 투겐트하트의 그 이론이야말로 "프레게주의자들과 크립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대상의 본성에 대한 전통적 철학 이론으로부터의 매력적인 통찰에 의해서도 제공된, 단칭어에 대해 내[글록 자신]가 가장 설득력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또 클라우디오 코스타(Claudio Costa)는 투겐트하트의 이 책이 20세기 절반을 지배한 언어철학의 오래된 정통에서 제시된 "백조의 노래(swansong, 최후의 걸작)"라고 평가하면서, 이 책을 다시 살려내어 크립키 이후의 외재주의적이고 인과적인 언어철학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죠.
여하튼, 대단히 뛰어나지만 워낙 어려운 책이고, 또 이 책을 이해하려면 해석학과 분석철학 모두를 폭넓게 알고 있어야 하다보니, 국내에는 투겐트하트가 거의 소개되지 않은 것이 항상 아쉬웠습니다. 학위논문의 한 챕터에서라도 이 사람의 입장을 좀 상세히 논평하고 싶은데, 아직 이 부분을 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떻게 글이 마무리될지 자신은 없네요. 여하튼, 대륙철학을 하는 분이시든 분석철학을 하는 분이시든, 투겐트하트 읽읍시다. 정말 강력 추천합니다.
해석학은 그 시작에서부터 분석철학과 꽤나 가깝게 교류하였다. 20세기에 해석학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유명한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자신의 사유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나 윌프리드 셀라스 같은 분석철학 전통의 인물들이 제시한 논의와 많은 부분 공명한다는 사실을 이미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글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기도 하였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정년퇴임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분석철학 강의를 참관하기도 하였으며, 「의미론과 해석학」 같은 논문을 통해 당대 분석철학의 성과가 해석학에 지니는 의미를 검토하기도 하였다. 분석철학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도 도널드 데이빗슨과 리처드 로티처럼 해석학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이 있었다. 데이빗슨은 자신이 아직 학부생이었던 1930년대 무렵부터 가다머의 플라톤 해석에 주목하였다고 회상할 뿐만 아니라, 그가 1960년대 이후로 수행한 의미론에 대한 탐구와 관련해서도 자신이 언어에 대한 가다머의 사유에 거의 동의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또한 로티는 분석철학 내부에서 1950년대부터 이루어진 표상주의 비판의 결과를 “인식론에서 해석학으로”라는 표어로 요약하였을 정도로 해석학을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같은 대륙철학의 다른 진영들이 대개 분석철학과 갈등하였다는 점과 비교해 본다면, 해석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놀라울 정도이다.
그러나 두 사조가 특정한 주제에 대해 종종 유사한 견해를 취한다는 피상적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 그 두 사조가 실질적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해석학과 분석철학은 많은 경우 자신들이 전제하고 있는 본래의 입장을 유지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견해를 참고하였을 뿐이다. 가령, 1960년대 후반부터 이미 유럽에서는 칼오토 아펠과 위르겐 하버마스가 분석철학을 해석학에 접목시키고자 하였고, 미국에서는 리처드 로티가 해석학을 분석철학에 접목시키고자 하였지만, 그들의 작업은 해석학과 분석철학에서 몇몇 부분만을 임의적으로 뽑아내어 그 내용을 자신들의 본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사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해석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상호적 이해가 증진되기도 하였고, 그 두 사조 사이의 공통적 논제들이 다시 확증되기도 하였지만, 두 사조가 과연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진정으로 새롭게 배웠다고 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두 사조는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상대방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작업에서 그다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해석학이 분석철학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었다거나 분석철학이 해석학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었다는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에른스트 투겐트하트는 해석학과 분석철학 사이에서 그동안 이루어진 이러한 수준의 피상적 대화를 넘어서 그 두 사조의 실질적 결합을 지향한 인물로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49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마르틴 하이데거의 마지막 제자 그룹에서 활동하였고, 1966년에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이라는 지금까지도 대단히 권위 있게 평가받는 저작을 출판하여 현상학 연구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1967년 무렵부터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 콰인, 스트로슨, 데이빗슨, 더밋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나치 시대 이후 독일에서 분석철학의 부활을 일으킨 구심점이 되었다. 특별히, 그가 1970년에 출판한 논문 「현상학과 언어적 분석」은 해석학이 후설의 현상학보다도 분석철학의 의미론이나 진리 이론을 통해 정초되어야 한다는 논쟁적인 주장을 제시한 텍스트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그가 1976년에 출판한 저서 『전통적 철학과 분석적 철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당대 언어철학의 맥락에서 새롭게 개혁하고자 한 대단히 독특하고 야심찬 작업으로 당대 독일 철학계에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분석철학이야말로 당대 독일 철학계를 주도하고 있던 후설, 하이데거, 가다머의 사유가 지닌 근본적 한계를 철저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사유가 지닌 진정한 의의를 더욱 명료하게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 투겐트하트의 주장이었다.
본고는 분석철학을 통해 해석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 투겐트하트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투겐트하트는 존재와 의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토대를 ‘정신적 눈’에 근거하여 발견해내고자 하는 후설의 현상학보다도, 그 토대를 ‘언어적 분석’에 근거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스트로슨, 데이빗슨 등의 분석철학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형식적 의미론(formal semantics)’이라고 일컬어지는 체계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대상을 결코 순수하게 지시하고 있지 않다는 해석학적 주장을 도출해내고자 하는 전략을 취한다. 술어문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통해 어떠한 기호도 사물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 투겐트하트가 해석학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본고는 우선 후설의 현상학이 상정하고 있는 ‘정신적 눈’에 대해 투겐트하트가 제시하는 비판을 요약할 것이다(제2절). 또한 존재론이 어떻게 형식적 의미론으로 변형될 수 있고, 해석학이 어떻게 술어문의 언어적 분석으로 정초될 수 있는지에 대한 투겐트하트의 주장을 소개할 것이다(제3절). 다음으로, 투겐트하트의 형식적 의미론이 단칭어의 역할에 대한 설명 등에서 대단히 탁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입장이 반드시 ‘분석철학’이나 ‘언어적 분석’ 일반의 작업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제4절). 마지막으로, 그 입장이 자신이 극복하고자 하는 ‘초월론적 사유’에 여전히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제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