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카뮈>를 읽다가 - 네이글과 카뮈, 그리고 칸트

  1.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란 '이 세계의 참된 인식에 대한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세계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민음사, 2016) p. 41)

예를 들면 이 세상을 알기 위해 우리가 의지하는 학문은 과학이다. 과학은 이 세상의 법칙을 알려준다. 이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 안에는 전자들이 핵 주위를 회전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등 이런 식으로 설명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러나 이쯤 되면 듣는 이는 세상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설명은 ‘이 세상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하고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열거할 뿐이기 때문이다. 즉 이유(결과에 이른 까닭이나 근거)가 아닌 원인(결과를 이끌어 낸 근본적인 일이나 사건)의 무한한 연쇄만이 이어진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거기에 이유는 없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했기 때문에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이유가 아니라 원인에 불과하며, 그 원인 역시 무수히 이어질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의 경우 이유 역시 무한히 이어진다.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누군가는 가족, 사랑, 명예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지, 중요하다면 그 이유가 뭔지에 대해 무한히 물어질 것이다. 결국 “지상의 모든 지식은,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고 확신시켜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내게 주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세계를 묘사해 보이고 분류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당신은 이 세계의 법칙들을 열거하고, 나는 알고자 하는 갈망 속에서 그 법칙들이 옳다는 것에 동의한다. 당신은 세계의 메커니즘을 분해하고, 나의 희망은 부풀어 오른다. 종국에 이르러 당신은 이 멋지고 알록달록한 우주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원자 자체는 전자로 환원된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 건 다 좋으니 나는 당신이 계속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당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태양계 유성군 얘기를 하면서 그 속에서 전자들이 어떤 핵 주위를 회전한다고 설명한다. 이 세계를 어떤 이미지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당신이 시(詩)에 도달했다는 걸 알아차린다… 이렇듯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 같았 던 과학은 가설로 끝나고, 그 통찰력은 비유 속으로 가라앉고 그 불확실성은 예술작품으로 낙착되어 버린다… 만일 내가 과학에 의해서 제반 현상들을 파악하고 열거할 수 있다해도 그것으로써 세계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ibid, p. 39)

따라서 카뮈는 "오늘날 우리 모두는 참된 인식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다" 선언하며, 만약 세계가 나한테 응해 참된 인식을 준다면, "만약 이 세계도 인간처럼 사랑하고 괴로워할 수 있다면" 부조리가 해소될 것이라 암시한다.

  1. <굿바이 카뮈>의 저자는 최성호 교수의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관하여>에서 소개된 토머스 네이글 교수의 주장을 끌고 와 카뮈의 논리적 빈약함을 비판한다.
    네이글은 삶의 관점을 1인칭적 관점과 3인칭적 관점으로 구분한다. 일인칭적 관점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없이 삶에 몰입하며 삶의 중요성이 자명한 것으로 이어지지만, 삼인칭적 관점에서 인간은 삶의 몰입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이 왜 중요한지, 왜 이어지는 지에 대해 계속해서 객관적 정당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객관적 정당화가 계속해서 이뤄진다면 앞서 말한 무한한 연쇄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네이글에게 부조리란 인간 내면속 자신의 삶에 대한 관점(시점) 차에서 오는 것이지, 카뮈의 말대로 세계의 속성에 따른 것이 아니다. 네이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뮈는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이세계에서는 채워질 수 없기 때문에 부조리가 발생한다고 시지프스 신화에서 주장한다. 카뮈의 이러한 주장은 세계가 지금과 다른 방식이었다면,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채워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에 대한 불안한 의심을 잠재울 수 있는 세계,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채워질 수 있는 세계란 상상할 수 없다. 부조리는 우리의 갈망과 세계의 충돌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내부에 상존하는 두 관점의 충돌에서 연유한다.(최성호(2019),50)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세상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예컨대 이 우주가 절망에 빠진 카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주고 보듬어주는 우주일 경우, 의미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부조리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기는 하지만, 일단 그렇다고 쳐보자. 이우주는 어떤 인격신이 창조한 세계로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며, 신께서는 모든 인간의 기도와 호소에 일일이 귀기울여주는 자상하고 합리적인 분이라고 치자. 카뮈가 어느 날 문득 묻는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러자 신이 대답한다. "나는 사랑의 신이다. 너를 사랑해서 태어나게 했다. 너는 내가 부여한 성스러운 목적과 소명을 위해 사역하며 살기 위해 태어났다. 내 명령에 순종하며 선하게 살다가 다가올 최후의 심판을 통과한 뒤에 내가 건설한 천국에서 72명의 아리따운 여인들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카뮈는 "와~ 그렇군요. 저의 호소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답변을 주시니 부조리가 깔끔하게 해소되었습니다. 삶의 의미가 충만해집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답해야 한다. 왜냐? 실제로 창조주가 존재하는 이상, 내세는 더 이상 희망이라는 속임수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삶의 의미, 정당성, 명증한 이해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갈망이 마침내 신성한 창조주에 의해서 응답되기 때문이다. " 실제로 카뮈가 원하는 게 이런 그림일 것 같지는 않다.(굿바이 카뮈, 73)

저자는 그러한 답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기초월적 의식이 3인칭적 시점에서 주어진 답에 계속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으므로 부조리가 해소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세계의 속성에서 기인한다는 부조리가 세계의 속성이 바뀌었음에도 해소되지 않는다면, 부조리가 내면의 관점차가 아니라 세계의 속성이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1.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부조리는 세계의 속성과는 무관한 것일까?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채워질 수 있는 세계는 상상 불가능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사랑의 신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나는 물론이고 카뮈도 사랑만 대표하는 신이 세계에 대한 참된 인식에 대해 알려줄거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신은 아마 전통적인 신 개념에 입각한 존재일 것이다. 유일하고 완벽하며 전지 전능한 존재이자 모든 원인들의 원인, 제 1원인으로서의 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존재가 창조한 세계에서 산다고 쳐보자. 만약 그 세계에서 우리가 카뮈가 말한 '참된 인식'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존재가 어떤 목적으로 인해 이 세계와 우리를 어떤 과정을 통해 창조했는지 낱낱이 인식 가능할 것이다. '참된 인식'이니 우리는 그것을 낱낱이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엔 그 어떤 거짓도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존재인지 이어지는 무한한 연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점차로 인한 질문의 무한한 연쇄가 이어질 여지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우리의 삶은 가장 높은 관점에서 정당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을 넘어선 정당화가 가능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무한한 연쇄의 끝에 제 1원인으로 존재하는' 신을 '참된 인식'을 통해 인식한 마당에 더 이상의 정당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부조리는 내면의 관점 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속성에 의한 것이다.
  2. 그렇지만 이런 추론에는 부조리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굿바이 카뮈>의 저자의 예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번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신'이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얘기를 해줬고 그것을 낱낱이 납득시켜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한퇴행이 끝나는가? 그 원인이 '신이 내린 사명을 수행하고 천국에서 72명의 아내를 얻고 어쩌구...' 처럼 듣기에 이상해보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어쩌면 72명의 아내를 얻는다는 얘기도 참된 인식을 갖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나 이상해보이지, 참된 인식을 통해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것이라는 게 밝혀질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는 '그래도...'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참된 인식'을 통해 완전한 납득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무한 퇴행 끝에 있는 제 1원인과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다 발견했으면서, 어떻게 질문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질문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우리한테 상상 불가능하다고 해서 정말 불가능한 일인 걸까? 요는 정말 '참된 인식'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무한퇴행의 답이 주어진 후에도 무한퇴행이 이어질지, 이어지지 않을지 그에 대해 알수도, 상상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3. 이쯤에서 나는 칸트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위의 추론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인간은 현실에서 카뮈식의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조차 없고, 우리의 지식은 현상으로 한정되는데, 이성이 월권을 행사해서 신이니 뭐니 하는 사물자체를 인식하려 들기에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비판한 칸트 이전의 교조적인 형이상학자들이 하던 실수를 답습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조리를 세계의 속성으로 두고 세계의 속성이 변화한다면 부조리가 해소 될 것이라는 카뮈의 주장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인식이란 것은 현상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주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속성이 변한 것을 인식하더라도 인간 내면의 3인칭적 관점에서 질문이 이어져 부조리가 이어진다는 주장(네이글), 질문이 이어질 수 없어 부조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주장(카뮈) 모두 알 수 없다. 세계의 속성이라는 것은 현상 넘어 물자체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4. 하지만 오히려 이런 칸트의 주장이, 역설적으로 카뮈의 '본래' 주장을 강화해주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우리는 세계의 속성이 뭔지 알 수 없는, 물자체를 알 수 없는 현상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속성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갖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리며, 그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부조리를 경험한다. 즉 참된 인식을 갖지 못해서 부조리하다는 카뮈의 본래 주장은 여전히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직업적인 합리주의자를 제외하면 오늘날 우리 모두는 참된 인식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다.(시지프 신화, 37)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시지프 신화,41)

(내 기억 상, 칸트 역시 그런 식으로 물자체에 대한 추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성의 본성이라 말한적이 있던 것 같다. 다만 칸트는 그런식의 추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은 이성의 월권행위이고 교조적인 형이상학을 세우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1. 그것이 욕구라면, 우리는 그런 세계 내에서 참된 인식을 얻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부조리의 문제는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본성을 지닌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문제라고 카뮈는 주장하며, 그 예시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부조리의 징후들을 열거한다. (시지프 신화 31-33, 일상 속에서 미래를 기대하다 느끼는 회의, 사물의 낯섦, 권태, 사르트르의 구토, 죽음 등)

  2. 지금까지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나는 결국 네이글과 <굿바이 카뮈>의 저자가 카뮈를 비판하며 거론하는 무한한 정당화의 가능성이 카뮈가 주장하는 참된 인식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카뮈가 주장하는 세계에 대한 참된 인식을 얻으려면 결국 무한한 정당화가 끝나는 지점을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우리로선 생각할 수 없는 물자체 영역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카뮈의 본래 주장인 '부조리란 참된 인식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는 것' 을 지지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

  3. 이 글은 <굿바이 카뮈>를 읽던 도중 책의 저자가 카뮈를 자꾸 내려치는데에 필자가 마음에 안들어서 새벽에 써본 글이다. <굿바이 카뮈>는 영미철학의 삶의 의미에 대한 논의 개론서로 괜찮은 책이지만, 카뮈를 위시한 삶의 의미의 문제를 청춘의 치기어린 인생의 고민으로 대표시키면서 카뮈와 결별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 치곤 카뮈를 치워야할 문제로만 대우하지 진지하게(?) 대하는 것 같진 않다. 그냥 <굿바이 카뮈>가 참조하는 리처드 테일러, 노직의 원저작을 읽는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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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사고 실험이 재미있네요. 저는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고민이 "치기어린 인생의 고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저자에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자가 이런 사고 실험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가령,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자식이 부모의 그 사랑을 반드시 값진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할 수도 있죠. 혹은 그 사랑을 값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같은 (교회 전도지에서 흔히 나오는) 문구가 설령 객관적으로 '참'이라는 사실이 어느 날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에 별다른 감동을 못 느끼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는 실제 기독교 신앙에서도 자주 나타나죠. 구약성경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와 직대면하면서도 야훼에게 굉장히 무례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묘사하니까요. 또 키에르케고어는 (소위 '무한한 체념의 기사'라고 표현되는) 허무주의자에게는 설령 하나님과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구원의 손을 내민다고 해도 그가 인생 자체에 대한 분노와 반항심으로 가득 차서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인생의 의미가 단순히 3인칭적 관점에서 사실에 대해 기술하는 것만으로 해명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굳이 저자가 말하는 "자기초월적 의식"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사실(fact)'로부터 '가치(value)'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은 동의하는 거죠. (이 점이 G. E. 무어, 윌프리드 셀라스, 힐러리 퍼트남 같은 철학자들이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용어로 지적하는 문제이기도 하죠.)

그리고 이 점에서, 저는 인생의 의미가 '사로잡힘(seizure)'의 경험 없이는 이야기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객관적으로 세계의 '사실'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중 어느 하나가 우리를 매혹하고, 압도하고, 사로잡을 때, 그 대상이 바로 삶을 걸어볼 만한 궁극적 대상이 되는 거죠. (이 주장이 바로 분석심리학자 칼 융과 신학자 폴 틸리히가 강조하는 점이기도 하고요.) 부모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랑이 어느 날 감사와 감동으로 다가오게 될 때, 우리가 그 사랑에 굴복하게 되는 것처럼요. 적어도,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사실이 그런 감동으로 우리의 삶에 호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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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자의 사고실험이라기 보단, 최성호 교수의 저작의 원안이 되는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부조리의 철학:카뮈와 네이글에 대한 독법>에서 최성호 교수님이 네이글의 관점에서 욥기의 욥을 예시로 들며, 신이 욥에게 자신의 고통의 원인에 대해 듣는다해도 욥은 여전히 신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말하며 선취하고 계십니다.

그건 그렇고 저도 삶의 의미에 단순히 이성의 이해를 넘어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데 동의 합니다. 그런데 영미권 철학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것이 주관적 끌림을 넘어 객관적 가치를 지녀야 삶의 의미로 규정된다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삶의 의미라는 개념, 가치의 범주와 관련해 특별한 측면은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가 적절하고 밀접한 형태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사랑'은 부분적으로 주관적인 요소로서 '태도(attitude)'와 '느낌(feeling)'을 수반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사랑할 만한(worthy of love)'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삶의 의미라는 개념은 객관적인 요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사랑할 만한 (삶의 의미에 기여할 만한 가치가 있고, 다른 대상들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에는 바로 이런 요구가 담겨 있다. 또한 행위자 자신의 평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삶은 의미는 '주관적인 이끌림(subjective attraction)'이 '객관적인 매력(objective attractiveness)'을 만났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이 어떤 대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뭔가에 빠져 있거나 열광하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때, 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뭔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고 있는 모든 또는 대부분의 활동에서 지루함이나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동시에 그런 활동이나 대상 자체가 가치 없다면, 아무리 열정적으로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마약에 빠지거나 십자 퍼즐을 손에서 떼지 못하는 것처럼, 중독으로 인해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의 삶을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삶의 의미라는 개념은 주체 그리고 주체를 끌어당기는 객체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돼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사랑하는(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과 긍정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조건은, 특정 대상이나 활동의 가치에 대한 확인 없이 긍정적 태도만으로는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수전울프, Life-삶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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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울프의 주장에 대해 다소 양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명제들은 (전통적 인식론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일종의 '기초 믿음' 혹은 (앨빈 플란팅가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보증된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다른 명제들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논박되는 명제들이라기보다는, 그 명제 자체가 다른 모든 논의들을 가능하게 하는 지위에 있는 거죠. (실제로, 틸리히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삶이라는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장 아래에서 피라미드 전체를 지탱하는 대상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죠.)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 (a) 다른 모든 믿음들을 정당화하고 정초하기 위해 필요한 이런 믿음들에 대해 '객관적'인지 '주관적'인지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범주의 오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한편으로, (b) 그런 기초 믿음들은 특별히 오류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 그 자체로 '객관적'이라고 얼마든지 전제되고 인정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전자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적인 관점이고, 후자는 플란팅가와 브랜덤적인 관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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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혹시 네이글의 <자기초월적 의식>이 3인칭 관점에서 주어진 물음들을 어떤 방식으로 이어나가는지를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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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대로 무한히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질문이라 네이글이 더 질문을 이어가진 않습니다

다만 네이글은 내면의 관점차로 인한 부조리에 대해 카뮈식의 영웅주의가 아닌 아이러니로 대응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어지는 3인칭적 관점 (영원의관점)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하지만, 사실 진짜 영원의 관점에선 그런 절망마저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좌절하는 대신, 네이글은 우리가 하는 일이 백억년 후에 중요치 않아진다 해도, 마찬가지로 백억년 후의 일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신경쓸 필요가 없도 없고 (백억년 후에 중요치 않으니) 좌절할 필요도 없다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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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적인 대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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