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바지니와 삶의 의미

줄리언 바지니Julian Baggini는 자신의 저서 『What’s it all about? : meaning of life』(국역본은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 뒤에 표시되는 쪽수 모두 국역본 기준)에서 삶의 의미는 어떤 신비로운 방법에 의지할 필요 없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찾아질 수 있으며, 그렇게 찾아진 의미가 굳이 심오하고 거창할 것일 필요는 없다고, 나아가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삶도 가치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바지니는 삶의 의미의 해답으로 여겨지는 유력한 후보들을 차례대로 점검한다.

먼저 인생의 의미가 우리를 만들어낸 원인들(그것이 신이든 이기적 유전자든)에 좌우된다는 것은 잘못됐다. 왜냐하면 미리 결정된 목적이 스스로 부여한 목적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지니는 포스트잇과 프랑켄슈타인의 예를 든다. 포스트잇에 쓰일 접착제를 발명한 사람은 그것을 불필요하다 여겼지만 접착제의 유용성을 사람들이 알게 된 이후 포스트잇은 널리 쓰인다. 또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자신의 창조 과정을 알게 됐지만, 그 사실이 괴물이 삶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꼭 창조자의 의도가 있어서, 혹은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서 거기에 내 삶의 의미가 좌우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기원을 찾는 것이 현재나 미래를 더 잘 설명해줄 거라 여기는 발생론적 오류이다.

또한 인생의 의미는 미래의 목적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우리의 현재 행동을 정당화 하기위해 미래의 목적을 끌어들이고, 그렇게 정당화에 대한 질문이 미래로 계속 이어지게 된다면(무한퇴행) 삶의 목적은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현재의 삶 속에서 의미를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목적을 달성한 이후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돼 공허만이 남는 것 역시 목표달성이 인생의 의미가 되지 못할 이유 중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목적 만이 삶의 의미라 생각하며 현재의 삶을 거기에 희생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날이 오면’이라는 생각의 포로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종의 자기기만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자기의 통제와 책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재정상태 같은 외부 요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p55)

신 같은 초월론적 실재를 믿는 일 역시 인생의 의미라 볼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해 신앙 자체는 삶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삶의 의미 찾기 포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유신론자는 신이 우리 하나하나에게 목적을 부여했고, 우리가 현재 그 목적을 알지 못하지만 때가 되면 신께서 알려주시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런 믿음을 갖는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무신론자보다 유신론자가 (의미를 찾는데 있어) 우월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삶의 의미를 그 존재가 불분명한 신에게 맡겨놓고, 그것을 정확히 모르는 채 언젠가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앙을 갖는 것은 (의미를 찾는데 있어) 확신과 안정을 얻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위험한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의 믿음과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증거와 합당한 논거가 없는 그 상황에서 이성적 대응보다 믿음을 갖길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키르케고르 같이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뇌하면서도 계속해서 거기에 믿음의 근거를 두고자 했던 사람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신앙을 가졌던 이유이다.” (p.71-72) 여기서 바지니는 신앙을 반이성적이라기 보단 비이성적이라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키르케고르를 인용하며 신앙이 깊은 고뇌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시한다. 바지니는 키르케고르가 든 ‘자식을 바치는 시련에 든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신앙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공고히 한다 “신앙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책임이나 우리가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에 따르는 행위에 대한 책임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 (p.73)

(이러한 바지니의 주장은 특정 종교가 인생에 가치를 부여해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바지니는 종교를 가지는 것에는 신앙의 위험이 따르는 것이라는 점을 명시한다. 나아가 바지니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지만, 인생의 의미를 가지는 데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신비가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체적 삶을 살면서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정서적 동기 혹은 신비를 마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지니는 그런 신비의 주요원천은 어떤 초월론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라고 말한다.)

이타주의, 더 정확히 말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돕는 행위’ 역시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을 돕는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돕는 행위’ 자체가 선이라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 더 나은 처지로 이끌어주는 것’(즉 도움을 줘 좋은 행위의 결과를 낳는 것)이 선이기에 남을 돕는다. 만일 돕는 행위 자체가 선이고 인생에 의미를 제공한다면, 적어도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① 선행이 이타주의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 이럴 경우 본말이 전도되어 남을 돕는 것이 ‘어쩌다 보니’ 선행을 하는 사람도 돕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사람 자신을 돕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돕는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② 이타주의가 성공을 거두는 순간 이타주의가 불필요해진다. 남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 아닌 남을 돕는 ‘과정’ 자체가 주된 목적이라면, 남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나면 이타주의 행위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도우며 오는 좋은 느낌을 충족하기 위해 피보호자의 보호가 끝나는, 다시 말해 피보호자가 독립적으로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의존 문화’가 한 예시라고 볼 수 있다. ③이타주의가 남을 돕는 행위 자체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이타주의가 주장하는 가치를 깎아먹는다. 이타주의자는 자기 자신이 풍요롭게 사는 것보다 남을 도와 남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타주의적으로 볼 때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람이 품위있는 삶을 누리길 바라는데, 왜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도덕 규범을 적용하지 않는가? “어떻게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은 풍요롭게 사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p.94) 자신에게 한 가지 도덕 규범을 적용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 다른 규범을 적용하는 모순적인 일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지니가 희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희생은 모두에게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피해를 감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남을 돕는 것이 삶의 의미의 핵심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타주의가 증진하고자 헌신하는 가치와 모순된다.”(p.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주의는 인생에 목적의식을 불어넣고, 타인과의 교류를 촉진시킨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의미한 삶과 연관이 있다. (비록 남을 돕는 일 그 자체로는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없지만)

또다른 초월적 실재, 인간 종Species에게 기여하는 것 역시 인생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종은 개개의 구성원들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들과 구별되는 실체로, 종에 관해 참인 것들이 개개의 구성원들에게는 참이 아닐 수 있다.) 만일 종의 진보가 인간의 목적이라 주장하며, 그 근거로 인간 진화의 특성 혹은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해야 한다는 믿음을 드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발생론적 오류로 대표되는)원인과 (닿을 수 없는, 현재의 삶 너머에 있는)미래의 목적에 두는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특히 미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둔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의 공산주의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의 삶을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쓰는 집산주의적 광기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종을 비롯한 초월적 실재에 끌린다. 데이비드 쿠퍼 David Cooper에 의하면 이는 “지식과 가치는 인간의 생각과 실천에서 나온 것 말고는 어떤 근거도 없다는” ‘조야한 인본주의’를 우리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지니는 그로 인해 초월적인 것의 욕구가 존재한다 해도 우리가 이를 채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한 욕구로 인해 우리가 종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치더라도, 지각이 없는 실체인 종의 안녕에 신경쓰는 것이 과연 지각있는 존재인 개인의 안녕에 신경 쓰는 것 보다 가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행복은 조금 복잡하다. 다양한 강도와 질을 지닌 행복들이 존재하고, 우리들은 그런 행복이 자신들을 얼마나 만족시켜줄지 고민한다. 그러나 과연 행복만이 언제나 그 자체로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행복 ‘만이’ 그 자체로 추구할 가지가 있는 것일까? 바지니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 안에서 거짓 행복을 누리기 보다 덜 행복하더라도 진짜 삶을 택할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행복 못지 않게 진실성이란 가치 역시 중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은 단지 행복을 찾는 일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종류의 행복을 원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직접적인 쾌락을 좇는 행복 추구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보단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가 열망하는 것과 현실 사이에는 늘 불일치가 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행복은 직접적으로 바로 바로 얻는 것이 아니라 ‘저 너머’에 존재한다. “핵심은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이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7) 가치있는 삶을 살고 거기에 따라오는 행복을 취하는 것이다.

성공 자체 역시 삶의 의미가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성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면 그 이후에 허무에 빠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성공이란 상대적이기도 해서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의 성공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한 성공을 향한 욕망을 채워질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법은, 성공을 모든 사람이 성취하기 마련인 것으로 취급하며 성공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서의 성공’, 즉 한때 무엇을 성공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가 추구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성공에 대한 가장 타당한 인식은, 우리는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며, 실행을 통해서만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런 종류의 성공은 성취의 결과라기 보다는 과정이다.”(p.153)

이번에 바지니는 삶의 의미에 관한 태도들을 점검한다. 첫번째로 검토할 대상은 삶의 의미를 찾는데 허송세월 하기 보다 인생의 무의미를 받아들이고 순간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적 태도이다. 하지만 이 태도는 그 순간을 즐기는 ‘현재’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회피한다. 이에 갈렌 스트로슨Galen Strawson은 통속적인 견해에 반대해 일회적인 순간에 집중하는 카르페 디엠적 태도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카르페 디엠의 쾌락주의적 태도는 여전히 문제를 남긴다. 바로 쾌락을 찾아야만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일 매일 새로운 쾌락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고, 그렇다면 쾌락의 삶은 일종의 고역이 된다. 순간순간이 즐겁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되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바지니는 카르페 디엠을 순수 쾌락주의를 촉진하는 격언이 아니라, 짧은 인생 중 우리가 가진 몇 안되는 것 중 하나인 오늘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 문구를 처음 말한 호라티우스는 ‘내일은 최소한만 믿으라’고 했지, 내일을 믿지 말고 오늘을 흥청망청 소진하라고는 안했다.’) 그리고 바지니가 생각하기에 오늘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선 카르페 디엠의 통속적 이해처럼 순간의 쾌락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 가치를 두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너 자신을 버려라, 즉 무아無我의 자세는 바지니가 특히 경계하는 태도이다. 불교와 흄은 자아가 자신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육체, 사고, 감각의 집합일 뿐, 그것들과 별개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 자아를 소멸시키는 일이 더욱 진실된 삶을 살게 해준다는 근거는 없다. 구태여 집합체로서의 자아를 해체하는 것이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는 자아를 이루는 조건들이 적절히 배열되야만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할 뿐이다. 혹자는 무아의 관점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유의미한 삶을 사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 없애는 일일 뿐, 그 자체가 의미를 부여해주지는 않는다.”(p.190)

무의미 역시 검토의 대상이다. 누군가는 인생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단 사실, 다시 말해 의미를 보장해줄 외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바지니는 이 생각을 검토하며 카뮈와 <스누피>의 작가 찰스 슐츠를 예로 든다. 카뮈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절박한 문제를 제기한다 본 반면, 슐츠는 인생의 의미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슐츠는 의미가 없어도 행복하지만 카뮈는 의미가 없어 불행하다. 바지니는 두 인물의 상반된 태도는 정서적 반응차이에 불과하다고 본다. 아마 의미가 없어서 불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고통을 겪어야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기초해 있을 것이라 바지니는 본다. 고통은 깨달음의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닌데도, 우리는 고통에 특권을 부여하기에 의미 없음에 꼭 고통받아야 한다는(그것이 정서적 반응방식에 불과한데도) 잘못된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바지니는 또한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지 않는 삶이라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 주장한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삶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지니는 이에 반대한다.

다행스럽게도 성찰하지 않거나 잘못 짚은 삶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는 대단한 수수께끼가 아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인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많은 방식들을 살펴봤다. 종합해보면, 인생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인 한,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의미하고, 그 삶을 사는 이에게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 진실성, 자기표현, 사회적 관계, 개인적 관계, 타인의 안녕에 대한 관심 등 많은 것들이 기여할 수 있다.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듯 체계적으로 성찰하지 않아도 이런 것들은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삶의 의미에 대해 전혀 사고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유의미한 삶을 살 수 있다.

이상의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바지니는 자신의 논의가 직관, 계시, 권위, 미신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에 근거한 논증을 따른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적이고, 인간의 삶이 스스로 가치의 원천과 기준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인본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이성적-인본주의적 접근 방식은 인간 삶의 비이성적인 면은 외면한다는 점에서 불충분해 보인다. 그래서 바지니는 이런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반박을 점검한다 예를 들어 존 코팅엄John Cottingham은 삶의 도덕성이 인생의 의미와 분리할 수 없으며, 삶의 도덕성은 인간적 이해관계 너머에 뿌리를 둔 상위 구조에서 비롯되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인간만의 기준으로 삶의 의미를 판단하게 될 텐데, 이런 기준은 “어떤 선택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는다.”(p.223) 즉, ‘우리에게’ 유의미하거나 가치있는 삶이 유의미하다는 바지니의 삶의 의미에 대한 정의가, 자신에게만 유의미하지만 전혀 비도덕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지니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① 유의미한 삶이 도덕적인 삶이란 것을 거부한다. 의미와 도덕성이 별개라면, 유의미한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게슈타포 장교가 비도덕적이지만 유의미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통속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모순이라거나 거부당할 일은 아니다. (의미는 있으나 비도덕적인 삶이 가능하지만 그에 대해 선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② 이것이 비도덕적으로 보인다면, 의미와 도덕성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여 도덕성을 유의미한 삶의 조건으로 덧붙이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유의미한 삶의 필요충분조건은 그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가치가 있고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선한 삶이다. (비도덕적 삶이라면 유의지하지 않다.)

②는 어쩌면 임시방편의 조건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에 바지니는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즉 이 조건은 내 설명 체계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단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접붙이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이 혐의를 부인할 수 있다고 본다. 도덕성은 내 설명에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유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살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을 인정하는 일은 곧 모든 인간(그리고 아마도 일부 동물들)에게 적용되는 어떤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 인생에서 선한 것을 얻을 평등한 자격이 있다는 점과 필요 이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나쁘게 만드는 일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일을 의미한다.

더욱이 지금까지 나는 가상의 비판자들에게 다소 관대한 편이었다. 의미를 평가하는 것이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점에 대해 과장해서 말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일관된 진술은 인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야 하며, 그 가치는 그 삶을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당사자만이 자기 삶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거나, 인생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이 내가 10장에서 성찰하지 않는 삶도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한 이유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내 설명과도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유의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내 설명이 도덕성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내가 옹호하는 입장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삶을 선택한 사람을 비판할 수 없게 만든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인 선택이 전부이고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단지 개별 인간이야말로 이론의 여지 없이 만물의 척도라고 보는 인본주의적 철학을 그린 것뿐이다.

그렇다면 바지니가 생각하는 인생의 가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여러 가치들이 있다는 점을 바지니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사랑이 으뜸이라고 본다 사랑은 순수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한 이타주의를 가능하게 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욕망 등 삶의 의미의 유력 후보들(비록 앞에선 기각되었지만 우리 삶에 여러 영향을 끼치는)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자는 이번 생이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도덕성이 초월론적 영역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신성의 대체물로 보지 않으면서도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듯이 말이다. 이와 반대로 초월론자는 더 상위의 법칙과 명령에 따르는 것이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죽음마저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치 못하다. 인간의 삶에만 뿌리를 두고 있는 도덕은 도덕이 아니며, 인간 지성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면 신비는 견딜 수 없다는 식이다. 무언가 더 큰 존재에 대한 초월론의 욕망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인본주의자가 초월론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한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직시하고 받아들일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믿는다.

바지니는 책을 끝내며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몬티 파이튼 영화의 결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로 내가 제시한 설명에 "그리 특별한 건 없다. 그러나 결론이 단순하다고 해서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삶의 의미가 명백하게 드러날 수 있고, 우리 모두 삶의 의미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사제, 구루, 교사 등 인생의 의미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도전이다. 그들은 삶의 의미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견해에 도전하는 것은,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셈이다. 우리 각자에게 스스로 의미를 찾고 부분적으로 그것을 결정할 힘과 책임을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주장은 민주적이고 평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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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딴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전도서의 다음 구절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의미를 잘 집약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전도서 9:7-9)

흔히 성경의 전도서는 일종의 허무주의를 말하는 책으로 독해되고, 심지어 구약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독해가 종종 있기도 한데, 저는 오히려 전도서가 삶의 기쁨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에는 반드시 추구해야만 하는 거창한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들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행동할 때 누리는 보람과 기쁨이 있을 뿐이라는 거죠.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엘륄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전도서에 대한 유명한 철학서인 『존재의 이유』를 쓴 적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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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도서를 읽어본적이 없고, "세상만사 헛되다"란 구절 때문에 그 구절만 보고 전도서가 인생의 허무를 나타내는 저작으로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알고있었군요.

책의 저자인 줄리언 바지니는 합리적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종교적 체험이나 심오한 통찰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견해에 반대하지만, 거창한 삶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주장한다는 점에서 말씀하신 <전도서>와 비슷한 가치를 옹호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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