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학 쪽 분위기는 어떤가요

철학 커뮤지만 신학, 종교학 쪽에 조예가 깊은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여쭤봅니다..

요즘 국내 불교학 쪽은 예산 문제 때문인지 학문 트렌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불교사본학/문헌학 쏠림 헌상이 심한 것 같습니다. 교수 임용에도 그런 경향이 반영 중이고..

한국 불교랑 연관성이 적은 인도불교철학은 어느 대학이든 나가리네요..
모 명문대 철학과에서도 인도 유식 전공한 교수님이 은퇴하신 후 인도불교 전공자 충원이 없고..

불교 철학 분야는 거칠게 말하자면 그냥 포기하고 해외 학계에 위탁하는 수준까지 떨어진 것 같네요. 계속 이러다간 불교학계랑 불교계 현장은 완전히 따로 놀 판인데..

국내 신학계도 비슷한 쏠림 현상이 있나요..? 현대 신학도 불교학처럼 문헌학/사본학 선호 경향이 강한지..어쩐지..

3개의 좋아요

서강올빼미에 외국에서 신학으로 유학하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신 것으로 아는데, 전공자도 아닌 제가 댓글을 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몇 가지로 상황을 구분해야 할 것 같아요.

(1) 한국의 경우, 각각의 신학교나 교단의 신학적 스텐스가 전공자분들의 상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매우 보수적인 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아주 급진적인 신학교에서는 정통적인 교의학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어서요. 그래서 어떤 배경에서 공부하는지에 따라, 그 배경에서 말하는 '분위기'가 크게 다를 거예요. (물론, 자신이 속한 배경에 대한 '저항심'이나 '반감' 때문에, 그 배경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전공자분들이 종종 나오기도 하지만은 말이에요.)

(2) 신학쪽은 '쏠림 현상'은 적은 것 같지만, 하위 분야에 따라 분위기가 꽤 다른 것 같아요. 가령, 기독교 교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하는 '조직신학'과 성서 본문의 내용 각각에 대해 연구하는 '성서신학'은 분위기에서 다소 차이가 있더라고요. 마치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차이처럼요. 물론, 요즘에는 각 분야의 연구가 다른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읽히는 경우가 자주 있긴 하지만, (가령, 칼 바르트 같은 조직신학자들은 성서신학에서도 꽤 자주 긍정적으로 인용되고, 톰 라이트 같은 성서신학자들은 조직신학에서도 꽤 자주 긍정적으로 인용되지만,) 두 분야가 아무래도 연구의 범위나 목적 자체가 좀 다르다 보니 두 분야 모두에 통용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더라고요.

(3) 제가 신학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현대신학의 '경향'에 대한 지식이 다소 한정되어 있지만, 대략 5년 사이에 국내에 소개된 경향들 중에서는 한 네 가지 정도가 꽤 흥미롭더라고요.

급진정통주의: 탈근대 이후의 사상에 신학이 맞서기 위해서야말로 '정통(orthodoxy)'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사조에요. 다만, 이때의 정통이란 단순히 교조적이고 전근대적인 정통이 아니라, 현대의 철학과 사회 이론의 성과들을 충분히 인지하고 흡수한 아주 '급진적'인 정통이죠. 급진정통주의는 사실 이런 철학과 사회 이론들이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기독교 신학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이론들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근본적으로 세계 전체에 대한 거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의 여왕'이라고 강조해요.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 존 밀뱅크(J. Milbank)와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J. K. A. Smith)가 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급진정통주의 사상가들이에요. 그리고 아마도 이들의 뿌리는, 영국의 유명한 추리작가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체스터튼(G. K. Chesterton)으로 거슬러 올라갈 거예요. (체스터튼의 주요 저작들이 작년 말에 국내에 새로 번역되었죠.)

기독교 플라톤주의: 급진정통주의와 비슷한 맥락에서, 기독교 교부들의 저작 및 중세 사상가들을 재발견하려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더 나아가, 그들의 기원에 있는 플라톤주의적 사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사유가 어떤 점에서 근대적인 사상들보다도 더욱 뛰어난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 소개하려는 경향이죠. 한 마디로, '전근대적(pre-modern)' 사상인 것처럼 보였던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야말로 가장 '탈근대적(post-modern, 포스트모던적)' 사상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국내에는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 한스 부어스마(H. Boersma)와 영국의 가톨릭 신학자 폴 타이슨(P. Tyson)의 책이 소개되어 있더라고요.

선물의 신학: 문화인류학적으로 '선물(gift)'이라는 개념이 가진 의의가 기독교의 '은혜(grace)' 개념을 해명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발견이 최근에 강조되고 있어요. 신약성서신학에서는 지난 30년간 '바울에 대한 새관점'이라는 중요한 연구 사조가 있었는데, 그 연구 사조의 최근 성과가 존 바클레이(J. Barclay)라는 뛰어난 영국의 성서신학자가 쓴 『바울과 선물』이라는 대작을 통해 한 단계 새로운 측면으로 도약하였거든요. 고대인들이 (특별히, 그리스-로마 문화의 사람들이) '선물'이라는 개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고찰해야,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라는 것이 고대인들의 '선물' 개념과 얼마나 유사하면서도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가 제대로 해명된다는 연구에요. 성서신학에서 출발한 연구이지만, 요즘은 조직신학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는 연구인 것 같더라고요.

레위기와 십자가: 레위기에 대한 아주 뛰어난 연구들이 밀그롬(J. Milgrom)이라는 유대교 성서학자에 의해 90년대에 이루어짐에 따라, 기독교 신학에서도 레위기를 읽는 방식에 여러 가지 큰 변화가 생겼어요. 특별히, 레위기의 제사를 '속죄'보다도 '정화'라는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는 인식이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죠. 그리고 이에 따라, 기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속죄'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려 한 중세 안셀무스 이후의 조직신학적 입장들을, 이제는 '정화'라는 맥락에서 보완해야 한다는 논의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리고 이 경우 십자가 사건은 2세기 교부 이레나이우스의 '총괄갱신론'에 가까운 방식으로 해석되죠.) 이와 관련한 내용이 라이트(N. T. Wright), 부어스마(H. Boersma), 모핏(D. B. Moffitt)의 저작들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었고, 국내 연구자들 중에서는 김경열 교수님이 이에 대해 반박하는 입장을, 성기문 교수님이 이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7개의 좋아요

정성글 감사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다양하고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 같네요..

불교학은..적어도 한국의 불교학은 새로운 담론 형성이 불가능한 것 같구요.

뒤늦게 문헌학/사본학 좀 건드리다가 일본 불교학계처럼 대중과 사회와 유리되어 쇠퇴하는 결말을 맞을 것 같네요. 한 10~20년 안짝으로..

추천하신 책과 영상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해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개의 좋아요

독일어권 조직신학(교의학, 종교철학, 윤리학)에 한정해서 보면, 21세기 전환기에 유행하던 에큐메니컬 신학은 현재 빙하기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침묵기입니다. 실제로 가톨릭신학의 두본성론의 유지와 개신교 신학자들의 두본성론의 폐기는 합의가 불가능할겁니다.
그 외에 사실 독일어권 조직신학 분야는 문화신학을 축으로 하는 슐라이어마허, 틸리히 그리고 트뢸치 연구가 한창이고 최근엔 리츨과 리츨학파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중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다 제외하고도 독일어권 신학이 인기없는 가장 큰 이유는 명제식 신학작업을 오늘도 여전히 진행한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이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으로 진행되는 작업은 실제로 전문학자를 제외하고 관심을 가지기 참 힘든 작업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독일어권에서 가장 주목받은 책은 Die Verzauberung der Welt. Eine Kulturgeschichte des Christentums 라는 제목으로 쓴 뮌헨 조직신학 교수 외르그 라우스터의 저서가 현재 가장 대중적으로 설명가능한 독일 개신교 조직신학의 흐름을 대변한다고 보면 괜찮을거 같습니다.

5개의 좋아요

제 비루한 이해에 따르면 YOUN님은 영미권 신학 동향, jhpark님은 독일권 신학 동향을 위주로 설명해주신 것 같네요..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한국 불교학은 아무래도 대륙권과 일본 불교학 영향을 많이 받다보니 역시나 대중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1개의 좋아요

신학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에서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그렇다면 개신교 신학자들은 칼케돈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인가요?

2개의 좋아요

개신교 신학에서 두 본성론에 대한 비판은 이미 두 본성론의 형성과정에서 두 가지 지점에서 비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고, 둘째로 기독론에 대한 질문이 이미 고대 칼케돈 공의회와 완전히 다른 지평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더 이상 두본성론으론 예수의 인격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 개신교 신학은 두본성론의 폐기 이후 계몽주의의 역사와 계시의 관계라는 질문 아래서 기독론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여기서 바우어 학파(신튀빙겐 학파) 이후 사변적 신학(대표적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연구로 인해 고전적 두 본성론과 역사적 예수의 일치를 파괴하고, 신의 진리는 역사적 구성에서 임의적이라는 계몽주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헤겔적 절대정신으로서 신성과 인성의 사변적 일치라는 관념을 기독론의 본질로 보았고, 이후 우리가 오늘날 자유주의신학이라고 언급하는 리츨과 리츨학파는 예수의 내적 삶의 총체적 인상으로서 예수상(Jesus-Bild)를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를 중심으로 구성된 기독론을 제시합니다.
(특히 개신교는 가톨릭과 다르게 교회법으로서 교리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가톨릭 신학과의 간극은 일반적 인식보다 심각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4개의 좋아요

저도 궁금한데, '첫째'와 '둘째'라고 설명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 같긴 해요. 또 '역사와 계시'라는 주제도 중요하긴 한 것 같고요. 다만, 이 모든 논의들이 두 본성 교리에 대한 폐기를 반드시 함의하는지는 조금 의문스러워요. 두 본성 교리가 '폐기'되었다기보다는, 단지 개신교 신학자들이 그 교리에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온건한 서술이 아닐까요? 딱히 두 본성 교리를 적극적으로 인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고서도 기독론을 전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들이 생겼다 보니, 굳이 그 교리를 예전만큼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을 뿐인 것이 아닌가 해요. 저로서는 저 교리 자체를 아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을 본 적은 아직 없어서요. (두 본성 교리 말고, 두 의지 교리에 대한 거부는 실제로 미국 철학자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가 제시한 것을 본 적 있지만 말이에요.)

2개의 좋아요

두 본성론의 명시적 폐기는 소위 독일 자유주의신학 또는 독일 내 신학적 논쟁에서 필연적 귀결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은 소위 정통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지역이라서 이 논쟁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쟁의 맥락은 "법으로서 교리"라는 주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고전적 교리는 소위 신에게 의해 제정된 법으로서 교리와 이 법의 보증을 위한 기관으로서 교회라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법에서 벗어난 교리를 이단으로 제정하고 정통이라는 교리를 교회에 의해서 보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리츨과 하르낙은 고전적 교리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교리에는 그 시간을 가졌으며, 따라서 각 교리는 시간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교리, 즉 한 시대의 종교적 경험의 표현으로서 교리가 법적 속성을 가진 대상물로 규정하면서 문제가 생겼으며, 이제 더 이상 예수의 총제적 인상을 전달할 수 없게 왜곡되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히는 초기 경험 전달을 상실한 형식적 고전적 형태는 의미성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가 현재와 관계된 상황연관성 안에 교회의식 안에서 인간의 심성을 언어로 표현한다고 정의한 이후 교리는 법규정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의 주관성에 기초한 자기의식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적 관점에서 새롭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위 신개신교(Neuprotestantismus) 또는 문화개신교 안에서 기독론과 삼위일체 구성의 출발점으로 두본성론의 폐기 또는 파괴(물론 긍정적 새로운 구성이 위한)가 전제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구성을 바우어 및 슈트라우스와 같이 철학적 사변을 통해하는냐(Spekulative Theologie) 아니면 역사적 예수의 내적 삶(리츨 및 리츨학파)을 통해하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매우 논쟁적인 구성이긴합니다.

3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