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본질로 파악한다는 것에 관하여

신을 본질로 파악한다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인간을 직업, 타이틀, 능력, 재산 등으로 판단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 범주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고 결혼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사랑과 파악 내지는 이해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은 애초에 사랑이라는 관계 바깥에서 차가운 관찰로서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 조차도 사랑하지 않으면 깊은 속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신을 사랑없이 알 수 있을 것 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차가운 이성으로 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신학을 성립시켰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고, 항상 선하시기에 신인가? 신과의 사랑 바깥에서 파악된 개념들을 가지고 신을 판단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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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흥미로운데 논증을 따라가기 어렵네요. 전제-결론식 (예: 전제1: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전제2: 모든 사람은 죽는다. 결론: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으로 한 번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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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이성' 혹은 '사랑과 신학'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사랑 없는 신학이 있었나?: 저로서는 위대한 신학자들 중에서 신에 대한 사랑 없이 '차가운 이성'만으로 신의 본질을 탐구한 사람이 누가 있었는지 떠올리기조차 어렵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플라톤 철학을 최초로 결합시킨 것으로 유명한 유스티누스부터가 '순교자'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릴 정도로, 신에 대한 강렬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버린 인물입니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 최대의 신학자인 오리게네스 역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진 고문을 견뎌낸 인물입니다. 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고백록』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최고 철학자인 아퀴나스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재산과 영광을 포기하고 도미니코회에 입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루터나 칼빈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 역시 대단히 뜨거운 신앙적 열정을 가진 인물들이었습니다. 교회사와 신학사에 널리 알려진 이런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이성만으로 신을 탐구한 사람이 과연 있었는지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2) 특정 종교의 신학 없이 특정 종교의 신을 사랑할 수 있나?: 기독교 바깥에서도 신을 열렬하게 사랑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샹카라 같은 힌두교 철학자나 알 가잘리 같은 이슬람 철학자가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일반명사만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비약일 것입니다. 오히려 샹카라가 사랑한 힌두교의 신 브라흐만과 알 가잘리가 사랑한 이슬람의 신 알라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간극이 있습니다. 각각의 종교와 각각의 신앙은 단순히 '신에 대한 사랑'만으로 요약될 수 없는 수많은 차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적어도, 현대 종교학은 종교들 간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야말로 그 종교들의 핵심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상카라가 지닌 '신에 대한 사랑'은 바로 '브라흐만에 대한 사랑'이고, 알 가잘리가 지닌 '신에 대한 사랑'은 바로 '알라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 둘은 같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각 종교가 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곧 '신학'을 제외하고서는, 그 종교들에서 이루어지는 신에 대한 사랑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신학 없는 신에 대한 사랑이란 공허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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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어둠과 다투지 않습니다. 빛이 오는 즉시 어둠은 사라집니다. 어둠과 한데 엉켜서 끙끙대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빛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빛과 어둠이 교대로 순환하면서 영원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도식적 세계관은 성경에 쓰여진 하나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잡다한 세상 학문과 이교의 전통적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버려 세상을 이기신 생명의 길은 세속의 눈에는 비참한 굴욕을 당하며 철저하게 패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극도로 탄압받던 기독교를 제국 지배에 활용하는 이념으로 탈바꿈시킨 이래로 교회는 세상과 영합하는 것을 넘어 세속 권력의 핵심축으로까지 성장했습니다. 대항해시대와 함께 물류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태평양으로 옮겨지며 교황권은 쇠퇴하고 전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한 대영제국의 성공회를 거쳐 미국의 청교도에 이어졌으나 제국주의 경영이념으로서의 기독교 정치신학은 이제 종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사랑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철저히 미움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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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빛‘이라 생각하시고 신학을 ‘어둠‘이라 생각하신 것이라면 그 비유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 저에게는 몹시 의문스럽습니다. 적어도 저는 2000년 역사에서 그 수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척이나 무모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 자신이 실제로 고문당하고 순교당하고 이웃을 위해 평생을 쏟은 이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주장할 만큼 용감하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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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어둠이라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영합한 상태가 빛과 어둠이 뒤엉켜 있다는 뜻 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당대 권력과 영합의 길로 간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셨죠. 이것이 바로 어둠과 섞이지 않는 빛의 모습이라는 것 입니다. 교회가 로마제국과 영합한 때 부터 이미 교회는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 이교 신학을 들여와서 교리체계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마니교로부터 기원한 원죄론 등이 그런 영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십자가는 신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목숨을 드리는 것이 첫째 계명이라 하셨죠. 모두들 그것을 하지 않고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려다 보니, 교리체계를 만들면 당연히 예수를 벗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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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이 글뿐만 아니라 요즘 올빼미에서 성서 해석이나 신학 등에 관한 얘기가 오고가는데, 이 사이트는 철학 연구와 관련된 논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다른 주제는 다른 곳에서 얘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해서 관리자이신 @wittgenstein 님께서 한 번 정리를 해주시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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