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욱 님의 저서《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의 리뷰를 써봤는데 같이 의견 나누고 싶어서 올려봅니다..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근대 이후를 사유하기
날씨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면에 어떤 철학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흐린 하늘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서늘함을 경험할 수 있다. 결국, 날씨도 인간의 주관적 체험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식의 틀에 따라 변주된다. 그렇다면, 철학이 바라보는 오늘의 날씨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근대의 유산과 우리가 놓친 가능성
저자는 우리의 삶이 여전히 근대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본다. 근대는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시대였다. 이성적 사유, 합리성, 수학적 질서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전례 없이 변화시켰다. 하지만 근대는 다른 많은 가능성을 외면한 시대이기도 했다.
근대가 추구한 것은 진보의 확고한 목적의식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른 가치들은 희생되었다. 다양한 것들의 조화, 타자에 대한 환대, 비판적 사고, 감수성과 공감 능력은 근대적 질서에서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났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 그 이성은 모든 것을 환원하고 동일하게 만드는 질서로 작동했다. 세계는 숫자로 측정되고 관리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역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을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대항해시대는 내면의 공허함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식민지 개척과 정복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또 다른 가능성은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는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한 난민들이 세운 나라다. 그들에게 세계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었으며, 낯선 타인과의 공존 속에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근대가 배제한 가능성들을 다시금 사유할 수 있을까?
근대의 이성이 만든 신경증적 주체
근대인은 이성의 힘으로 놀라운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배제한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자신이 몰아낸 것들은 억압된 채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 꿈속에서 추방된 존재들과 마주하는 것처럼, 근대인은 자기 내부에서 쫓아낸 것들을 다시 발견하며 불안을 느낀다.
늑대인간 신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동물성을 극복하고 이성적 존재로서 확립되었지만, 동시에 동물적인 본능을 억누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억압된 본능은 신화적 존재로 변형되어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근대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세계를 조직했지만, 그 과정에서 제거한 요소들이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킨다.
우리는 너무 빠른 해답을 좇았다
근대 이후, 우리는 빠른 해답을 원했다. 질문하는 법을 배우기보다,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남이 제공한 해답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무용한 것이며, 삶에 적용할 수 없는 공허한 지식일 뿐이다.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해답을 너무 쉽게 찾으려 하기보다, 문제의식을 갖고 삶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질서가 과연 유일한 가능성인가? 혹시 우리는 더 나은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바보의 가능성: 순수성과 새로운 질서
세속적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회는 바보라 부르며 멸시한다. 하지만 바보야말로 기존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다. 사회적 경쟁 속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 만든 세계를 벗어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보는 기존의 지배적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세계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바보는 현실의 불합리함을 문제 삼지 않은 채 복종하는 이들과 다르다.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낯설게 보고, 그 너머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남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는 세계를 거부하고, 무위(無爲)의 삶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목적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기: 산책과 반복의 의미
우리는 너무 목적에 얽매여 있다. 삶은 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며, 효율적으로 성과를 내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 지향적 삶은 오히려 우리를 구속하고, 다른 가능성을 차단한다.
산책은 목적 없는 움직임이다. 계획 없이 떠나는 발걸음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예상치 못한 생각들을 만난다. 철학적 사유도 이와 같다. 빠른 해답을 찾는 대신, 자유로운 탐색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반복은 의미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목적을 위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는 반복이 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날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적 없는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존재 자체를 긍정할 수 있다.
근대의 교육과 그 한계: 복종하는 이성
근대적 교육은 이성을 강조하지만, 결국 권력에 복종하도록 훈련한다. "당신이 따지고 싶은 것에 대해 따지고 싶은 만큼 따져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 말은 근대 교육의 본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바꿀 힘은 주어지지 않는다. 계몽과 이성은 정치적 질서에 종속된 도구로 작동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제는 근대적 이성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이성이 정치와 결탁하여 기존의 구조를 지키는 도구가 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힘이 되어야 한다. 철학은 단순히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날씨를 바꾸는 철학: 열린 가능성의 세계로
같은 날씨라도 우리가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근대는 특정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정립했지만, 그것이 유일한 시선일 필요는 없다. 철학은 날씨를 바꾸듯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근대의 이성이 외면한 가능성들을 다시 열어젖힐 때, 우리는 더 이상 불안한 신경증적 주체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질문하고, 사유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때, 날씨는 바뀐다. 철학이 변화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