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순수 지성의 원칙들의 체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1781/87)에서 "순수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들의 체계"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이른바 '초월철학'¹이 가지는 근본 명제는 바로,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KrV, A158=B197)²라는 말이다. 이것이 칸트의 인식이론 전체의 근본 토대이자 결론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지성은 "규칙들의 능력"(KrV, B171)인데, 그것이 경험의 원천이기도 하기에, 모든 현상들은 반드시 규칙들에 종속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규칙들 없이는 현상들에 결코 [그 현상들에 대응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귀속할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KrV, A159=B198) 그리고 이런 것들은 또한 종합적 통일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없다면 경험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식'이 되지 못하고, 단지 "지각들의 광상곡"(KrV, A156=B195)일 뿐일 것이니 말이다. 칸트 철학에서 진정한 인식은, 단지 공간과 시간의 직관만 있어서는 안 되고, 지성의 종합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래서 이 규칙이라는 것은 경험 인식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한에서, "경험 중에서, 아니 심지어는 경험의 가능성 중에서" 지적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네 가지 선험적 원칙을 자신의 체계 내에 도입한다. 앞의 순수 지성개념들(KrV, A80=B106)이 지성의 기능들의 "분해 작업"(KrV, A66=B91)이었다면, 이 원칙들은 그것의 사용에 관계한다. 그것은 (1) 직관의 공리들 (2) 지각의 예취(豫取)들 (3) 경험의 유추들 (4)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로 구분되는데,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의 두 가지 원칙들은 "수학적 원칙들", 나머지 두 가지는 "역학적 원칙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전자는 직관에 관여하고, 후자는 현상 일반의 현존에 관여하기 때문이다(KrV, A160=B199 참조). 수학적 원칙들은 합성적인, 다시 말해서 "상호간에 필연적으로 귀속함이 없는 [동종적인] 잡다의 종합"(KrV, B202 주)으로, 집합적(1)이거나 연합적(2)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는 기하학적 대상의 지각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에 반해 역학적 원칙들은 "상호 필연적으로 귀속하는 [이종적인] 잡다의 종합"으로, 물리학적(3)이거나 형이상학적(4)이다. 예컨대 두 현상의 인과성이나 양태 문제가 이에 속할 수 있다.
뒤에서 자세히 다룰 '지각의 예취들'(2)에 앞서 서술되고 있는 직관의 공리들(1)은 연장적 크기들에 관계하는 원칙이었다. 그것은 모든 직관들은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규정되는 한에서 연장적으로 표상되고 포착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순차적 종합"(KrV, A163=B203), 다시 말해서 부분들의 표상에서 또 다른 부분들의 표상들로, 그렇게 해서 전체 표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종합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지각의 예취들"은 '순간적인' 종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밀도적 크기들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칙에 대한 해설에서 독자들은 매우 의심스러운 내용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KrV, A172=B214)라는 명제다. 이것이 칸트 철학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칸트를 '에테르'라는 형이상학적 소재의 착안으로 이끄는가? 이 글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개괄해 보고자 한다.
2. 『순수이성비판』에서 "지각의 예취들"
'지각의 예취들'이라는 이 원칙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모든 현상들에서 실재적인 것, 즉 감각의 대상인 것은 밀도적 크기, 다시 말해 도(度)를 갖는다."(KrV, B207). 여기서 밀도적 크기라는 것은 첫 번째 원칙, 즉 직관의 공리들의 원칙에서 다루는 연장적 크기와의 대조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략히 설명한 바 있다. 현상에서,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크기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만일 지각에서 어떤 크기—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공허해서 지각이라고 불릴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지각은 바로 "현상으로서의 직관에 대한 경험적 의식"(KrV, B160)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순수 지성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에서 밝혔듯이, '포착'의 종합이 경험 인식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하다. 그리고 감각은 이 기능에 의해서 '포착된다'. 그런데 포착이란 것은 잡다를 "한 표상 안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KrV, A99) 종합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감각은 한 순간에 포착된다. 이는 순차적인 종합을 필요로 하는 연장적 크기의 원칙(1)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점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말하는 '크기'는 연장적 크기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연장적 크기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순전히 형이상학적일 뿐인 가정이자, 더구나 경험에 의해 반박될 것이니 말이다.
감각의 포착에 대한 설명에로 다시 돌아가보자. 감각의 포착은, 앞서 설명한 것들에 따라, '정도'에 관계한다. 이것은 그대로 말하면, "경험적 의식에서 순수 의식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단계적인 변화가 가능하다"(krV, A166=B208)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지각이 곧 직관된 것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의식에 그것의 질료들이 대응한다고 한다면, 감각 또한 임의의 [밀도적] 크기 변화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판단 양태들을 도외시한다면— 감각의 정도가 곧 의식의 정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관이 가장 충만한 경험적 직관=1에서 순수 직관=0에까지 이른다면, 감각 또한 가장 실재적인 감각=1과 감각의 결여=0에까지 이를 수 있다. 0과 1의 이 두 양극 사이에는 아주 무한한 차이 나는 도(度)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현상에서의 모든 실재적인 것의 완전한 결여를 증명하는 지각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러니까 또한 경험도 가능하지 않다."(KrV A172=B214) 왜냐하면 칸트에 따르면 무엇보다 실재적인 것의 결여는 결코 지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0은 매우 점근선적인, 말하자면 (칸트적 의미에서는 아닌, 순전히) 이념적인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서 공간과 시간의 모든 직관에서는 "어떤 부분도 비어 있지 않다"(KrV, A172=B214)
3. "빈 공간은 없다"
칸트의 이 기묘한 명제, "빈 공간은 없다"는 명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86년의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를 집필하면서, 칸트의 이 생각은 더욱 구체화된다. 그에 따르면, "물질 내부의 빈 공간은 비록 논리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동역학적으로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될 것"(Hall 2015, 74 참조)이라는 것이다. 또 이런 관점은 그가 일찍이 「기하학과 결합된 형이상학의 자연철학에서의 사용—그 첫 시론으로서의 물리적 단자론」(1756)에서 취한 입장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원자 대신 "단자", 즉 "단순 실체로서 다수의 부분들로 구성된 것이 아닌"(Kaulbach 2019, 80) 다시 말해 단순하고 비합성적인 본성을 가지는 어떤 개념을 제시한다. 이때 "단자는 운동이므로, 무턱대고 단지 공간 안에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공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을 채우기도 한다."(Kaulbach 2019, 82)
다시 돌아와서, 이 책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에서 그는 특히 원자론자들의 이론들—빈 공간의 존재—을 반박해 나간다. 이후에 살펴볼 에테르 개념 또한 원자론자들의 '빈 공간'이라는 가설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Hall 2015, 57). 원자론자들이 원자들을 분리하기 위해, 또한 서로 다른 밀도의 물리적 대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빈 공간들이라는 가설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여, 칸트는 지각의 예취들에서 밝혀졌듯이 그것이 경험의 가능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빈 공간은 주관을 촉발할 수 없"으니 말이다(Hall 2015, 98).
더 나아가서 칸트는 "경험의 통일성"을 위한 요청으로서, 빈 공간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빈번하게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노년기의 편린들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바이다. "오직 하나의 세계(우주)만이 실존한다."(OP XXI53) 즉 "복수의 경험들이 아니라 경험[이 있다]."(OP XXI90) 그는 이 원고들에서 "신,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세계 내의 감성존재자 즉 인간"(XXI39)의 체계를 다루면서,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을 수 있다"(XXI20)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 반대극인 세계 또한 결코 경험적 세계'들'이 아니며, 이념적 무한성으로 인식되는 "단 하나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긴 하다. 이는 그가 옛 형이상학으로 회귀한 것, 다시 말해 역진(逆進)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의 통일성에 대한 칸트의 이런 생각은 이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도 경험의 통일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 모든 지각들이 일관되고 합법칙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표상되는 오직 하나의 경험만이 있다."(KrV A110 및 곳곳) 즉 경험의 통일성은 이전부터 칸트 인식론의 기본 이념이었다. "경험은 항상 하나의 체계이며, 오직 그러한 선험적 원리들에 따라서 가능한 체계로서만 초월적인 유일한 것이다."(OP XXI101) 물론 이것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경험은 경험을 이루는 가능한 지각들의 완벽성으로의 점근적인 접근 이상의 것이 결코 아니다. 결코 확실성이 아니다."(OP XXI61) 그런데 이런 경험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경험의 통일성의 필요충분한 네 가지 조건으로서 공간, 시간, 범주 그리고 통각을 제안하고, 오직 이 네 가지로 그것을 제한한다(Hall 2015, 97 참조). 그러나 이것은 경험의 필연적인 조건들일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충분한 조건들인지는 문제가 된다. 이후에 칸트는 초월적이고 형식적인 저런 조건들이 경험의 통일성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서 질료적인 조건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때 칸트가 도입하는 개념이 바로 '에테르(Äther)'이다.
4. 『유작』에서 에테르 존재 증명
이렇게 해서 칸트의 '에테르' 개념은 기본적으로 경험의 통일성을 충분하게 보증할 수 있는 질료적인 조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공간과 시간, 범주와 통각의 형식적인 조건들로만은 불충분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로써 도입된 것이 질료적 조건으로서의 에테르라고 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물질의 차이는 원자론적으로, 가득 찬 것의 사이사이가 비어 있는 것과의 합성에 의해 설명될 수가 없다"(OP XXI218)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따라서 세계공간은 전체적으로 물질로 채워진(빈 공간도 폐쇄 중간공간도 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운동하는 물질"(OP XXI225), 즉 "모든 것에 침투하여 전 세계공간을 채우는 하나의 물질"(OP XXI222)을 생각하게 된다.
"연속체로서 전체 세계공간에 퍼져 있는, 모든 물체들에 균일하게 스며들어 채우는(그러니까 어떠한 장소 변화에도 예속되지 않는) 물질이 있다. 이 물질을 이제 사람들은 에테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열소 등등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이 물질은 (어떤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또 주어진 작용결과에 대한 모종의 원인을 다소간에 그럴듯하게 생각해보기 위한) 가설적 소재가 아니라,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들로부터 물리학으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선험적으로 인정되고 요청될 수 있는 것이다."(OP XXI218)
칸트는 이것을 "실재적이고 이성에 의해 선험적으로 주어진"(OP XXI216)것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이 '가설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에테르 연역에서 드러나는 점인데, 브라이언 웨슬리 홀(Bryan Wesley Hall)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Hall 2015, 98이하).
(1) 경험의 통일성(전체)가 있다(OP XXI572).
(2) 주관은 오직 그 대상들이 그를 촉발하는 한에서만 외적 대상들에 대한 경험을 가질 수 있다(같은 곳).
(3) 빈 공간은 주관을 촉발할 수 없다.
(4) 그러므로 경험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의 분석적 결과로서 어떤 현실적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
(5) (4)에 따라서, 경험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의 분석적 결과인 그 대상은 (a) 에테르와 그것의 규졍된 속성들이거나, (¬a) 빈 공간을 함유하거나 그것에 의해 분리된 물리적 물체들의 기계적 전체일 것이다.
(i)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빈 공간을 함유하거나 그것에 의해 분리된 물리적 물체들의 기계적 전체는 경험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의 분석적 결과이다.
(ii) (1)과 (2)에 따라서, 경험의 통일성 안에서 모든 외적이고 포괄적인 것들은 주관을 촉발할 수 있어야 한다.
(iii) (i)과 (ii)에 따라서, 빈 공간은 주관을 촉발할 수 있다.
(iv) (3)과 (iii)의 모순.
(6) 따라서 (a)에 따라, 에테르와 그것의 규졍된 속성들은 경험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의 분석적 결과이다. [간접 증명] (OP XXI574)
이로써 에테르는 "실재적인 실존적 원소"(OP XXI225)이자 "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는 개념으로서 요청된다. 즉 이 에테르(또는 열소)는 "가능한 경험의 전체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OP XXI224)인 것이다. 물론 이 증명에는 한계가 있다. 칸트는 주관이 경험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오직 그가 대상들에 촉발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세운다. 이는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감성학"의 일반적 내용이었다. "직관은 오로지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질 때만 생기며, 다시금 그러나 이런 일은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대상이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촉발함으로써만 가능하다."(KrV, A19=B33. 인용자 강조) 이런 촉발로부터 주관은 순수 직관, 즉 공간과 시간 표상에 따라 주어진 것을 "현상하는 대로"(KrV, B69)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촉발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그것은 사물 자체인가 아니면 현상인가? 잘 알려져 있듯이, 만일 사물 그 자체가 주관을 촉발한다면, 범주가 그 사용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반대로 현상이 주관을 촉발한다면, 촉발의 결과인 이 현상이 그 자체로 촉발의 원인이어야 한다(Hall 2015, 154 참조).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야코비(F.H.Jacobi)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을 결론지은 바 있다. "사물 자체 없이는 칸트 철학에 들어갈 수 없고, 사물 자체를 가지고는 칸트 철학에 머물 수 없다;" 그래서 이 촉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유작(Opus Postunum)』의 에테르 실존 요청은 칸트의 이 촉발이라는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에테르는 "모든 외적 경험의 가능성의 제일 조건"(OP XXI551)이고, 가설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 경험에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각 불가능"(XXI537)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경험객체가 아니다."(OP XXI219) 그럼에도 칸트는 이 원소는 실재성을 갖고, 그것의 실존이 요청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없다면 "공간이 감관객체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같은 곳)이다. 따라서 이것의 현실성은 선험적으로 가능한 경험을 위해 요청된다. 이 에테르의 특성은 "하나의 시원적인 그리고 무한히 감소되지 않는 영구적인 내적으로 운동하는 물질"(OP XXI192)로서, 계량불가능성, 차단불가능성, 응집불가능성, 고갈불가능성을 가진다(OP XXI232).
5. 나가며
칸트의 에테르 이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빈 공간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명제에서부터 그 시초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현상에서의 모든 실재적인 것의 완전한 결여를 증명하는 지각은 가능하지 않다. 그는 비판기에는 그것을 지각의 예취들의 원칙의 자명한 결과로서 받아들이지만, 더 이상 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한편으로는 원자론자들에 대항한 자신의 물리학적 이론을 내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년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개념—즉, 경험의 형식적이 아닌 질료적인 조건—을 요구하게 되면서, 칸트는 점차 하나의 근원적 원소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연속체로서 전체 세계공간에 퍼져 있는, 모든 물체들에 균일하게 스며들어 채우는, 근원적으로 운동하는 물질이며, 한낱 가설적 개념이 아니라 경험의 통일성을 위해 질료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에테르의 실존 증명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그가 주관의 촉발이라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한에서 발생하는 문제일 뿐이다. 물론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저마다 상이하겠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이 시도가 실패했든지 성공했든지 간에, 이것은 그의 『순수이성비판』이 가진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약호 KrV)
임마누엘 칸트, 『유작 I.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20 (약호 OP)
임마누엘 칸트, 『유작 I.2』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20
임상진. (2007). 「전비판기 칸트의 객관주의적 자연철학」. 철학, 90, 75-106.
Immanuel Kant, Opus Postunum, trans. Michael Rosen, Cambridge, 2012
Bryan Wesley Hall, The Post-Critical Kant, Routledge, 2015
F. Kaulbach,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19
주석
1 이 글에서 용어 transzendental은 '초월적'으로, transzendent는 '초험적'으로, a priori는 '선험적'으로 옮겨 사용할 것이다. 칸트 철학에서 이 용어는 '그 자체 선험적이면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을 의미한다(B25, 또한 『형이상학 서설』 VI373 참조).
2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할 때는 약호 KrV를 사용한다. 그러나 칸트 원문에서의 인용일 경우, 번역서의 면수가 아닌 아카데미판(AA)의 면수로 초판(A)과 재판(B)을 병기하여 표기한다. 『유작』의 인용에서도 마찬가지로 번역본 면수 대신 권수 XXI을 기준으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