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과학철학 개론서 초두에는 구획문제라고 불리는 과학철학의 물음이 소개됩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는 어디에 그어지는가, 과학을 과학이게끔 해주는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yhk9297님께서도 좋은 개론서를 추천해주셨지만, 질문자분께서는 철학에 생소하신 분이라 생각이 되어서,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의 1장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의 주장 자체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될 것 같습니다. 1) 과학은 실험과 관찰이 핵심적이지만, 철학은 논리와 추론이 중심이다. 2) 과학은 자연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지만, 철학은 생각의 방법을 탐구한다.
그런데 두 주장 모두가 제게는 그리 정당해보이지 않습니다. 질문자분께서 각각에 상응하는 근거가 없이 주장만 제시하고 계신 까닭입니다. 현대 과학에서 실험과 관찰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과학이라고 하여 논리와 추론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과학은 추론 과정을 거칩니다.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영역은 수학적 추론을 활용하고, 의학에 경우에도 역학(epidemiology)에서 쓰이는 통계적 추론과, 임상에서 사용되는 추론이 있습니다. 이들 추론은 각각의 과학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철학도 실험과 관찰을 중요하게 다루기도 합니다. 실험철학이라 불리는 분야는 실험에 의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연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적 사조는 철학이 경험과학과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모든 철학 분야가 그런 특성을 갖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방법의 측면에서 철학과 과학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주장인 철학이 생각의 방법을 탐구한다는 것도 제게는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철학의 중요한 분야인 형이상학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즉, 자연의 존재 방식을 묻습니다. 생각의 방법이라 함은 아마도 지식에 대한 탐구영역인 인식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같습니다만, 철학은 인식론뿐이 아닙니다. 정치/사회철학, 윤리학, 형이상학 등은 정신적 차원을 넘어 분명히 현실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글의 전반적인 형식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질문자분께서는 기존 철학적 논의에 익숙지 않아 철학적 담론에 흔히 쓰이지 않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용어 선택에 있어 엄밀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읽었을 때 의미가 분명치 않기도 합니다. 특히 첫 문단이 그렇습니다.
또 아까 말씀드린대로, 주장을 하기 위해선 항상 어떤 근거가 그를 정당화해주어야 합니다. 철학적 담론은 나는 나의 의견을, 너는 너의 의견을 개진할 뿐인 수준에 그치지 않습니다. 각각의 주장의 근거를 검토해서, 그의 주장이 정말로 믿을만 한지를 따져보고, 그렇게 하여 많은 이들이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결론적으로 개론서를 읽어보시면서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개념어들과 논증 구조을 익히시는 것이 사고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비전공자로서 같은 방식으로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